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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세 걸음 물러나면서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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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의 샘 - 수진 1997년 06월 184호
자고로 우리나라는 섣달그믐이 되면 좋은 글귀나 말씀을 적어서 아랫사람이나 이웃에게 나눠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발전되어서 오늘날 교훈의 말씀, 좌우명으로 전해집니다. 이 유래가 바로 불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옛날에 하루하루를 거리의 길고 짧음에 관계 없이 장사를 해서 먹고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중국 가까이 아주 먼 곳까지 갔다가 곧 설날이 가까워오자 서둘러 돌아올 차비를 했습니다.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줄 좋은 선물감이 없을까 하고 시장에 들렀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마땅한 선물감이 없어 서성이는데, 저쪽에 한 스님이, “게어偈語사세요, 게어 사세요” 하는 겁니다. 스님이 뭐를 사라고 하니 신기한 마음이 들어 다가가 물었습니다.
“게어偈語가 뭡니까.”
“좋은 시, 좋은 말씀의 글귀입니다”
장사꾼은 그 글귀의 내용을 읽어보았습니다.
“앞으로 세 걸음 가면서 생각하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나면서 생각하라, 진심嗔心이 일어날 때 이렇게 생각하면 진심의 불길은 사라지리라.”
글귀가 마음에 든 장사꾼은 대뜸 그것을 사들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밤늦게 집으로 와 대문을 열어보니 가관이었습니다. 믿고 믿었던 부인이 신을 거꾸로 신었던 것입니다. 댓돌에 남자 신발과 여자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장사꾼은 ‘내가 누구를 믿고 이렇게 장사를 하러 다녔는가’ 생각하니 신세가 한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는 당장 식칼을 뽑아들고 방으로 뛰어들려 했습니다. 그 순간 시장에서 산 게어의 글귀가 생각나 잠시 행동을 멈추고 그 게어를 막 외웠습니다. 게어 외우는 소리가 점점 커지자 안에서 잠자고 있던 부인이 들으니 성이 나서 주체를 못하고 식식거리는 남편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방문을 열고 나와 부인이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돌아오셨으면 방으로 들어오시지 왜 그리 서 계십니까.”
다른 남자와 자고 있던 주제에 그런 소리를 하는 아내를 보니 남편은 성이 더 뻗쳐 당장 칼로 내리치고 싶었으나 꾹 참고 “함께 있는 놈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웬 놈이라니요. 육 개월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더니 당신 신발도 몰라 보십니까” 장사꾼이 댓돌에 놓인 신발을 자세히 보니 집을 떠나기 전 자기가 신던 신발이었습니다. 내일이면 정월 초하루,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기다리다 신발이라도 나란히 두고 자면 꿈에라도 남편을 볼까 해 부인이 신발을 꺼내 놓았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모습은 모래를 일어 밥을 지으려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 우화는 지혜와 어리석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은 만사를 그르치는 근원이 되고 반대로 지혜는 만사를 형통하게 합니다. 지혜는 많이 아는 것을 의미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비워서 새로운 빛이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과 지혜는 엄연히 다르고 구별됩니다. 지혜는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솟아날 수 있고 배우지 않아도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머리로 많이 알고 있는 자체를 놓아 내림으로써 얻어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아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지, 하나 알고 둘 알고 셋 아는 것이 아닙니다. 노자도 “학문이라는 것은 매일 같이 하나 둘씩 채우는 것이고, 도道라는 것은 날마다 하나 둘씩 내려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려 놓고 내려 놓어서 더 이상 내려 놓을 수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 무위자연의 도에 순응하는 존재자라고 했습니다. 원래 구김살 없는 상태를 자연이라고 합니다. 뜯어 고치지 않고 본래 생긴 얼굴 모습 그대로인 그런 상태에 이르는 것을 무위자연이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비움으로써 밝게 빛나는 광명이 솟아날 때 지혜가 충만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많이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사리판단 능력이 투철한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옛날에 한 과부가 외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며 살다가 며느리를 얻었는데 고부간의 갈등이 심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너무 괴로운 아들은 차라리 어머니나 부인 가운데 누군가 죽었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래 부인을 불러 “당신과는 백년해로 했으니 어쩔 수없고 어머니는 살만큼 사셨으니 그분을 죽이자”고 했습니다. 좋다고 하는 부인에게 “백 일 동안 매일같이 달갈 하니를 삶아 어머니께 드리면 백일째 되는 날 돌아가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날부터 며느리가 지극정성으로 공손하게 시어머니께 날마다 달갈을 삶아 드리자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동네에 며느리 자랑을 하고 다녔습니다. 백 일을 하루 앞 둔 날 어머니가 아들을 불러, 그런 며느리가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동네에서 들려오는 자신을 칭찬하는 소문을 들은 며느리는 더이상 시어머니께 달걀을 삶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빨리 한개 더 삶아드려 어 머니를 죽이자”는 남편에게 “그렇게 좋은 분을 어떻게 죽일 수 있느냐”고 울며 매달렸습니다.
남편의 지혜가 뛰어난 예의 이야기입니다. 내외간에도 한 사람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둘 다 멍청하면 세상이 멍청해 보이고, 세성이 멍청해 보이면 천하가 불만스럽고, 천하가 불만스러우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불만을 가지고 일하면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이 백년을 산다 해도 지혜 없이 살면 지혜를 가지고 하루를 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고, 세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보고 듣는 대로 얘기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신중하고 냉정하게 생각을 해서 행동합니다.
여러분에게 공부하라고 하면 아들며느리 손자에 얽혀 못한다고 합니다.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인생 백년이라고 하지만 사십대 치사율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합니다.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명상을 하면 스트레스가 없어집니다. 명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참선입니다. 하루에 두시간씩 일 년 내내 참선하면 여러분의 수명은 십 년 더 늘어납니다. 삶을 바꿔 놓아버립니다. 스님은 완벽한 채식주의자라도 비교적 오래삽니다. 여러분 생각에 영양실조로 빨리 죽을 것 같지만 명상과 수행이 생명을 연장시키는 자양분이 되어 주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에 한시간만 침묵속에 들어 앉아보세요. 백 년 되지 않는 인생 곰다리 끌어안고 헤매듯 얽혀 살지 말고 이제는 여러분의 살림살이를 챙겨볼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사십이면 불혹의 나이라고 하는데 여러분은 만사에 현혹되지 않고 삽니까. 오십이면 지천명知天命, 인생사를 다 알고 무위자연의 천지 이치를 안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자기 아들 하나도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물에 현혹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관조해 보면 ‘내가 정말로 제대로 살아왔나, 어리석게 살았나’를 알게 될 것입니다. 아들손자에게 매어 있을 때는 매어 있더라도 자기를 돌아볼 때에는 사물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안으로는 자기 살림살이를 확연히 챙기고 밖으로는 아들딸에게 분명히 시여해 줄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불교에서 말하는 자리이타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앞으로 세 걸음 걸어가면서 생각하고 뒤로 세 발짝 물러나면서 생각하라.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여러분 가슴 속 분노는 사라지리라.’
이 게송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행위이고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