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없는 겨울은 드문 일일 터이나 지난해 지리산은 강설이 유난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일백오십 년도 더 전인 1830년, 초의스님은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고 있었다. -그 곳은 최고의 찻물로 치는 유천乳泉이 흐르는 곳으로 이름난 곳인데, 십수년 전에 실제로 쌀뜨물같이 희고도 향기로운 물이 일 주일에 걸쳐 뿜어져 나와 경이로움을 자아냈던 적이 있었다.- 두렷한 산세로 중춘中春인데도 눈발이 새삼스러웠던지, 스님은 그 곳에서 병중의 몸을 추슬러 “눈내리는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다신전茶神傳」을 “삼가 썼다.” 이와 함께 다경茶經으로 떠받들리는 「동다송東茶頌」을 짓기 일곱 해 전의 일이었다.
우리나라차의 역사는 신라경덕왕때인 828년에 김대렴이 중국에서 차씨를 가지고 온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문헌으로 인정받는 공식 사실이나, 실제로는 훨씬 전부터 차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음이 여러 문헌을 통해 나타나 있다. 신라때의 화랑, 고려 때의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선승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차 문화는 조선조에 이르러 유교에 의해 차의 자리는 술과 정한수에 의해 빼앗기고, 산사의 선승사이에서 근근히 맥을 이어오다가 조선조 말엽의 초의스님에 의해 일대 중흥기를 맞게 된다.
단숨한 음용 수단이 아니라, 차도의 경지에까지 이른 차를 찬양하는 시는 허다하 남아있지만, 그가 지은「동다송」과 「다신전」은 차에 대한 본격 저술서로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사문인 초의스님의 치에 대한 생각은, 나옹선사, 함허 득통, 휴정 대사가 차도를 행하되 선을 본지로 삼았다면,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차도를 행하되, 차선일여, 곧 차와 선을 둘로 보지 않음으로써 큰차이를 이룬다.
초의스님은 차의 큰원을 알가, 곧 “묘원”으로 풀었다. 베다교에서의 알가란 천신께 제사를 올리는 숭고한 제물을 뜻했으니, 제사를 올리는 일에서 만사가 비로소 시작되었던 만큼 “시원”이나 “원천”의 뜻도 된다. 불교의 뜻으로는 “무착바라밀”로 풀 수 있으니, 차를 마시는 마음은 어떤 욕심도 경계에도 사로잡힘이 없는 본래 면목의 밝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평생 하는 공부인데 낮잠 좀 잔들 어떠리… 봄바람 맞으며 글 쓰고 차를 달이니… 지공-중국의 고승-의 실상賣相을 믿고 있는 터이라/시끄러우나 고요하나 모두 선禪임을 알았네” 하고 읊은 초의스님은 차로써 묘용의 경지에 이르렀던 분이었다
이즈음에 이르러 요처 아닌 정처가 있겠는가. 참답게 차 한 잔 마실 마음의 여유가 있기는 한가. 오월의 문화 인물로 초의스님이 지정된 일로 그것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으로 삼아야 할 일은 아닌가. 보성군 회천면 양풍부락의 차밭에 내려가 있는 선혜스님을 만나러 가면서 품어 보는 생각이었다. 다성茶聖으로 떠받들리는 초의스님을 몸으로 숭양하고, 그 스님 알게 해 주신, 현대 차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효당 최범술 스님의 맥을 오늘까지 지켜 오면서, 또한 내일로 전해지게 하려는 선혜스님은 이 곳에서 일 년 가운데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곡우-사월 이십일-는 이직 찻잎의 기운이 영글지 않을 때이며, 입하인 오월 오일 전후 보름 동안이 최상의 찻잎을 따는 시기라고 초의스님이 밝힌 바 있었다.
보성은 이 나라 전체 차 생산량의 구할 이상을 감당하는 곳으로, 배수가 좋은 자갈 섞인 모래흙 땅에, 연평균 기온이 섭씨 십오도, 연간 강수량이 일천오백 밀리미터 이상인 데다가, 봄부터 한여름까지 아침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지형 조건 따위를 두루 갖춘 곳이다. 보성에서 율포를 향해 가다가 봇재를 넘으니 흙냄새와 함께 땅의 기운이 따뜻이 느껴지고, 경사가 급한 산비탈로 누에의 행렬과도 같은 푸른차밭이 펼쳐졌다. 땅에 나지막히 날던 제비가 사람 무서운 줄도 모르고 가까이까지 내려앉는 곳이었다.
