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해인지에 실린 세 편의 글은 종단의 중진 스님들이 승단의 정체상과 진로 및 종단이 현실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고민과 견해를 담고 있는데 당장의 성과는 없더라도 승단의 미래에 무척 고무적이라 생각된다.
그러한 고뇌와 모색이 좀더 깊어지고 많은 사람이 함께한는 논의의 장으로 발전했으면 히는 바람이 있다. 또 서로 다른 문제 의식을 갖고 있더라도 가능하면 합의점을 도출해 내려는 열린 자세로 논의를 진전시켰으면 좋겠다.
불교의 역사 속에서 부처님의 입멸 뒤 승단의 분멸을 야기한 불행한 사건인 근본분열의 원인이 되는 내용은 주로 생활상의 문제인 계율에 관한 것들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입멸하시면서 아난 존지에게 소소계는 버려도 좋다고 했지만 경과율의 결점을 주도한 가섭 존자와 우파리존자는 이난 존자가 전한 이러한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율에 대한 가섭 존자의 엄격한 적용은 어찌 보면 백 년 뒤에 승단이 맞을 불행한 결과를 잉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불멸 뒤 백 년경 승단이 격렬한 토론과 진통을 겪으면서 열 가지의 문제점에 대해 죄법이라는 판정을 내렸는데 승복하지 않은 비구들이 있어 승단이 분열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승단분열의 원인인 열 가지는 지금 보면 사소하고도 작은 문제들인데 그 가운데 금, 은을 받는 문제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곧 그 때의 시대 조류에 따라 사회의 화폐 경제 체제에 적응할 것이냐, 적응하지 않고 수행승단의 순수성을 지킬것이냐가 논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불교의 역사는 율장에 근거하여 열 가지 사실에 대히여 비법非法이라고 판정한 승단의 결정이 오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계율에 관한 점은 승던의 근본에 뒤 흔들리는 민감하고도 중요한 시안이므로 진지하고도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계율 문제를 거론힘에 있어서는 지운스님의 주장처럼 계율 문제에 대한 평가의 근거를 현실적인 요구나 필요성에 의하기보다는 ‘법法’ 에 의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우리가 비구계를 받을 때 적용하는 이백오십계는 불교의 장구한 역사 산물임으로 이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현실적으로 조금 안맞는 점이 있더라도 가능하면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계율이 제정된 근본정신을 살리는 쪽으로 계율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현실적으로 거의 계율이 제정된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조항이나 인도와 우리나라의 문화적, 시대적 차이로 말미암아 사문화된 조항들에 대해서는 종단의 율사 스님들과 원로, 중진 스님들이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고 법과 율의 원칙과 근거에 의해 재조정할 필요도 있다.
불교라는 종교의 지도자로서의 스님들이 지켜야 할 승려로서의 출세간의 위의가 있고, 세간에 살면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재가자들이 지켜야 할 불교 윤리가 있다. 조금 범위를 넓히지면 불교도 뿐만 아니라 탈산업 사회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윤리로써 정착될 대중적인 새로운 윤리관과 삶의 지침을 제시할 수 있었으면 더욱 좋겠다. 계율은 원래 있던 율법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교화의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제정한-수범수제隨犯隨制-것이므로 다양하고도 복잡한 사회현실을 모두 담아낼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이백오십계라는 항목에만 집착하다 보면 현실적으로 대두되는 중요한 문제들을 놓칠 우려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율, 또는 불교적 윤리적 지침의 제정도 고려해 볼 사항이다. 예를 들면, 낙태 문제라든지, 최근에 문제로 부각된 생명 복제 문제 등에 대하여 불교계는 정리된 입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율장에는 그런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율장의 문구에만 집착하면 이런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떠오른 문제들에 관해서는 법法과 율律을 기준으로 해서 종단에서 경전과 율의 정신에 기초한 연구검토와 종단 어른 스님들 및 전문학자들의 자문을 구하는 과정을 거쳐서 불교적인 정리된 입장이 나와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야말로 계율 정신을 현실적으로 되살리는 중요한 과정이다.
천주교의 예를 들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대두 되면 교황은 교단 내의 의견을 모으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서 천주교의 정리된 입장을 회칙으로 발표한다고 한다. 이것은 사안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한다고 하는데, 이런 방식은 천주교인들로 하여금 현실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지침이 되며 교단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신자들의 윤리 의식을 지도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이러한 기능이 없으므로 개인적으로 알아서 판단해야 되고 그러다 보니 서로 다른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같은 불교인이면서도 서로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우리 승단의 진로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조계종은 사회에 대하여 종교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면서, 또한 내적으로는 수행자 집단으로서의 내용을 가져야 하는 이중적인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총무원장 스님의 대사회적인 슬로건이 ‘깨달음의 사회화’ 인데 이것은 대승보살 정신을 종단이 표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종단의 수행 풍토는 중생과 동사섭하는 대승보살 수행이 아니라 산중에서 고요히 정진하는 좌선 수행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신도를 교화하거나, 사회와 관련을 갖는 여러 가지 소임은 수행의 대열에서 벗어난 스님들이 하는 것이라는 풍토가 종단의 일반적인 정서이다.
우리 조계종이 수행승단으로 나갈 것인지 교화에 중점을 둘 것인지, 승단의 장래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와 연구가 있어야 겠다.
종단의 현실 상황을 토대로 소수의 정예 수행자를 중심으로 승단의 수행 풍토를 이끌어 나가면서 종단의 중심을 잡고, 나머지 대중은 보살수행을 통해 대중속에서 불교의 진리를 실천하는 이중적인 구조도 상정해 볼 수 있겠다. 그러자면 수행에 전념하는 승려와 대중 교화를 담당하는 승려와의 차별성이 있게 된다.
위에서 거론한 종단의 진로와 계율에 관한 점들은 불교 사상 및 수행 체계 전반에 대한 새로운 교판의 수립을 염두에 두고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口
이 난은 해인지 1월호에 실렸던 도법스님의 글에서부터 비롯된 승가 체계에 대한 논단의 장입니다. 도법스님이 제기한 ‘승단의 계율 수지 문제’에 대한 지운스님의 반박의 글이 일차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지난달에는 진열스님의 ‘계율이 지켜지지 않는 종단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 있었습니다. 이제 세번째로 실천불교승가회의 일문스님의 글을 싣습니다. 승가의 체계 및 계율 문제에 대한 사부대중의 지대한 관심속에서 스님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시작된 이 논단이 청정한 승단을 구현하는데 생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