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굵어지고 어느 틈에 자욱한 비안개가 점령군처럼 계곡 안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급류를 이룬 물줄기가 찌렁찌렁 울리며 사자의 포효소리처럼 계곡을 호령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거친 빗줄기가 내 온몸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바위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는 내 발 아래 까지 어느 틈엔가 계곡 물이 불어나 있었다. 무섬증이 와락 스쳐 주변을 둘러보니 나 혼자뿐이다. 잠시 동안의 공포와 외로움을 통과의례처럼 겪고 나니 이윽고 무언가 모를 상쾌한 전율이 온몸을 관통해왔다.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천진난만한 본성이 내 안에서 눈을 뜨는 것일까. 그 동안 스스로 만들어놓은 온갖 금기와 편견과 아집의 틀이 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얼마 전 북한산에서 만났던 빗줄기의 서늘한 감촉과 계곡 물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몇 년간의 외국 생활을 경험하면서 내가 그리도 간절히 그리워했던 것은 이 땅의 산과 들과 산사였다.
내가 잠시 나가 머문 땅은 영국이었는데 그 곳은 전 국토가 그야말로 공원 같은 푸른 초원의 구릉지대였다. 도시나 전원 할 것 없이 끝없이 펼쳐진 푸른 잔디와 꽃과 나무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산다운 산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 얼마간은 그 곳의 아지자기한 풍광과 정취를 즐기느라 잠시 잊고 지낼 수 있었으나, 몇 개월이 지나자 그만 우리 산과 들과 사찰의 정취가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자연조건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정체성은 또 어떤가. 그러나 아무리 좋은 우리 것도 가까이 있을 때는 좋은 줄 모르는가 보다.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바라보니 비로소 우리 것의 소중함과 정체성이 뚜렷이 보였다.
한국의 산은 미국의 로키 산맥이나 유럽의 알프스 산맥처럼 깊숙한 협곡과 칼날 같은 바위로 우뚝 서서 사람을 위압하며 오는 이의 발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봉우리가 둥글고 산줄기는 멀리 남북으로 중첩하지만 둥근 산 앞뒤에 마을이 자리하고 산 속의 길 끝에는 어김없이 산사가 깃들어 있다.
산과 절은 내게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이다. 절과의 인연은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 이끌려 멋모르고 드나들던 추억도 있지만, 젊은 시절 혹독하게 바쁘고 숨가쁜 시절을 통과하면서 휴식차 읽었던 책을 통해서였다.
최순우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그려낸 한낮의 부석사 정경묘사를 감상해 보라.
“소백산 기슭의 한 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난 이 글을 읽는 순간 통증처럼 몰려오는 어떤 울림을 느꼈다. 길고 아스라이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 가는 새벽녘의 범종소리의 공명음이 아련히 들려오는 듯 했다. 한적하고 쓸쓸한 한낮의 부석사 정경이 그린 듯 눈에 잡혀오고 그 속에 깃든 나그네의 외로운 심사가 내 가슴 한 켠에 긴 그림자로 남았다.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뻐근한 아픔이 일어왔다. 방향도 모른 채 바쁘게만 살아온 생활의 신산함과 누추함이 어느 순간 나로부터 멀어져 가고, 내가 모르던 고즈넉하고 쓸쓸한 산사의 고요가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이후 나는 사찰문화와 관련된 책들을 섭렵해나갔다. 수많은 책들이 한결같이 다루고 있는 문화재의 거의 전부가 불교문화유산이라는 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과 미의식 전반에 걸쳐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베어버린 불교적인 생각과 심성, 천년세월의 면면한 전통 속에 핏속으로 유전되어온 우리 정신사의 중요한 축임을 깨달았다.
불교를 모르고 어찌 우리 정신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불교적 미의식의 원형을 빼놓고 어찌 전통의 미를 운운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적 자연과 불교적 사상이 그 품안에서 길러낸 한국인의 심성은 바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불교에 대한 관심은 사찰의 아름다움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지만,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불교야말로 바로 우리 정신의 원형이라는 정체성의 문제로 인식되었고, 그 곳에서도 <해인지>를 구독했다. 이국생활의 외로움이 겹쳐 불교에 대한 관심은 점점 커져갔고 결국 귀국 후 해인사 수련회 참가로 이어졌다. 해인사 수련회는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실참실구實參實究의 현장이었다. 수련회는 나의 많은 것을 변화시켜 주었다.
외형적 호기심이나 책 속의 죽은 지식에서 벗어나 참나를 찾기 위한 실제적인 생활수행으로 방향을 잡아 주었다. 올 여름 나는 아만심과 집착심을 줄이는 데 수행의 목표를 두고 있다. 지금 읽고 있는 《금강경》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이며 환상이며 물거품이며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어다.
비유로 이루어진 더없이 아름다운 한 편의 시詩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비유 속에는 생사를 꿰뚫는 진리가 관통하고 있어 가슴이 섬뜩해진다. 집착하지 말라는 날카로운 메시지다.
언뜻 보면 인간사 모든 것이 허망한 것으로 보이지만 다시 음미해보면 모든 번뇌와 업장의 원인인 집착을 여의어 대자유를 얻으라는 심오한 속뜻이 함축되어있다. 겉으로 보면 허무적인 냄새가 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자명한 해탈의 길, 부처의 길이 보인다.
불교에 대한 나의 편견과 오류를 끊임없이 정정해 가는 것! 아마도 올 여름 나의 ‘여름나기’는 바로 이 《금강경》과의 한판 싸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