스님에게 치를 따고 닦고 갈무리하는 법을 제대로 익히려고, 대전에서 원정 온 다도 연구회 모임의 강의를 막 끝냈는지, 스님의 얼굴은 붉고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첫 일성에 허를 찔린다.
“이즈음이 내게는 망중한입니다.”
79년부터 지금껏, 찻잎 딸 때뿐만이 아니라 차꽃이 필 때도 오고, 전지하기, 시비하기 등으로 한 해에 스무번 남짓 서울과 이 곳을 오르내리는 셈인데도, 스스로 자청한 길이니 일이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밤 두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 수 없도록 일구덩이에 빠져 살지만, 그에게서 햇차를 구하려 내방하는 스님들과의 정화나, 먼길 마다 않고 가르침을 찾아오는 차인들, 그리고 차를 따는 인근 동네 아낙들과 나누는 푸짐한 인심은 속진을 떨치게 하고, 제 일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해 줄 터였다.
인사동에 있는 불교전통문화원 원장인 그가 차도를 포함한 불교 문화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칠십년대 후반부터였다. 봉은사에서 청년회법사로 소임을 살던 그 때 사중에서는 뜻을 제대로 펴기가 버거워 절 앞에 따로 공간을 마련했다. 석정원 차회를 통한 차도 강좌를 중심으로, 참선, 경학, 꽃꽂이, 사경, 불교 음악 감상, 한국의 정원과 건축 등 생활 속에서 불교 문화를 꽃 피우게 하려는 다양한 문화 강좌를 개설하여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십 년 뒤에 불교전통문화원이란 문패를 달고 인사동으로 장소를 옮겨 온 뒤로는, 한문고전, 요가, 참선, 사찰음식, 민화, 승무 등의 강의가 민족문화추진회 위원, 인간문화재 또는 전수자 등의 수준급강사가 모셔지는 가운데 계속되었다. 이즈음들어 대학등에서도 불교문화에 대한 진지하고도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영역에 머물 뿐으로, 실제 생활과는 큰 괴리가 있는것일 터였다. 빅물관에 우리의 오천 년 역사가 잘 보관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박제된 문화일 따름이 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문화란, 사람들의 생활속에서 의식주 속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라야했다.
그러는 동안 봉은사에서 회보지 형식이던 「봉은」지를 거의 혼자 힘으로 백 쪽분량의 잡지꼴로 격상시킨 다음 정기 독자수효가 삼천에 아르게 했는가 하면, 봉은사의 역경원에서 연수생으로서 경전 공부와 사서삼경, 장자, 사마천의 사기 같은 것도 읽어 냈다. 차도에 사상성을 세우게 되는 보조작업 같은 것일 터였다.
고려대, 숙명여대에서 지도법사 노릇을 하고, 절에서 가까운 한양대로는 자주 법문을 다니곤 했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불교는 기존신도들에 말고는 지나치게 소극적이어서, 개척적인 전법 자세가 크게 아쉽다고 판단되어 스스로 펼쳐 본 전법 활동인 셈이었다.
견성 성불의 길로 나아가려 하되, 참선이나 간경, 기도나 염불 따위를 사문의 본령으로 한정지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실생활 속의 생명력 있는 불교 문화의 전승을 꾀하려는 그가 못마땅할 수도 있을터였다. 그러나 이 일 또한 ‘부차님이 크게 상주실 일’이라 믿으므로 소신을 굽혀 본적이 없다. 학생이나 일반단체를 대상으로 펼쳐 온 차도 강좌, 그리고 지면을 통해 “다반여화” , “편지로 쓰는 차도 강좌” 등 몇 권의 책으로 엮을 만한 분량의 글을 발표한 그의 이력도 그러하지만, 문화원에서 의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차도 강좌에서도 그의 뜻이 짐작되는 바이다.
91년도에 서울에서 법륜왕사를 창건하여 현재 주지이기도 하지만, 팔백쯤되는 신도들은 그의 얼굴보기가 쉽지 않다. 그는 오전 중으로 절일을 끝내고, 오후는 거의 문화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현재 초급반에서 연구반의 고급 과정에 걸쳐지는 차도반은 열세 개쯤 되는데, 그가 특강형식이 아닌 고정으로 강의하는 반만 다섯이 넘는다. 문화원의 차도과정을 수료하기는 상당히 까다롭다. 초급과정만 해도 세 해쯤 걸린다. 홀로서기를 라려면 십 년 세월은 잡아야 한다고 수강생들에 곧잘 이른다.
