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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성과 폭력성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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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석자명 1989년 02월 84호
역사는 늘 추상의 세계 속에 있으며, 구체적으로 부딪쳐 오는 것은 언제나 현실적인 상황이다. 현실의 문제가 자기 반성적 사유라는 거울을 통해서 비추어 볼 때, 승가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폐쇄성과 폭력성의 극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불교의 실상과 허상은 무엇인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다시 이런 글을 쓰게 하는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깊은 혼돈의 나락에서 헤메고 있는 한국불교를 흔들어 깨울 묘책은 없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 승가를 위해 사랑의 질책을 해본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시내를 이루고 마침내 바다를 이룸과 같이, 우리의 작은 경험들이 모여서 역사를 이루어 나간다. 그러나 역사는 늘 추상의 세계속에 있으며, 구체적으로 부딪쳐 오는 것은 언제나 현실적인 상황이다.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의 문제를 자기 반성적 사유라는 거울을 통해서 비추어 볼 때, 승가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폐쇄성과 폭력성의 극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인간이 사는 사회로 보편화시켜 놓고 보더라도 폐쇄성과 폭력성의 문제는 인간성의 근본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의 승가 현실에서도 이런 문제는 매우 두더러지게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자신감이 없을 때, 흔히 마음의 문을 닫게 마련이다. 우리 승가의 폐쇄성도 자신감이 부족한 데서 비롯하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오랫동안 계속된 불행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현실을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준비를 못해 왔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문을 닫고 마는 폐쇄성에 빠져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 세력들이 그들의 기득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저지르기 쉬운 잘못 중의 하나도 바로 이 폐쇄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승단의 고질적 병폐 중의 또 다른 하나는 폭력성의 난무라고 하겠다.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가 적절한 틈만 있으면 폭발하는 것 같다. 이러한 폭력성은 윤리적인 감각이 마비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지난해 일어난 봉은사 사건은 한국불교 승가의 모든 병폐를 한꺼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발상의 부도덕함과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 폭력배를 이용하는 이기적 추악함이 여실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모두는 뼈아픈 참회를 해야 할 줄로 안다. 어떤 경우라도 폭력이 정당화되거나 용납돼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만해는 「불교 유신론」에서 개혁의 근본은 교육에서부터 비롯되야 함을 역설하고 잇다 그는 교육의 기본을 보통학, 인문사범, 자연사범에 두고 있다. 이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보편성에 입각한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당시의 기성 승단의 폐쇄성을 통박하고 있다, “아, 천지가 크고 학문의 세계가 넓은 터에 후배가 무슨 죄로 이런 무식, 무지한 자들의 지도를 감수하여, 그 전철을 밟아 제 2의 뽕나무 벌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계승되어 끊어지지 않는다면 후생의 해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만해는 교육의 폐단을 보편성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개혁은 전통에 뿌리한 교육과 의식의 변혁이 뒷받침되고, 폐쇄성과 폭력성이 개방성과 윤리성으로 극복되어 힘의 논리가 지양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위해서 는 자정(자정) 능력을 회복해야 하며, 그 바탕을 정법에 두어야 한다. 정법의 근원은 자유이다. 그래서 정해진 법 없음을 이름하여 바른법(無有正法 是名正法)이라 하겠다.
더 이상 굴러떨어질 수 없는 바닥까지 떨어진 한국불교는 이제 올라가는 길만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썩은 것들을 거름삼아 한번 크게 비상해 보자, 한국불교는 이러한 점에서 희망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