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 처음 들어서면 작은 관에서 물이 쉬임없이 흘러내리는 물터가 눈에 뜨인다. 뒤뜰에 작은 요사채를 지을 때였다. 땅을 고르던 중에 그 밑뿌리가 상당히 깊어 보이는 큰 돌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다. 일꾼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간신히 들어올리는 순간 갑자기 물줄기가 솟구쳐 올라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엉겁결에 물길을 찾은 것이다. 뜰이 온통 진흙탕이 되어 한 차례 법석을 피웠으나, 관을 대어 그 물을 앞뜰로 끌어 내고 보니 어지간한 가뭄에도 마를 줄 모르는 훌륭한 샘물이었다. 물맛도 더 없이 좋아 큰 보배를 얻은 듯하다고 한다. 뒤뜰에서 찾아낸 것은 물길만이 아니다. 고려의 것으로 짐작이 되는 기와장도 있다. 스님이 자랑스레 내보이는 붉은 기와 조각에는 안쪽으로 고려기와에서 흔히 보이는 삼베무늬가 또렷하게 남아 있다. 내원사가 원효스님이 지은절이고 보면 천성산의 골짝에는 신라 때부터 수도하는 암자가 적지 않았을 게고 또 지금의 비로굴이 앉은 자리도 그 가운데 하나였으리라고 스님은 추정한다. 이 곳의 지형지리가 수도처로 맞춤한데에다 옛 기와조각까지 나온 터이기에 말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스님의 눈빛은 유구한 역사를 훌쩍 거슬러 올라가, 그 옛날에 이 곳에서 향화를 사르며 불타의 길을 흠모하던 어느 선사의 외로운 행적을 뒤좇는 듯하다. 아니게 아니라 지금은 잡초만 무성한 저쪽 산중턱의 암자터를 볼 때마다 정명스님은 우리나라 불교역사의 흥망성쇠를 읽곤 한단다.
스님은 비로토굴을 ‘고급토굴’이라고 여긴다. 승려생활의 많은 세월을 토굴 생활로 보내 왔지만, 이 곳처럼 마음과 몸이 편안한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토굴에는 스님이 오기 전부터 신심 깊은 화주보살이 있어 생활의 어려움이 없도록 이모저모를 돕고 있다. 소소한 것 외에는 궁색함이 없도록 보살피는 그 보살들은 ‘공부하는 스님에게 폐 안 끼친다’며 찾고 싶은 발길도 애써 절제한다. 이렇듯 세심하게 마음을 쓰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그 보살들은 오로지 공부하는 스님들을 뒷바라지함을 즐거움으로 여길 따름이다. 더러 험한 산길에서 토굴 지붕을 보고 마을이 나타났다고 좋아라 찾아오는 등산객이나 산보 삼아 오르곤 하는 내원사 스님말고는 거의 찾는 이가 없어, 몇날 며칠이고 홀로 말 않고 지내기가 일쑤이다. 그 덕분에 스님은 운동 삼아 일하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온종일 참선에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눈이 온 뒤로는 죽은 나뭇가지를 베어내고 등짐 하나씩 땔감을 해오던 그나마의 운동도 멈춘 채, 참선 수행에만 열중하고 있다.
제주도가 고향인 정명스님은 고둥학교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되어 고향바다를 떠나 산에 들었고, 지금까지 삼십 년을 산에서 났다. 고등학교를 마치면서 청운의 꿈을 품고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어이없이 떨어졌다. 낙방에 대한 오기로 이를 악물고 재수 준비에 한창이던 어느 날인가 어린 나이답지 않게 한문에 능하고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깊이를 지닌 한 친구가 찾아왔다. 부처가 말씀한 진리만 알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는 친구의 말이 스님의 가슴에 예사롭지 않게 파고들었고, 결국 스님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그 친구와 토론을 하던 가운데. 부처님은 일체를 두루 아는 분으로서 나고 죽음에서 자유로울뿐더러 욕심과 집착에서도 또한 자유로운 분이라는 이야기가 가슴에 깊이 박히더군. 무엇보다도 나를 흔들어 놓은 것은 불도를 닦는 것이 일체의 지(智)를 성취하는 길이라는 말이었지. 친구를 보낸 뒤에 혼자 공부하려니, 영어니 수학이나 물리 따위를 애써 공부하느냐 차라리 불법 하나를 온전히 알면 좋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이 불쑥 고개를 치마는 것이야. 글쎄, 어린나이에 인생이 무상함을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 만은, 어쨌든 그런 막연한 느낌에서 그 길로 곧바로 나주의 다보사로 출가하였지.“ 「페이터의 산문」을 끼고 다니며 줄줄 외던 사춘기 시절의 감상이 어쩌면 정신과 통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즈음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석가모니가 사대 성인의 한 사람이라는 것뿐이었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진리를 찾는 데 나의 삶을 바치리라는 원을 세웠다. 그 막연하던 원이, 강산아 변하여도 세번은 변하였을 지금에 이르러서는, 바로 여기에 무언가 참됨이 있다는 확신으로 굳어졌기에 스님은 죽기 전에 그 무언가를 확연히 알게 되기를 바란다. 스님은 중국의 설봉선사를 특별히 좋아한다-투자선사를 세번씩 찾아가 도를 구하고, 동산스님의 회상에도 아홉번이나 찾아간 설봉스님의 그 모습이 간절한 구도심으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정진하는 그야말로 실참실구하는 선지식의 자세로 받아들여져서이다.
