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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과 미륵신앙 - 17세기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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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엮는 한국불교사 - 정석종 1987년 04월 62호
조선왕조의 주자학이 왕조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왕조를 유교로 획일화된 사회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같은 사실은 왕권의 사상적 지주로서 주자학을 배타적으로 수용하고 옹호하던 조선 전기의 유자(儒子)들 조차도 산간의 사찰에 향화를 올리고 있음을 소수서원(紹修書院) 등록에서 개탄하고 있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엄격한 유교적 규범이 양반사회에서 요구되지만 양반들은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을 칭도하면서도 내면적인 공허함을 불교 등으로 메워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일반 하층 민중이 의지했던 것은 오로지 불교였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사월 초파일 날에 파루(통금 시간)가없던 사실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正祖日省錄). 물론 도교나 민간신앙 등도 일반 민중 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불교가 보다 보편화된 신앙 형태였다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왕조는 임진·병자 양란을 겪으면서 사회적인 여건이 크게 변모된다. 이미 봉건 왕조의 자기 모순이 격화되던 시기에 두 차례나 이민족의 침입을 겪으면서 더욱 그 모순이 확대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사회 전반의 변화는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가장 두드러졌던 사회적 모순이 계급간의 갈등이었다. 인조(仁租) 년간에 남원을 중심으로 삼남 일원에 급속히 뿌리를 내린 천민의 자위 비밀결사였던 살인계(殺人契)가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다.
양반네들은 실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왜총(倭銃)으로 무장을 해야 했으며 살인계원인 노비에게 양반이 피살당했을 경우에도 보복이 두려워 관에 고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남원부사 송 상언(宋象仁)은 살인계원 10여인을 잡아다 죽였는데, 도당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선조들 묘를 파헤쳤으며, 구례현에서도 살인계원들이 인가에 들어쳐 살인한 일로 다시 20여인이 사로잡혔다.
이 살인계의 확산을 뿌리 뽑고자 송 상인이 전라감사에 임명되고 이로부터 옥에는 계원들이 가득차기에 이르렀으며 도당들은 다시 이들을 구하고자 수령을 해치고 파옥하려는 지경에까지 갔다. 부득이 그 핵심 계원들을 효시하도록 건의하고 있었으니, 인조7, 8년(1629, 30) 의 일이다.
이같은 하층 천민의 비밀 결사는 그 뒤에도 계속되거니와 1684년 숙종 10년에 있던 살주계(殺主契)나 검계(劒契)의 움직임이 그 보기이다. 그들은 향도계(香徒契)가 중심이 되는데, 그들의 강령을 보면 첫째, 양반을 살육할 것 둘째, 양반의 부녀를 겁탈할 것 세째, 그들의 재물을 탈취할 것 등이다.
이들 계원은 한성 내의 노비가 중심을 이루며, 그 활동은 양반층으로부터의 핍박에 대한 반작용이 주된 내용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당시의 양반층이 노비들에게 어떤 처우를 했기에 그들이 이같은 극단의 행위를 할 밖에 없었나 하는 것을, 쇄미록(▩尾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녁에 허 찬(許鑽) 이 한산에서 비(婢)를 잡아들여 나로 하여금 그 비를 때리게 하므로 곧 결박하여 거꾸로 매달고 족장을 5, 60번 친 뒤, 입고 있던 치마와 속곳을 벗겼다. 전일에 찬(鑽) 이 친히 나아갔으나 전혀 대접치 않고 신공 역시 바치지 아니하고 피하여 나타나지도 않으니, 이를 분통히 여겨, 한산 군수에게 청해서 그 접주인(接主人)을 가둔 다음에야 래현하였다.’ (丙申日錄 丙申 12월 15일 條)
한산지방의 외거노비에게 신공을 받기 위해서 간 노비주가 한산군수의 도움을 받아 여종을 래현시키고 거꾸로 매달아 옷을 벗기고 때리는 혹독한 형벌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이 짧은 글만으로도 17세기 초의 노비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저항이 어떤 연유로 말미암은 것이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겠다.
