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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常) - 그 인식적 고찰과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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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소허 1987년 04월 62호
우리는 이미 그 때 그 순간의 존재로서 지나간 삶의 신화이며 껍질이며 명예이며 치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순간적으로 현현(顯現, 드러남, 드러냄, laksana, 相, 모냥사니, 꼴)하는 찰나적 섬광일 뿐이다. 달리 도리가 없다.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다. 팔자소관이란 말이 적절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적 삶이다. 진실이다. 진리이다. 진리는, 그리고 삶이 운명적임을 드러낸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생성소멸 전이(조건적 옮김)때지는 변화해 가는 무상한 삶의 운명, 그것을 드러낸다. 꼭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음을 운명이라고 하자. 그래서 무상한 삶의 운명은 우리의 삶이 ‘운명적으로’ 무상(無常)한 것임을 백일하에 밝힌다. 따라서 무상은 우리의 삶이 운명적으로 자유요, 해방인 것을 만천하에 천명한다. 왜냐하면 삶의 무상성(無常性)은 어원적 고찰을 떠나서 개념 이전의 구체적 삶의 문제로서, 우주현상 그대로 우리의 삶이 한 순간도 멈춤이 없는 흐름이요, 변화 그 자체임을 스스로 느끼고 체증하는 바 누구나 살필 수 있는 평범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삶이 무상하지 않다면, 흐름도 변화도 없다면 문자그대로 앞뒤가 꽝꽝막힌 먹먹함, 아득함, 답답함, 그것으로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깜깜감옥이요,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무상은 곧 자유요 해방이요 생명이다. 생명은, 자유는, 해방은 무상성(無常性)의 현현(顯現)이요, 그 발현이다. 그렇기때문에 생명을, 자유를, 해방을 가두고자 하는 집단 이기심의 지배논리가 반무상적(反無常的) 인식구조를 산출해 내 영원한 삶, 천당극락, 누구의 아들, 지도자니하는 따위가 실제로 정당하게(올바른 인식에 근거해서 진실로) 삶의 장(場)을 차지할 수 있어서 뭇삶 위에 군림하는 특권을 합목적성으로 (자타가 인정한 진실로), 우리의 복된 삶(?)을 준비코자 하는 저들의 뜻(의도)대로, 감사하고 은혜롭게도(?) 가질 수 있는냥 설치는 꼴을 보더라도 무상이 무서운(저들 이원론적 지배자에게) 진리인 것이 명약관화하다. 그래서 풍문처럼 무상하므로 인생은 덧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체념적 운명관으로 무상의 실상을 덮어씌우고 제 하기 좋게만 만들어 떡주는 이의 춤을 추라는 것이다. 허수아비처럼, 꼭둑각시처럼, 그저 시키는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것이다. 만들어 주인이요, 만들어 하인인 우리의 우상은 옛적부터 눈멀고 귀먹어서 체념적 무상관으로 우리의 싱싱한 가슴을 좀먹어 적시적소에서 시효적절하게 떡 주는 이의 나팔을 불어왔던 것이니, 우리는 일찍부터 무상의 전당에서, 진실의 전당에서 내몰림당한 것이다. 몰수당한 삶, 저당잡힌 삶, 부당하게 착취당한 삶, 그것은 무상이 아니다. 그래서 진실이 아니요, ‘죽임’ 이다. 그래서 무상만이 자유요, 해방이요,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상성(無常性)의 꿈틀거림으로 저항하며 살아남고자 안간힘을 쓰나 소문대로 인생은 덧없기만 하다. 그러나 진실은 오도되어 있다. 인생이 무상하므로 덧없는 것이 아니라, 소문이 제공한 반무상적 인생관이 덧없는 것이다. 떡 주는 이의 춤을 추고 넙죽 받아먹는 떡의 인생이 덧없는 것이다. 꼭둑각시로 살아온 인생이 덧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올바른 자리 점검으로서 무상적 삶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천착해 나아감으로써 진실한 삶의 용기를 갖도록 하자.
삶의 고통, 그리고 기쁨.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래서 올바른 인식적 지평의 열림은 구원이요 해방이다. 고통의 제일의적 느낌은 ‘존재’와 ‘나’ 가 있다는 데서 연유된다. 그러나 실상은 삶의 배후에서 고통과 기쁨을 체험하는 주체적인 그 무엇의 ‘존재’나 ‘나’는 없다. 우리는 고통 그 자체요, 기쁨 그 자체일 뿐이다. 고통과 기쁨을 떠나서 따로이 ‘존재’ 나 ‘나’ 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체라든지 연속하는 동일물질, 정신따위가 있어서 고통과 기쁨을 느낀다거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상성의 제 조건의 이합집산의 연출, 그뿐이다. 우리가 자아(自我)라거나 실체라거나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우리의 염원인 욕망의 다른 이름일뿐, 실제로 그렇게 나타난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냥 어떤 현상으로서 다만 그렇게 섬광처럼 이합집산하는 무상의 원소적 조건의 맞닥뜨림일 뿐인 자유요, 해방이요, 열림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현상은 무상성의 현현(顯現)이다. 따라서 우리의 일체의 행위도 무상생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 무상성은 우리의 욕된 집착이 노리는 바 그 대상이 진실로 있음(實有)이 아니라, 일시적 순간의 현상 내지는 사건(존재가 아니라)일 뿐임을 일깨움으로써 잘못 날조된 욕망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인류사 이래 탐진치의 결과로 인한 반무상적 인식 과오의 최대의 쟁점은, 억제할 수 없는, 끝갈 데 모르는 탐욕과 그 시녀로서의 절대적 권력, 절대적 신(神), 절대적 불문율(法), 절대적 정신(고정 관념, 이데올로기), 절대적 물질(물신주의, 경제적 인생관, 현상적 있음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따위), 절대적 진리(인식의 연기성이나 상대성을 잊은) 등등의 자리 굳힘과 자리다툼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자자손손 대물림으로 그 유산의 피가 인류 혈청을 더럽히고자 음모에 술수를 더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더없는 우리의 슬픔이다. 절망이다.
