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麗末)과 선초(鮮初)의 불교적 상황과 전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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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9년 02월 84호
지금까지 이글에서는, 주로 해인사를 중심으로 하여 화엄종 계통의 중요한 인물과 그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사화사와 함께 인물사를 살펴보는 데 그 역점을 두어왔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고려말과 조선초의 불교사는 불교사 전체를 보더라도 그 난맥상을 가장 크게 드러내고 있는 비운의 역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많고 더욱 자세하게 밝혀져야 할 역사적 사실도 많으며, 그런 까닭에서인지 최근에 가장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사실 한 왕조가 바뀔 때에는 필연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함께 겪을 수밖에 없다. 특히 한 왕조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던 종교를 대신하녀 새로운 종교가 그 역할을 하는 전환의 시기에는 거기에 따른 여러 가지 극심한 변화가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거기서 비롯하는 종교의 내적인 갈등은 말로나 글로는 다 표현키 힘들 정도로 컸다. 게다가 급속한 변화가 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불교의 상황을 제한된 지면에서 자세하게 밝힐 수는 없다.
그러나 대강의 큰 변화, 특히 해인사를 중심으로 하는 사상의 변화를 알아보는 것은 불교사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하다. 특히 역사의 사실이 거의 쓰여지지 않았거나 쓰여질 수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인 모든 요건들을 감안할 때, 하루아침에 된서리를 맞은 불교계의 저항이나 노력들은 숭유억불에 밀려난 채 정당한 언론(어로)을 잃고 역사 속에서 그 자취가 삭제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시 고려불교사의 전반적이 사상의 흐름을 정리하고 조선 초의 불교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고려 초의 불교에서는 이미 살펴보았듯이 의상대사가 중심이 되어 내려왔던 화엄종과, 원효대사의 학풍과 진표율사의 수행과 참회법을 글 규범으로 삼은 유가종과, 중국 혜능스님의 남종선의 전통을 이어온 조계종 등이 가장 중요한 종파를 이루었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화엄종과 유가종은 2대 교종으로서 문종시를 전후하여 전성시대를 풍미했는데, 이는 화엄종과 유가종이 고려초의 중앙집권적 성격과 일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뒤 대각국사에 의해서, 선종 중 비교적 교리를 중시했던 법안종을 바탕으로 천태종이 성립되었고, 이때 문벌귀족이며 왕가의 외척이었던 인주 이씨와 유가종의 유착에서 비롯된 이자겸의 난 같은 것은 이제까지의 전성기를 차지했던 교종중심에서 선종 체제로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이후 12세기 중반기인 인종(仁宗) 때부터 학일(學一), 탄연(桓然) 등 선종 계열의 승려들이 왕사나 국사로 책봉되기 시작하였고, 정중부에 의하여 시도된 무신의 난은 새로운 불교계의 개편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특히 최씨 무신정권은 선종이었던 수선사(修輝社)를 중심으로 한 조계종을 지원하였고 또한 이 무선정권이 장기화함에 따라서 화엄종과 유가종은 고려 후기사회에서 그 세력이 미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와 반대로 조계종과 천태종이 불교계를 새로이 주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소외되었던 개경 중심의 문신과 화엄종 계통의 승려들이 무신정권에 대하여 심한 저항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문벌귀족이 몰락함과 더불어 불교는 차츰 유학, 도교들과 같은 다른 사상과 좀더 밀착되고 혼합되는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특히 많은 귀족 문신의 자제들이 입산함으로써 승려 가운데 유교적 교양이나 지식을 갖춘 이들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이가도 하였다. 그리고 무신정권 이후 두드러진 또 하나의 상황으로는 사회적인 변에서 볼 때 불교계의 구심점이 개경에서 지방으로 옮겨진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기간에는 몽고와의 싸움으로 중부 이북의 사원과 개경사원의 대부분이 불에 타는 타격을 받았으며, 피해가 적었던 남부 지방의 지방 사찰이었던 송광사와 백련사 등에서 결사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는데, 이는 마치 신라 말과 고려 초의 지방 분산적인 변방의 존재 형태를 재현함과 같은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따라서 화엄종과 같은 교종의 승려들은 사회적 출신 성분이 주로 문신 귀족 출신인데 비하여 선종 승려들의 출신 성분은 좀 더 낮은 계급의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것으로부터 불교계도 귀족 중심에서 민중 중심적인 경향으로 전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무신정권, 몽고의 침략과 같은 이러한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서 불교사상도 그 궤를 같이 하여 변화하였는데, 이는 토착적인 신비사조의 부활로 나타난다. 신비적이며 토속적인 것의 부활은 곧 민중 중심, 지방 중심과 함께 발맞추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경향은 일반적으로 지식인이 교리 중심인 데 비하여 비 지식층인 일반 민중들은 교리보다는 신비적인 경향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음에서 비롯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이새대의 지식층이 쓴 저술에서도 나타나는데, 백련결사의 제 4세인 천책(天頙)이 저술한 해동법화전홍록(海東法華傳弘錄)이란 책에서는 법화경 신앙의 이적을 강조 하였다. 또한 의천에 의해서 신이적이라고 비판되었던 균여의 저술이 다시 간행되었으며, 육조혜능의 전기로서 그의 행적을 신비롭게 윤색하거나 부가하였다고 의천이 비판하였「육조법보단경」이 고승들에게 다시 주목받기도 하였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세속의 저술에서도 나타났는데, 같은 역사서이면서도 12세기에 제작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비하여 13세기후반에 쓰여진 일연스님의 삼국유사가 훨씬 신이적이며 신비적인 요소가 많은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이 시대의 상황으로는 신라 말에 민중과 결합된 결사운동을 하여 그 세력을 약간 펴다가 자취를 감추었던 군소종파인 율종, 신인(神人)종, 소승(小乘)종, 해동(海東)종과 같은 종파들이 신비적인 요소의 부활과 함께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13세기 후반의 불교계는 불교 내부의 혼란과 갈등, 몽고의 압제와 무신정권 등으로 여러 면에서 굴절된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종파간의 분쟁과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그 원인으로는 정치와 사회의 요인도 작용하고 있었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불교계의 구조적인 변화나 교리적인 대립에 있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갈등과 분쟁은 결국, 불교가 민중으로부터 신망을 잃고 국교의 자리를 유교에 내어주는 등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을 위하여, 다음 호에서는 불교 패망의 원인을 여러 측면에서 조명하고 분석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