그러나 사회 전반의 개혁이 없이 즉 새로운 사회의 도래가 없이, 살인계니 살주계니 검계니 하는 즉자적인 대응만으로는 죽이고 죽는 희생만이 반복될 뿐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자각에 이르는 때가 오게 되었으며, 바로 여기에 미륵 신앙이 수용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어미가 자식을 잡아먹는 혹심한 재해가 미륵신앙을 보다쉽게 수용케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현종 12년에 충청감사 이 홍연과 경상감사 민 저중이 치계(馳啓) 한 내용을 보자.
‘연산(連山)의 사비인 순례(順禮)는 깊은 골짜기에 사는데, 다섯 살 난 딸과 세 살 난 아들을 잡아먹었읍니다. 동리 사람들이 말을 듣고 찾아가 진위를 물으니, 하도 배가 고파, 병으로 죽은 애들을 삶아먹긴 했지만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합니다. 소위 순례는 보기가 흉참하고 면목은 살가죽만 남았으며 머리는 산발되어 사람 모습이 아니고마치 귀신의 모습이니 필시 실성한 사람입니다.’ (현종개수실록 卷23).
‘금산군의 굶주린 사람이 죽소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 지어미는 그 옆에서 죽을 다 먹은 다음에야 지아비를 보고 통곡하고 있읍니다.’ (현종개수실록 卷24).
이것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속설이 근거가 있는 이야기임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당시의 극심한 재해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더우기 숙종12년의 흉년이 현종 때의 그것보다 심하다 하였으니, 그같은 재해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미륵신앙이 수용되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미륵신앙의 신앙자들은 숙종14년(1688년) 승려 여환(呂還)을 중심으로 양주(楊洲) 에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기존의 세계가 변혁되어 새로운 이상사회가 도래할 것을 열렬히 희망하고 있었으며 극심한 양반의 횡포와 자연적인 재해는 이상사회가 도래하기 바로 전 단계의 정표라고 믿고 있었다. 이상사회를 현세에 구현시켜 줄 불교적 메시아인 미륵의 출현이 임박한 사실은 큰 비가 오는 징험 속에서 알 수 있고, 큰 비는 계속 이어져 인간세가 혼란하게 되면 그때에 미륵이 출현하여 고통없는 새로운 이상사회를 실현시켜 준다고 믿고 있었다.
이 미륵신앙자들은 그들의 역할이 다가올 새로운 사회의 정표를 모여서 보고 지키는 것이며 미륵이 출현하리라고 예고하는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결단과 변혁의 순간을 향한 의례수단으로 이 사악한 세계로부터 탈피하여 빛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술, 담배, 여자 등을 삼가며 자기를 정화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들은 양주를 중심으로 경기· 황해 · 강원까지도 활동 범위로 하고 있었으며 ‘석가 대(代)는 진(盡)하고 미륵 대(代)가 오며, 세간(世間)에도 역시 다른 대(代)가 온다’ 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여환(25세)은 칠성님과 같은 무속의 요소와 수중노인(水中老人시)과 같은 도가적 요소, 그리고 미륵삼존과 같은 불교적 요소를 함께 종합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불교적 요소를 우위에 서는 사상 내용으로 삼아 신도들을 이끌고 있음을 그의 공초(供招) 기록(죄인 심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금화 천불산에 미륵이 있읍니다. 나의 아버지는 성재(聖齊)를 세번 설(設)하고 나를 낳았으므로 나는 천불산에 가있었는데, 칠성주(七星主)가 내림히여 누룩(麯子) 세 개를 주었읍니다. 곡(麯)과 국(國)은 음이 같기에 내가 산의 최고봉에 올라가 보니 구름같으나 구름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사우(四隅)를 옹호하고 서기가 북방으로부터 왔읍니다. 삼일째에 사방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 대포소리와 같았읍니다. 그리고 이름하여 말하기를 나는 사주(四州)의 엄금이라 하였으며 ‘나를 벌통 가운데 세우라, 이것은 대국(大國)의 법이니라’ 하였읍니다. 노승·노인이 수중(水中)에 앉아서로 말하기를 해제순왕이 어질고 국왕이 숭불하니 반드시 상위(相位) 하리라 하였읍니다. 미륵삼존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년공부하라’ 하거늘 내가 삼년은 너무 길다고 하니 삼존께서는‘그렇다면 세달이 가하다’고 하기에 천불산에 가서 세달 있다가 바로 황회(黃繪)와 같이 은률(殷栗) 에 갔읍니다.”
