새벽 2시 반이면 어김없이 응향각凝香閣 불은 켜진다.
해인사 노전爐殿 선해 스님의 기상시간은 다른 대중들보다 항상 30분 빠르다.
3시 도량석을 돌자면 먼저 일어나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찬물로 세수하고 가사장삼 수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면 으레 10분 정도가 남는다.
스님은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대중이 깨어나기 직전, 홀로 깨어 있다는 것은 묘한 희열을 가져다준다.
잠시 가부좌하고 앉아 〈초발심자경문〉을 떠올려 본다.
단의금구성언但依金口聖言이언정 다만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에만 의지할 것이요 막순용류망설莫順庸流妄說이어라 용렬한 무리들의 헛된 말은 듣지 말지어라.
기이출가旣已出家하야 참배청중參陪淸衆인댄 이미 출가해서 청정한 대중에 참여한 몸이면 상념유화선순常念柔和善順이언정 부득아만공고不得我慢貢高니라 항상 부드럽고 화합하고 착하고 온순함을 생각할 것이요, 아만심을 내지 말지니라.
어느새 시계바늘이 정확히 3이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스님은 주저 없이 일어나 해인사에서 가장 큰 목탁을 목에 걸고 노전실 문을 나선다.
“정삼업진언 …….” 대중처소의 불이 하나 둘 밝혀지고, 학인들의 조심스럽고 잰 발걸음 소리가 새벽을 가른다.
屠0년 해인사 법당 총책임 자리인 노전 소임을 맡았으니까 꼭 11년이 된다.
바로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강산이 한 번 바뀌는 시간이 흘러, 그 안에 해인사에서는 방장 스님이 세 번, 주지 스님은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큰절의 노전 소임을 10년 이상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대체로 주지가 바뀌면 노전도 바뀌는 것이 통례인데,선해 스님은 그만큼 무던하고 변화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비결은 결국 공심公心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처음 노전 소임을 맡으면서 스님은 도량석만큼은 꼭 직접 하겠다는 원願을 세웠다.
그 원력대로 새벽도량석만큼은 혹 부전에게라도 맡겨본 적이 없다.
이제는 2시 30분만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지만, 초기에는 긴장한 탓인지 실수도 많았다.
한 번은 얼핏 눈을 떠 시계를 보니 3시였다. 부랴부랴 나와서 목탁을 두드리며 아침송주를 시작하려 하는데 “이 시간에 웬 도량석이냐?”는 주지 스님의 호통소리가 들려왔다.
잠결에 2시를 3시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뿐인가, 한 번은 법당문을 늦게 여는 바람에 당시 주지이셨던 법전 스님이 법당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바람에 몸둘 바를 몰랐던 적도 있다.
법전 스님은 아침 예불을 거르는 법이 없었고 예불이 시작되기 전에 빠짐없이 108배까지 꼭 챙기셨다.
해인사 대부분의 의식에는 선해 스님의 염불소리가 따른다.
편안하면서도 폐부 구석구석에 스며드는 구성진 선해 스님의 염불은 이제 해인사와 거의 일체가 돼가고 있다.
도량석에서부터 각종 재의식, 성철 스님의 다비식도 선해 스님이 집전을 했다.
그리고 최근 해인사에서 거행하고 있는 1029일 천도재는 주지 세민 스님과 함께 어울리는 화음을 연출해 내고 있다.
塗3년 14살의 나이에 달랑 차비 300원 들고 무엇에 이끌리듯 해인사를 찾은 이후 해인사와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정된 길이었을 것이다.
선해 스님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병치레가 심했다.
‘말초신경관절염’이라는 증상으로 혼자서는 걸어다닐 수도 없어 어머니가 업고 다녔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어머니가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혹여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간호사가 업고서 체중을 재곤 했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때 어떤 스님이 병원에 오셔서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외우라는 소리에 무조건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외우는 일만 했다. 결국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으로 일어나 걸을 수 있었고, 스님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해인사로 향했다.
충청도에서 왜 해인사까지 왔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무엇에 이끌렸는지 해인사를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그 먼길을 물어물어 찾아왔다.
지금이야 출가하려면 학력 제한도 있고,나이 제한도 있지만 그 때만 해도 그런 것이 전혀 없던지라, 앳된 소년이 아마 출가하겠다고 찾아오니 서류를 내주면서 출가동기를 기록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후에 그 기록부를 들춰보니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上求菩提 下化衆生)”라고 적어 놓았다. ‘내가 언제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던고.’ 스님은 자신의 초발심에 웃음을 자아냈다고.
전생의 숙업인지 어려서부터 염불하기를 좋아했다.
주변에서 염불 잘한다 소리를 듣고는 더 열심히 했다.
은사이신 명진 스님 역시 “너는 염불에 자질이 있으니 염불을 해라.”고 이르셨다.
염불을 가르쳐 주신 것은 영암 노장님이셨다.
소리가 못 따라오면 즉시 목탁채가 날아오고 그대로 머리에 꽂힌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리 배운 덕에 해인강원 학인 시절에도 도량석은 항상 선해 스님의 차지였다.
