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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귀우목盲龜遇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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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권종희 2001년 08월 234호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서 법당을 나와
눈썹같은 하현달빛 아래에서 물을 마시고 얼음물에 세수를 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자문하다가
‘어쨌든 삼천배를 끝내놓고 생각하자’하고는 다시 법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금 코끼리 다리를 더듬으면서 코끼리는 기둥처럼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불법佛法은 그렇다. 오십 중반을 넘긴 나이에 계戒를 받고 돋보기를 끼고 책을 보면서 열심히 절을 하게 된 사연을 쑥스러운 마음으로 내보인다. 이것이 코끼리의 다른 부분도 만져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지금 단기 4292년(1959년) 10월 11일 날짜가 새겨진 해인사 대적광전 앞 계단에서 찍은 빛 바랜 흑백사진 한 장을 보고 있다. 내 고향은 합천군 가회면이다. 이 사진은 시골 중학교에 다닐 때 화물트럭 적재함에 3학년 전체 29명이 정답게 오글오글 타고 해인사로 수학여행을 가서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그 때가 처음 해인사와의 만남이었다. 지금 기억은 희랑대를 거쳐 백련암을 올라갔던 오솔길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집안에서 불교를 믿는다거나 주변에 절에 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 분위기인지라 참배에는 별관심도 없었다. 다만 책에서 배운 팔만대장경과 주변 경관만 둘러보는 그런 여행이었다.

1956년 가을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을 경남 통영으로 갔다.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하루저녁을 미륵도 용화사龍華寺에서 잤다. 육이오 사변 이후 혼란기의 어려움 때문에 한 반뿐이었던 동급생 중 쌀 몇 되씩의 여행경비를 낼 수 있는 학생이 절반 정도밖에 안되는 그런 시절이었다. 승방에서 잠을 자고 아침식사 후 소금물에 절인 주먹밥을 점심으로 받아먹은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것이 나에게는 최초의 절 밥이었고, 그 인연이 오늘의 코끼리 구경에 닿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1974년 한 겨울 두 번째 해인사를 찾게 되었다. 1월 7일에 시골에서 중매로 선을 본, 산 하나 넘어 마을의 처녀와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시골 풍습대로 처가에서 2박 3일을 머문 후 본가로 신행하고 나니 남은 시간은 사흘 뿐이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신혼여행을 가까운 해인사로 간 것이다.

해인사 입구가 정비되기 전인지라 계곡가에 여관들이 늘어서 있을 때였다. 겨울이라 손님도 없는 호젓한 여관방에서의 따뜻했던 그 때의 2박 3일이 지금 생각해보니 꿈같다. 눈 쌓인 계곡과 암자들을 순례하면서 손잡고 노래 부르고 서로 쳐다보면서 깔깔대던 젊음은 영원할 것 같았는데……. 처가 집안은 불교에 젖어 있었다. 아내도 신심 돈독한 불자였다. 법당에 참배하면 나는 뒤에서 늘 지켜보기만 했다. 그 기간이 25년이었다. 절에는 함께 기쁘게 따라 가면서도 절은 하지 않았다. 삼배조차 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결혼 후 28년을 함께 살아오면서 우리는 서로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해 왔다. 그 고마움의 증표로 처음 만난 날과 결혼한 날, 그리고 아내의 생일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매년 기억하고 챙겨왔다. 그 일을 아내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훈장처럼 자랑하고 다녔고, 또 언제나 나를 추켜세워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모두가 아내의 사랑과 인욕과 간절한 기도의 가피력인 것으로 여겨진다.

1998년 11월 무렵이었다. 두 달 후면 결혼 25주년이었다.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 어려운 생활 중에도 근검 절약하여 생활을 안정시키고, 자식 공부·집안 대소사 등 모든 일을 챙기고 남편 직장생활까지 안정적으로 뒷바라지한 아내의 지난날의 공로에 대한 보답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해외여행을 할까? 선물을 사줄까? 바라는 바를 물었다. 아내는 주저 없이 “해인사 백련암에 가서 삼천 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울컥하는 회한의 느낌이 왔다. “같이 가서 하자”고 했다. 아내는 지금까지의 내 행태로 미루어 너무 쉽게 ‘그렇게 하자’는 대답에 어리둥절해 했다. 남은 기간은 두 달. 걱정이었다. 저질러 놓긴 했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날부터 사무실에서 시간이 나는 대로 앉고 서기를 반복했다. 또 책상 짚고 팔굽혀펴기를 몰래 계속하면서 몸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래도 불안했다. 결전 3일 전 일요일, 집에서 문을 잠궈놓고 혼자서 절하는 연습을 했다. 한 시간에 오백 배를 하고 나니 땀이 전신에 범벅되었고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 더 큰일은 이튿날 아침 일어나니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런 다리를 끌고 1월 6일 저녁 백련암으로 갔다. 나에게 그것은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이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6시부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 오백 배를 오기로 하고 나니 몸이 좀 풀렸다. 그러나 천오백 배에서 한계가 왔다. 떨리는 다리로 법당을 나와서 밤 깊은 산사에서 하현달이 눈썹마냥 떠있는 밤에 물을 마시고 얼음물에 세수를 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자문하다가 ‘어쨌든 끝내놓고 생각하자’ 하고는 다시 들어가서 절을 계속했다. 이천 배까지는 힘들었다. 그러나 그 이후 힘들다는 생각도 없었다. 탄력이 붙은 기계처럼 무심하게 부처님 명호를 부르면서 그냥 그렇게 계속해 가는 어느 순간 정신이 들었다. 삼천 배를 마쳤던 것이다. 기쁨이 전신을 훑어 내려가고 날아갈 것 같았다. 새벽 2시였다. 아내의 절은 이백 배를 남겨놓고 있었다. 아내의 마지막 절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땀 범벅이 된 얼굴로 안도와 감사의 미소를 띄우고 두 손을 꽉 잡았다. “부부가 아닌 도반으로 다시 태어나자” 삼천 배를 마치고 맞이한 결혼 25주년의 새벽은 예불로 시작되었다. 다시 하는 백팔 배는 힘들지 않았다. 마음은 가볍고 몸은 !
상쾌하였다.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산을 내려오기 전에 스님을 친견하고 녹차를 마시면서 법문을 들었다. 그 때 엉뚱한 약속을 했다. 업장을 녹이고 바른 신행생활을 하기 위해서 삼천 배도 좋지만 매일 아침 기도하면서 백팔 배를 할 것을 권유받았다. 얼떨결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해버렸다. 그 날 이후 갈등이 생겼다.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는가를 알고 싶었다. 불교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려워서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계속 읽었다. 두 달 후부터 아침 출근하기 전에 매일 백팔 배를 하기 시작했다, 그 해 여름 통도사 하계수련회를 마치고 금강계단에서 오계를 받았다. 틈나는 대로 가족과 함께 봉정암에서 대둔사까지 유명사찰 참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년 반이 지나갔다.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상무주上無住, 상견성암上見性庵을 마음 속에 그려보기도 하고 경전공부도 해본다. 이제 내가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도 조만간 끝날 것이다. 이후에는 미움과 원망 속에 괴로워한 지난날의 다투고, 모으고, 채우려는 생각과 생활에서 벗어날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모든 것을 떨치고 버리고 비우는 새로운 삶의 자세로 거듭나고 싶다. 그리하여 다음 생에는 욕탐을 버린 수행자가 될 수 있는 씨앗을 키우고 싶다. 맹귀우목盲龜遇木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