이러한 반무상적 유상성(有常性)인식의 치명적 논리는, 그리고 그 상습적 불굴의 정신으로, 무상적 인식이 정수인 부정(아니다)의 정신을 용납하지 않는 폐쇄성으로 유기체 내부를 죽임으로써 잠식하여 제살을 찌우는 부식성 고정관념의 철저한 고수, 옹골찬 닫힘, 그것이다. 이것은 물론 권력의지의 지속적 실천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지켜나아가야할 바의 수칙이요 계명이다. 무엇이 ‘아니다’라고 하자. 우리는 그렇게 발언하고 실천함으로써 나자신 스스로의 무상성의 실천자요, 그 자체일 수 있다. 무엇이 ‘그렇다’라고 하자. 우리는 그렇게 발언하고 실천함으로써 나자신 스스로의 무상성을 지적하여 그 자체임을 밝힌다. 인식은 곧 실천이다. 적어도 실천의 출발이다. 먼저 올바른 인식으로 깨어있자. 무상성으로 성성적적하게 깨어있자. 그리하여 저 무서운 반무상성의 그물이 덮치는 것을 경계하자. 혁파하자. 저 파렴치한 유상적 그물을. 마침내 삶의 진실인 무상성을 살리자. 한마디로 삶의 진실은 무상성이다. 정신이든 물질이든, 그리고 언어적 인식이든, 이 우주적 현상내지는 사회적 현상 어느 것 하나 바로 이 무장성의 산물이 아닌 것이 없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은 무상(無常) 바로 그 자체이다. 이것은 누가 그렇게 말해서 그렇다거나 어떤 종교적 개념이 전적으로 그렇게 주장했대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니, 세상이 열리기 전부터 바로 이 무상성(無常性)이 천상천하 유아독존하여 온갖 존재 비존재의, 있음과 없음의 씨앗이 되어 작금에 이르렀음은 누구나가 다 조금만 신경써 주변을 살펴볼진대 분명해 진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무상성의 찰나적 섬광이야말로 ‘무상성’ 이란 개념에 앞선다. 다시 말해서 무상성은 ‘존재와 무’ 의 씨앗이다. 그래서 무상성이 아니고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우주도 되지 않고 세상도 되지 않고 너도 나도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상이야말로 저 생명이란 이름에, 진리란 이름에 값한다. 어떤 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그것이 적어도 이 세상에 드러남이란 바로 이 무상성의 기운(氣運) 이 아니고서는 용빼는 재주가 없다. 어떤 것을 우리가 ‘있다’ 고 하자 그러려면 이 무상성의 기운을 타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것을 우리가 ‘없다’고 하자. 그러려면 이 무상성의 기운을 타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무상을 떠나선 아무 것도 존재, 생성소멸, 발전퇴보, 후퇴전진할 수가 없다. 정지되고 고정된 변함없는 존재란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이 몸 이 마음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 몸이 무상하지 않다면 먹고 싸고자라나는 신진대사가 있을 수 없으며, 이 마음이 무상하지 않다면 아무런 생각의 흐름도 찧고 까부는 말의 조잘거림도 뭣도 있을 수 없어 그대로 화석화나 미이라 이상이 되어 (미이라도 무상으로 미이라인 것이니)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아득한, 까마득한 주검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니, 실로 상상만해도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끼치는 방정맞은 생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때문에 무상이 아닌냥 너스레를 떠는 흉물스러운 꼴에서나 반무상적 지배논리에서 몸서리치는 거부반응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로 무상은 우리의 생명이요 진리요, 구원이며 해방이다. 자유요, 통일이요, 조화이다. 그러므로 이에 반(反)하는 굳힘자리, 묶임자리, 보수화 기특권 고수, 이데올로기성 죽임자리인 닫힘과, 구속과, 분단의 고정화는 그대로 무상성에 반(反)한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무상에 반(反)하는 유상(有常)의 개념을 떠올려 보자. 그러나 그것은 무상(無常)을 더욱 효과적으로 떠올리기 위한 가상적 배경일 뿐이다. 유상(有常)은 그래서 허위이며 거짓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무상성을 무시한 온갖 물질적 정신적 구조물은 싸잡아 허위 거짓일 수 밖에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보수화로 다져질대로 다져진 견갑질의 정신과 물질, 그리고 옹골찬 닫힘자리인 기득권 고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탐욕적 인간의 추악함으로, 생명의 원천인 신진대사의 흐름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살아가는 일이란 무상성의 올바른 실현이다. 변화의 빠름과 늦음의 차이가 있을 뿐 이 세상의 온갖 것은 무상하다. 무상하므로 우리는 나고 살고 죽는다. 삶의 신진대사, 무상이란 이것의 다른 이름이다. 신진대사가 원만히 이루어지는, 즉 무상성이 원만히 실현되는, 이 개체적 유기체나 공동체적 유기체로서의 한 모임과 사회와 국가가 있어서, 권력구조의 연기적 상의상존성을 총체적으로 조화있게 드러낼 수 있다면, 그런 곳에 무상성의 건강은 살아있다고 하겠다.
무상성의 자유스러운 삶의 현장에서 내몰림당함, 그렇게자청함, 그리하여 소외 분단 고정화되어 철책 양편에 나뉘어 갇힘, 이 일은 참으로 우리 시대의 더없는 반무상적(反無常的) 비극이다.

한 생각도 붙들린 바 없는 열림, 자유, 해방 이것이 곧 부처님의 마음일레.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