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열반적정(涅槃寂靜)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특집 - 이효상 1987년 04월 62호
불교의 진리 가운데 가장 근원이 되는 진리의 하나로 삼법인(三法印)을 들 수 있다. 삼법인은 불교적인 관점에서의 생의 인식이고 현실 인식으로서 일종의 불교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삼법인은 대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세 가지를 말하는데, 때로는 여기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더하여 사법인(四法印)이라 하기도 하고 또는 일체개고를 빼고 그 대신 열반적정을 넣어서 삼법인이라 하기도 한다. 이 삼법인은 불교 사상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니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성제(四聖諦)와 같은 가르침은 모두 이 삼법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열반(涅槃, nirvana, nibbana)이라는 말은 “불어서 끈 상태(吹消)”를 뜻하는데, 더러 ‘번뇌의 숲이 없는 상태”라고 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열반은 “삼독(三毒)의 불이 불어 꺼진 상태” 곧 일체의 번뇌가 멸각된 상태를 가리킨다. 불교가 나오기 전에는 열반을 “불사(不死)”라 부르고 있었다. 또 열반은 깨달음의 세계이고 절대 안정의 경지이기 때문에 적정(寂靜) 이라고도 한다. 결국 열반이라는 말과 적정이라는 말은 같은 말인 셈이다.
열반은 “멸(滅)”이라고 번역되는데, 그것은 미혹의 원인인 애욕의 마음이 없어지고 마음(心)의 안주를 얻은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멸”이라는 자가 사용되기 위하여 열반을 미혹의 근본인 육체와 정신을 모두 멸해 버린 회신멸지(灰身滅智)의 경지라고 하는 소승불교의 소극적인 해석도 나오고 있지만 석존께서 열반이라고 여겼던 것은 번뇌망상을 지멸(止滅)하고 지아의 편견을 없앰으로써 얻는 정신적인 안정의 경지이다. 곧, 열반적정은 절대 자유의 경지이다.
석존 이전의 종교인들도 이러한 경지를 열반이라 하였고, 이러한 열반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수정(修定)과 고행(苦行)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수정은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안주시키는 방법으로 행하여졌고, 고행은 육체에 의하여 마음의 평정이 교란되지 않게 하려고 육체의 세력을 꺾는 방법으로 행하여졌다. 그들은 이러한 수행에 의하여 일시적으로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고, 또 그것이 천상계(天上界) 에 태어나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도취적인 경지는 참된 의미에서의 열반이 못 된다. 멸(滅)의 의미를 전환해서 정신적인 절대 적정의 경지로 삼는 것이야말로 불타의 열반관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불교와 불교가 아닌 종교 사이를 구별짓는 제3의 원리로서 열반적정인(印)이 의미를 갖는다.
열반경, 열반상, 열반회와 같은 말에서의 열반은 반열반(槃涅槃 : 완전한 열반, 圓寂) 을 줄인 말이며 이것은 부처님의 입멸 곧 죽음을 뜻한다. 열반에 들어간다 함은 깨달음(행을 얻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의 열반은 본질적인 의미의 열반(번뇌가 없어진 상태)과는 다른 뜻을 갖는다. 열반의 말 뜻에 이와 같은 변화가 생겼고, 이것이 부파 불교에 이르러서는 유여(有餘) 열반과 무여 (無餘) 열반의 두 가지로 나뉘었다.
유여 열반은 부처님이 35세에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어 불타(覺者)가 되고 나서 80세에 꾸시나가라에서 입멸하실 때까지의 45년 동안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일단 모든 번뇌가 단절되기는 하였으되 석존의 육신이 아직 지상에 남아 생존해 있기 때문에 그 육신을 여(餘) 또는 여의(餘依)라 이름하고, 부처님의 세상에 살아 계실 때의 열반은 “여의”로서의 육체가 남아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유여 열반 또는 유여의 열반이라고 한 것이다.
한편 부처님께서 육신을 버리신 후의 열반을 무여 열반(무여의 열반) 이라 하며, 이것이 완전한 열반이라 하여 반열반이라고 한다. 즉 부처님의 죽음을 완전한 열반(圓寂)이라고 하고, 열반이라는 말도 반열반의 약어로서 입멸 곧 죽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것은 열반이 지닌 본래의 뜻은 아니다.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부파 불교의 두 가지 열반에다 다시 두 가지를 보태어 모두 네 가지의 열반을 설하는데, 그 새로운 두 가지는 자성청정(自性淸靜) 열반과 무주처(無住處) 열반이다.
외계에서의 법성진여(法性眞如 : 진리)도, 마음속에서의 심성(心性)도 본래 때가 없이 깨끗하여 이들 법성과 심성이 그대로 열반의 상태에 있다고 함이 자성청정 열반이다. 그리고 생사에 머무르지도 않고 열반에 머무르지도 않는 경지가 무주처 열반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생사윤회를 벗어나려 하거나 보리 열반을 희구하는 일이 없으며, 생사의 미혹이나 열반의 깨달음을 모두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윤회의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 자진하여 윤회의 고통세계로 뛰어들어 고뇌에 싸인 중생을 구제하며, 또 열반의 즐거움에 머물러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과 사를 꺼리지 않으며, 생사가 바로 열반이라하여 생사에도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애자재의 자비행의 경지를 일컬어 무주처 열반이라 한다. 다시말해, 고뇌를 벗어나서 정신적으로 안정된 경지에 이르른 후에도 그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남을 위한 이타행 (利他行)의 실천을 향하여 나아감을 뜻한다.