그의 차 생활은 해안사 강원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무렵 강원학인들의 교양 함양을 위해 생겨 난 특별 활동부 가운데 원예반에 들어 난을 기른 적이 있었다. 꽃을 홀로 보기 이까워 주위 도반들을 청하였으나 홀하게 여겨 쉬 응해 주지 않자, 된 것도 철십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런 형편이니 차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말할 것도 없고, 학계의 연구나 절에서의 행다도 변변치 않았던만큼, 옳은 참고 문헌 하나없이 오로지 효당스님에게서 구전으로 몸으로 일러받을 뿐이었다. 공부가 짧게는 이삼 일씩 , 그나마 그를 비롯한 김규현, 여연, 의정스님 등의 동접들을 위해 온전히 마련될 수도 없는 나날이었고, 절일이나 농사일도 겸해 거들면서, 출타하시면 허행도 하는 쪼가리 공부였다. 그러나 효당스님이 서울로 처소를 옳겨 온 뒤로는 수시로 찾아가 뵈는 동안, 자신 또한 남에게 차도를 가르치면서 먼 뒷날에 채득하게 된, “차도란 가르쳐 받을 바가 아니라, 스스로 터득해 나가야 할 바”를 깨닫게 되었을 터였다. 효당스님의 가르치기는 제다법뿐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용해된 말씀을 무언중에 들려 주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략나 그에게는 뜻깊은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효당스님은 그로 하여금 한국 차도의 원류를 이어가게 함과 함께, 단순 역사관 아닌, 의미와 근원을 궁구하게 하는 사상관으로 차도를 관하게 한 바탕을 마련해 주신 분이었다. 이를테면, 그가 뒷날에, 차례에서 다구를 배열하는 방식은 절에서 전통 예절로 전래되어 오는 식당 작법인 법공양, 곧 발우공양의 영향을 받은 것일 것으로 정리하게 되는 틀을 시사받게 해 준 분이었다.
그는 그 동안 여섯 번에 걸쳐 헌공차례와 일상 점다點茶 차례를 재현해 보였다. 사원 차례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 보고서인 셈이었다.
그렇게 정리된 결과물이 있기까지, 사대 공양물이 육대 공양물로 바뀌는 불교 역사의 변천이 따져져야 했고, 지역과 교파에 따라 달라지는 의식이 살펴져야했고, 신라의 보천과 효명 태자의 차공양이 언급된 「삼국유사」도, 사분율장, 선원청규, 석문의범 등의 의전이 참조되었다.
헌공주가 태자였던만큼 다예의 규모로 될 수밖에 없었을 터이나 영산회상과 나비춤이 곁들여졌다.
발우 펴는 양식과 오방으로 배열되는 찻종과의 관계도 따져졌다. 사원 차례에 대한 그 동안의 연구 결과는 내년쯤 「사원 치문화」란 이름의 책으로 엮어질 듯하다. 그가 발표한 차례법은 최초이기는 하되 자신이 창작한 의외의 것은 아니다. 그의 관계 문헌 찾기에 대한 천착은 남다른 바가 있거니와, 차에 관한 문헌이면 중국과 일본 길도 서슴지 않았고. 된 것이고 덜된 것이고 일단 구해 놓고 보는 식이라 했다. 팔십년대 초에「다선전」에 짧게 언급된 「만보전서」를 규장각 도서더미에서 「경당 정보 만보전서敬堂訂補萬寶全書」를 찾음으로써 되살려 놓은 것도 그의 노고의 결과였다.
십여 년 전 사원 음식 가운데 차 분야의 인간문화재 지정 예비 과정인 실사를 받은적이 있었으나 이날껏 성섬을 다해 자신이 궁구해 온 바이니 지정 여부가 그의 관심을 크게 끌 일은 아닌 듯해 보인다.
밤늦게 보성으로 길을 되짚어 나왔다. 앞뒤 끊긴 한자락 꿈처럼, 산자락에서 보라색 꽃을 피우고 서 있던 참오동나무도 보이지 않았다 봇재를 넘어오자니, 바다가 들어 쉬었던 숨을 그 재 너머로 토해 놓은 듯, 길은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로 가득했다. 숨을 쉬고 있는 땅, 차가 자라고 있는 땅이었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