여환은 칠성님이 나라를 준다고 약속하였음을 믿고 있으며, 별통 가운데 나(四州의 임금)를 세우라는 이야기 속에서, 그 새로운 나라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벌들은 평등하게 노동하고 먹이가 없을 때에는 한날 한시에 모두 같이 죽기 때문이다.
이같은 이상국가를 건설함에는 수중노인이 그것을 예언하고 있으며, 그 방법은 용녀부인(龍女夫人) 인 원향(元香 :19세)을 얻어 그로부터 아들을 낳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은률로 가서 용녀인 원향을 이내로 맞는 것이다. 그녀가 양주로 올 때 정과 바라를 가지고 온 것을 보면 그녀는 무녀(巫女) 임이 분명하다.
또그는 “미륵이 다시 말하기를 요즘엔 중은 부처를 공경치 않고 오히려 민간에서 부처를 공경하니 이같은 때에는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주장하게 되는데, 풍우(風雨)가 순조롭지 못하고 오곡이 열매맺지 못하여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고 눈이 손만큼 큰 미륵존불이 북방으로부터 와서 금수복(金繡服)을 입고 손에 큰 정을 쥐고 남북으로 오르내린다”고도 하였다. 이는 당시의 불교계가 민중의 요구에는 눈을 감고 왕실불교(王室佛敎) 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부처를 공경한다고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주장하게 되는 때에 맞추기 위해, 여환은 용녀부인 원향을 아내로 맞는 것이다. 그들은 당시에 큰 흉년이 들고 있었으므로 미륵이 출현할 시기가 임박했다고 믿었다. 그것은 큰 비가 와서 도성이 경탕(傾湯) 할 때인데, 그때 그들이 도성으로 입성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7월 13일에 양주의 백성들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양주대전리에 모여 관아를 습격하고 군기는 탈취해서 한성으로 쳐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환이나 황회(55세) 등의 주모급 인사들은 폭력적 방법에 호소하려는 군중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이를 저지하고 주모자 10여인만이 용녀부인을 대동하고 상경하여 큰 비가 올 때 궁궐을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큰 비가 오지 않아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백악산에 올라가기도하고 양주로 되돌아감으로써 허무하게 이 사건은 끝나고 만다.
그러나 정 원태(鄭元泰 : 23세, 천인)의 공초에도 있듯이 “황회가 말하길 이번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10월 5일이 길하니 이날에 다시 거사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경오년이 대길하며 여환도 역시 8년 공부하였으니 자연 성사된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이 미륵신앙자들의 움직임이 이후에도 계속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오로지 시기 선택의 잘못으로 거사가 실패했다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경우와 함께 이 미륵신앙자들의 움직임이 앞의 살인계, 검계, 살주계의 경우와는 달리 현실적인 실천이 결여되고 있어서 그들 하층 민중에게는 계속 불만으로 작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상사회의 실현은 미륵의 출현을 예비하는 힘에 의한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나아갔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미륵신앙을 신봉하는 산간의 승려들이 극적(劇賊) 및 한성 내의 서류(庶類)들과 연계를 맺어 왕권을 전복하려는 움직임이 숙종23년(1697년)부터 나타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산간의 승려들이란 피역(避投)하여 산에 들어간 상, 천민의 자제들이 대부분이므로 그들이 지향하는 평등한 사회란 미륵이 출현하는 불국토임이 분명하다. 숙종 재위 내내 사로잡히지 않던 광대도적 장 길산(張吉山)부대의 활동이 사회 전면으로 나타나고 있거니와, 그들은, 구월산에서 함경북도 서수라 (西水羅)나 벽강 해천동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 후마상(馬商)을 가탁한 기병 5천과 보병 1천을 거느리는 큰 세력으로 불어났으며, 평안도 운산에서 관군의 군기고를 약탈하는 등의 활동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극적(劇賊)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미륵신앙자들이 검계나 살주계의 실천 행동을 체득한 활동이라고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