그런 정명스님이 10.27법난 바로 뒤에 총무원 대신 그 뒷일을 수습하느라 만들어진 조계종 정화중흥회의에서 기획부 일을 맡아 보았다는 것이 뜻밖의 일로 여겨진다. 탄성스님을 상업위원장으로 하여, 종단 안의 불합리를 개혁하고 빠른 시간 안에 정상적인 종단을 발족시키려는 목적에서 구성된 이 중흥회의에, 그때에 서울의 망월사에 머물던 스님은 스스로의 뜻에 따라 참여하였다고 한다. 남의 신발을 잠시 빌려 신고 내려왔다가 우연찮게 그 일에 끼어들어 석달 남짓 일을 보게 된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본시 스님은 모임 같은 것을 싫어하였다. 그런 스님에게, 인연이 그리 되려고 했는지, 절밥을 그토록 오래 먹고 살았으면 남을 위한 일에도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는 공박이 그즈음 유난스레 자주 쏟아졌고, 해서 과연 ‘내가 할 일이 무엇일까’하고 곰곰이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즈음에 10.27 법난이 일어났다.“사방에서 뒷수습할 스님들을 모은다는 통지가 날라 들었어 광덕스님, 돈연스님 같은 이들이 중심이 되었지. 공식 기구에 한번도 얼굴을 내민 적이 없는 나였지만, 꼭 한번은 일을 해야 한다고 여겨 내려간 게야. 정권이 저질러놓은 사건으로 깊이 멍든 우리 불교의 현실이 가슴 아팠어. 그 뒷일을 떠맡아 종헌종법을 만들고 생수스님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는 일을 일단락 짓고 나서 그곳을 떠났지. 그때를 회상하는 스님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하다. 스님은 10.27 법난이 불교를 탄압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에 앞서 기독교를 비롯하여 반정부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종교계 전체에 쐐기를 박으려는 정치적인 음모였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그 철퇴가 하필이면 불교에 먼저 떨어진 것은, 그 무렵 절 집안이 그만큼 허술하였기 때문이란다. 곧 그 모든 책임의 근본이 우리 불가에 있었음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당시 현장에 몸담았던 정명스님의 지론이다. 당국에 날라든 진정서가 육천 통이나 되었는데, 한결같이 스님들끼리 서로를 헐뜯는 내용이었어. 그쯤 되니 계엄사측에서는 절 집안이 비리로 가득한 줄 알았지. 그러나 조사 결과는 털어도 먼지 안 나는 게 대부분이야. 육천 통의 허황된 투서란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어. 그러나 법난이란 것이 결국은 서로를 미워하고 또 믿지 못하는 우리 절 집안의 썩은 풍토가 빚어낸 자업자득의 재난인 셈이지. 어찌 남에게만 탓을 돌리겠나.“ 한때 무지한 군화발에 능욕당한 터이나 십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스님은 불교의 앞날이 퍽 밝다고 믿는다. 그 믿음을 가장 크게 뒷받침하는 것이, 가난에 못 이겨 입산하던 시절은 가고, 스스로의 신념과 의지로 출가하여 구도심을 불태우는 이들이 불맥을 잇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다.
선방에서 몇해 지내다 보면 대개들 사진이 한 뭉텡이는 모인다. 해제 날을 비롯하여 정기적으로 기념사진 따위를 찍곤 하여서이다. 누군가 건내준 책도 지대방에 놓아두고 훌훌 떠나곤하는 스님인지라 그렇게 모인 사진을 쓰잘 데 없는 것들이라 싶어 아궁이에다 태워버렸는데, 지금에 와서는 못내 아쉽다고 한다. “어쩌다 짐 정리라도 할 양이면 문득 손에 잡히는 사진 한 장에서 그때 가졌던 마음가짐이 새롭게 떠올라 지금의 나를 채근하게도 되고, 도반들 생각에 흐뭇해 하곤 하지.” 참선을 하는 이가 생각이 이러하니 초발심의 정신이 퇴색한 것이 아니면 나이 탓인 모양이라면서 스님은 쑥쓰러운 듯 씨익 웃으신다. 정명스님은 ‘중이 중다와 지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밖에 없다고 여긴다. 그러니 혹여 세인들과 다름없이 이름이나 재물에 집착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불가를 더럽히는 무리일 뿐이라고 본다. 한편, 스님들의 사회 참여에 대해서는 구도심을 근본으로 의지하여서 사회변혁을 꾀하려 노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보살의 길임을 확신한다. 전기도 없고, 너무 깊은 산중이라 우체부도 오지 않고, 신문하나 받아볼 수 없는 토굴에 머물고 있으나, 정명스님은 세상 일을 보는 식견은 진보적인 젊은이들에 뒤지지 않는다. “오공화국 시절에 나라와 국가원수를 위한 기도회라든지 모씨의 당선을 위한 지지법회 따위를 열며 꼼짝없이 양 손바닥을 부벼대던 스님네가 어제 와서 오공비리가 어떻고, 진상 규명을 어쩌고 하며 목소리 높이는 일은 정말로 배꼽잡고 웃을 일이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스님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적개심도, 비아냥거림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예의 그 소박한 웃음만이 얼굴에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