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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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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89년 02월 84호
어느 때 부처님께서 앙가국 첨바(擔婆)성의 가가(伽伽)라는 못가에 계셨다. 이때에 다섯 가지 법 [種姓, 諷誦, 端正, 持械, 智慧]을 갖춘 종덕(種德)바라문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이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첫째로 칠대 이래로 부모가 남의 업신여김이나 비방을 받지 않고, 둘째로 이학(異學)의 삼부를 외우고 온갖 경서를 다능히 분별하며 세상 서적의 깊은 뜻을 두루 익히지 않은 것이 없고, 또 능히 대인의 상, 법, 길흉을 밝게 살피는 것과 제사, 의례에 능하며, 셋째로 얼굴이 단정하고, 넷째로 계를 가지는 것이 구족하며, 다섯째로 지혜가 통달한 사람을 바라문으로 일컫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앞의 세 가지는 접어두고 뒤의 두 가지, 지계(持戒)와 지혜(智慧)를 구족하면 비구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일생을 사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산과 그 속에서 뛰노는 다람쥐, 나무와 그 위에서 지저귀는 작은 새, 겨울의 찬 바람, 흰 눈 같은 자연도 만난다. 그런
데 모든 만남이 반가운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 동안 짜증이 나는 일이 적어도 날마다 한 번쯤은 있기 마련이다.
얼마 전 눈이 오던 날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까지 여행을 하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에 일기예보에서 중부와 남부 지방에 비가 내릴 것이라고 들었고, 또 출발할 때는 이미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무슨 대수로운 일이야 있겠냐고 생각하며 버스에 올랐다 그리 오랜 시간을 버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여행도 아니고 도중에 한번쯤 휴계소에서 쉬어가는 맛도 있어서 가끔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을 해 온 터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날은 영동을 지나서 부터는 이차선 모두가 차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어둠이 깔린 길 위에는 눈이 얼어붙어 있었고, 게다가 비까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십여 미터나 갔을까 싶으면 이내 멈춰 서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사람들이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느라 피워대는 담배의 연기가 차 안에 가득하게 되었다. 공기를 소통하기 위해 천장의 문을 열면 아기를 데리고 탄 부인은 감기든다고 못마땅 해 하였다. 버스 승객 중 중년이 넘은 신사 한 분은 운전기사가 추월을 해서라도 빨리 가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버스회사의 사장에게 신고하여 버스 기사가 앞으로 운전을 못하게 해야겠다고 협박이라도 하듯이 큰소리를 쳤다. 여덟 시간만에 도착하니 대구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매사에는 다 이론을 불일 수 있어서 말은 항상 아주 그럴듯하게 들린다. 고속버스에서 신사가 당당하게 큰소리를 칠 때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기사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생각되었으니 말이다 매사 다 그럴듯한 이론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또한 무엇이든 완전한 것은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만남이라는 것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인생에서도 시시각각으로 마주치게 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아주 뿌듯하고 보람 될 수도 있고 불행하게 될 수도 있다. 환경은 같아도 결과는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곧잘 자기의 불운과 잘못을 남이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한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너무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 라고 하면서, 지금 자신의 불행을 자기 탓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운명의 탓으로 돌려 버리길 좋아한다. 이렇게 모든 책임을 자기 아닌 부모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면 당장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이나, 위대한 지도자, 인류의 평화와 행복에 헌신한 이틀의 대부분은 불운한 성장기를 거치면서 자신의 힘으로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불운한 환경과 여건 때문에 좋은 환경의 사람보다 몇 배 노력하고 애써서 자신의 불운을 극복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우리가 삶에서 자신의 능력과 역량을 발휘하려면, 어느 정도의 불운과 불행은 남의 탓으로 돌려버릴 것이 아니라 극복함으로써 스스로를 성숙시키는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삶이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나 흘러가 버리는 냇물처럼 느껴질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한 삶에서의 만남은 우연인 것처럼 하찮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한 만남은 사막처럼 쓸쓸해서 이쪽에서 손을 뻗으려면 의지가 없으면 더 이상 깊은 관계는 생기지 않는다. 저쪽에서 말을 걸어와도 이쪽에서 응답해 주지 않으면 그는 떠나 버리고 만다. 자신에게 결정적인 행운을 가져다 줄 사람이었는데 이쪽에서 응답이 없어 그냥 바람처럼, 물처럼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만남은 행운의 기회로서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잠시 머물다 가더라도 함께 좋은 대화를 나눈다면 이 세상은 좀더 정다워질 것이다. 좋은 말은 감정의 벽을 허물어서 타인을 따뜻한 이웃으로 사귀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말이 성실하여 허망이 없을 때 참다운 수행자”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종덕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계가 있으면 곧 지혜가 있고 지혜가 있으면 곧 계가 있다. 계는 능히 지혜를 깨끗하게 하고 지혜는 능히 계를 깨끗이 한다. 종덕이여, 그것은 마치 사람이 손을 씻을 때 좌우가 서로 맞추어 왼손이 오른손을 깨끗이 해주고 오른손이 왼손을 깨끗이 해주는 것처럼 이 계와 지혜도 또한 그와 같아서 지혜가 있으면 계가 있고 계가 있으면 지혜가 있다. 계는 출가해여 청정한 것을 말하고, 지혜는 무명을 버리고 삼명(三明)을 얻는 것을 말한다. 바라문이여, 계와 지혜를 구족하면 나는 그를 비구라 이름한다.