생사에도 머무르지 않고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는 이 무주처 열반의 사상은, 더 나아가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겸전하여 비로소 열반이 실천된다고 보는 사상에 이르는데 이것은 한층 더 깊이 있는 열반관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실한 의미의 열반은 이러한 무주처 열반이어야 하니, 부처님의 생애도 바로 이 무주처 열반이었다고 한다. 무주처 열반은 고(苦), 낙(觸, 생(生), 사(死)를 초월한 것이며 절대 자유의 경지이다. 이 자유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고요함뿐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이타(利他) 생활까지도 포함한다. 곧, 열반이 갖는 최상의 평화에 이르른 후에도, 그러한 경지가 가져다주는 정신적인 기쁨과 즐거움에 머물러 안주하지 않고 타자를 위하여 자비를 실현하는 이타행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몇몇 서양의 불교학자와 인도 학자들, 그리고 그 수가 적기는 하지만 동양의 학자들 중에도 더러 불교가 제행무상(諸行無常) 또는 일체개고(一切皆苦) 등에서와 같이 인간의 현실이 절대적으로 염세적임을 강조하고 있을 뿐더러 또 그 다음에 나오는 사성제(四聖諦) 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고제(苦諦)를 맨처음에 꼽아 생, 노, 병, 사와 같은 고(苦)를 강조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불교를 다분히 비관적인 염세주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고를 강조함은 출발점에 지나지 않으며 최후에는 정락(淨樂)의 열반에 이르는 것을 그 이상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삼법인이나 사법인에서도 일체의 만물은 잠시도 쉬지않고 변화 유전하고 있음을, 그리고 “바로 이것이다” 라고 확인할 실체(我)가 없다는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는 모두 최후에 열반 적정이라는 이상세계 속으로 수렴되며 훌륭하게 포용되고 있다. 결코 불교의 진리가 아무런 대안이나 해결책 없이 단순히 위협적인 고의 강조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성제(四聖諦) 의 진리에서는 고의 인식으로부터 현실의 고찰이 시작되고 있으나, 사성제 가운데 세째 항목인 멸성제는 고를 멸각시켰을 때 체현되는 열반의 상태를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석존의 교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고 있는데, 하나는 고뇌와 부조화의 성질과 기원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를 여의는 길 곧 최고의 지 (智), 열반에의 길에 관한 것이라고 풀이된다. 고는 욕망과 집착에서 생기고 이 욕망과 집착은 무지와 무자각에서 유래하며 인간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무지한 것처럼 인간 자신의 본성에 관하여서도 무지하며, 이 무지로 말미암아 자기 아닌 것을 자기와 동일시하기까지 한다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우리들 인간은 우리가 구하는 바 모든 대상들이 진실한 의미에서는 결코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무지하며, 또설령 완전히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영속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또한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현실적인 고를 문제의 출발점으로 인식한 것은 비단 석존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들에게서도 공통된다. 그들 다른 종교가들은 대체로 고의 근거와 이유를 육체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곧, 본래 청정한 정신을 속박하고 타락시키는 것은 육체라고 인식하였고, 그러므로 그들은 고행에 의한 수행으로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정신을 속박하는 힘을 깨뜨리려 하거나 또는 수정주의(修定主義)에 의한 수행으로 육체의 자극을 피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의 수행은 고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이상에 일시적으로 도달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영속시키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영속시키려면 육체의 완전한 무력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육체의 완전한 무력 상태는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의 해탈이 현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며, 사후(死後)에 즉 내세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석존은, 그와 달리, 고의 근거가 육체에 있지 않고 내면적인 번뇌인 무명에 있다고여겼고, 정진의 노력에 의하여 이 내면의 무명을 전환시킴으로써 고를 멸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성제 가운데 세번째 항목인 멸성제는 열반을 “멸”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되는데, 이와 같은 표현의 소극성은 체험의 적극성을 의미하는 측면이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 인간의 지혜와 사량 분별을 초월하여 이루어진 체험을 한정된 문자나 언어로 표현한다면 오히려 그 무제한성을 제한하고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석존이 말하는 열반은 번뇌의 멸각에 의한 인격의 반성이므로 어디까지나 현세에서의 일이며, 그리하여 나아가 열반에 도달한 이후의 활동을 중요시하게 된다. 곧, 생명의 참다운 혁신을 계기로하여 무아의 진정한 활동이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열반에 도달함의 진실성 여부는 그 후의 활동이 스스로 규정짓게 된다. 그러한 무애자재한 활동은 석존의 후반생(後半生)에 의하여 뚜렷하게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열반은 결코 토의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석존의 교설 중에는 열반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가지 도덕적인 수행과 심리학적인 고찰에 관한 것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런 것은 모두 목적을 위한 수단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