당시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어 ‘왜 꼭 나에게만 도량석을 맡기느냐’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해인사를 알게 하는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는 해인사 노전을 맡으면서 겨우 깨달았다.
도량석 담당이던 학인 시절 기억에 남는 일 한 가지가 있다.
매년 정월 초하루만 되면 도량석을 하겠다고 나서는 선방 스님이 있었다.
그 스님은 꼭 정월 초하루에만 도량석을 하겠다며 목탁을 거의 빼앗듯이 가져갔다.
체구도 엄청 컸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야말로 가야산이 떠나갈 듯 목탁을 두드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량석을 했다.
절 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지금 버스 세우는 곳까지 내려가 산내 전체를 돌았다.
그 스님이 선택한 도량석 염불은 다름아닌 〈초발심자경문〉이었다.
아마 정월 초하루도 되었으니 초발심으로 돌아가 모든 대중이 자신을 점검해 보자는 얘기였을 것이다.
어려서는 그 심중을 헤아리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그 깊은 신심이 그립기만 한 것은 너무나도 헤이해져 버린 출가자들의 모습이 이제는 스님의 눈에도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든 모양이라고.
예전 노장님들도 혀를 차며 “요즘 애들 너무 공부 안한다.”는 소리를 했던 것 같다.
지금은 선해 스님 자신이 염불강의를 하며 걱정을 하고 있다.
공부하려 들지 않는다고.
특히 염불은 안해도 된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화가 난다. 그것이 어디 젊은 출가자들의 탓만일까.
출가자들에게 염불강의를 해오면서 선해 스님의 교수방법은 일단 외우게 하는 것.
“알면서 안하는 것과 모르면서 안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특히 해인사가 화엄종찰인 만큼 〈의상조사 법성게〉만큼은 외우지 않으면 더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않는 고집을 지금도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해인사로 출가한 이들은 최소한 〈법성게〉 만큼은 확실히 외우고 있다고.
선해 스님은 염불이 기능직같이 홀대받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솔직히 불교신도들에게 있어 염불과 주력을 뺀다면 한국불교에 무엇이 남을까. 염불은 쉽고 빠르게 부처님의 말씀을 접할 수 있는 길이다. 염불문 속에는 무수한 깨달음의 언어들이 담겨 있고, 소리는 우주 생명의 리듬을 구현한다. 염불소리 그 자체가 영산 회상의 구현인 것이다.
천산千山은 보리로菩提路요 천산은 깨달음의 길이요 만산萬山은 반야봉般若峰이로다 만산은 지혜의 멧부리로다.
비로무처소毘盧無處所이언만은 비로자나 부처님은 처소가 없지만 관음觀音이 생자비生慈悲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심을 일으킨다.
나무아미타불 “이 얼마나 감동스런 말씀입니까? 그대로 선적禪的인 언어지요.
수많은 부처님 말씀과 조사 스님들의 게송 중에서도 정수만 뽑아놓은 것이 염불문입니다.
특히 제문祭文을 보면 오도송悟道頌이 많아요.” 노전은 법당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법당관리는 물론 법당에서 있게 되는 모든 의식의 집전자이기도 하다.
지금은 노전이라는 소임이 있다는 것조차 아는 신도들이 많지 않다.
과거에 노전은 주지 스님 다음 자리였다. 그만큼 노전소임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만큼 의식은 불교신앙의 근간이었다.
그러면 이제는 의식을 뒷전에 둘 만큼 불심이 한 단계 높아졌는가 하면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여전히 재齋는 사찰경제의 바탕이 되고 있는데….
불사가 외형을 만드는 일이라면 염불은 내실을 다지는 일이라 하겠다. 기초가 튼튼할 때 그 위에 서 있는 집도 튼튼해질 수 있다고 선해 스님은 생각한다.
실은 지난해 새 주지 스님이 부임해 오실 때쯤 선해스님은 ‘10년간 해인사 노전 소임을 맡았으니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지 세민 스님은 1029일 천도재를 같이하자는 제안을 하셨고, 그래서 그 시한을 1029일 천도재가 끝날 때까지로 잡아놓고 있다.
최근에는 12개에 이르는 염불 테이프도 냈다.
해인사의 ‘새벽예불’에서부터 ‘석가모니불 정근’에 이르기까지 선해 스님의 모든 염불소리가 담겨 있다. 그간 하도 많은 염불 테이프가 나온 터라 생각만큼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라며 소년처럼 부끄러워한다.
얼마 전 스님께 해인강원 출신의 학인으로부터 편지가 날아왔다. 내용인즉 해인사를 떠났지만 자기는 해인사가 너무도 좋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해인사에는 나라의 보물이자 법보法寶인 팔만대장경이 있어 좋고, 신심 나게 하는 선해 스님의 염불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해 스님은 말한다.
“내가 학인들에게 염불을 가르쳤지만, 이제는 학인이 나를 키우는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