흔히 모든 것은 처음에 취한 태도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계기가 있어도 이쪽에서 뻗지 않으면 흘러가 버려서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모든 사건에는 두 개의 손잡이가 이씩 마련이다. 잡아서 상해를 입는 쪽의 손잡이를 택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왕의 잘못된 만남을 한탄함으로써 스스로의 불행을 더욱 크게 하고 하는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일이 있다. 한탄을 하게 되면 그 한탄은 끝이 없으며 또 슬픔은 연달아 슬픔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그 말이 지성스러워서 허망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눈이 내리고 차가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짜증스러워하면서 “구질구질하게 눈이야!”라고 지껄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 보았자 내리는 눈이 그치지는 않는다. “아! 겨울에 어울리는 근사한 눈이로군!”이라고 말했다 해서 주위에서 언짢아 할 사람은 없다. 역시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눈이 멎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 휠씬 좋다. 아주 사소한 말 같지만 그것이 기쁨의 동기가 되어 몸에는 다소 훈기가 돌 것이며 곁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여유로움을 갖게 될 것이다.
계를 취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해야 한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눈이 내리는 것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보다 훨씬 쉬울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대의 여유로운 미소가 내리는 눈을 그치게 할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는 그것이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의 정다운 말로 듣는 이의 슬픔과 고뇌는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마음으로부터의 정다움을 나누며 서로에게 귀한 벗이 괼 것이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가장 좋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힘주어 하는 것이 비구가 할 일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계를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의 적으로 삼지 않고, 자신을 위하듯이 남에게 하는 것이다.
자기의 내면으로 향하는 데는 두 가지 갖추어야 할 요소가 있다. 한가지는 스스로에게 들려 주는 말소리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올바로 들을 수 있는 귀이다.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는 부드러운 마음을 갖고서 부동처에 머무는 것이 계라면 어둠을 멸하여 큰 법의 광명을 내고 시기가 없는 것을 지혜라고 한다.
지혜는 정근하고 전념하여 잊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 첫째는 관심을 갖는 것이다. 관심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관심을 그다지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관심은 남을 돕는 것도 아니다. 관심이 없는 것은 말이 없고 아무런 행동도 나타나지 않는 단절의 상태를 의미한다. 개인 생활에서는 무관심이 오히려 문화인의 예의처럼 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이 집집마다 담장을 높이고 철조망을 두겹 세겹 더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단절이 날마다 신문 사회면에 실리는 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도 단절이 얼마나 비정한 일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서로 타인처럼 무관심하게 등을 돌리고 산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적막하고 무서운 삶을 살아야 할까?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바로 무지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죄악으로 여기지 않듯이 무지도 역시 죄악으로 여기지를 않는다. 무지가 남을 해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우리 모두를 고집무원의 고독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배타적이고 편견적인 독선에 빠지게 한다. 그것은 결국 인간 세계를 슬프게 하고 삶의 의미를 없애 버리고 만다.
인간 사회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미래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것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기적을 낳는다. 또한 인간을 거듭 살아나게 한다. 정근하고 전념하여 잊지 않는 관심은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안정하는 것이다.
봄이 되면 새로운 만남이 또 시작될 것이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돋듯이 생명이 있는 한 언제나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새로운 변화는 새로운 관심에 의해 생기며, 새로운 변화는 소중하고 가치있는 모습을 만들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