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잠으로 클 나이, 열넷 소년에게 새벽 3시의 기상은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 같다. 초파일 무렵, 등을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우리 행자들은 새벽예불을 마치고 아침공양을 짓기 전까지 한 삽십분쯤 잠깐 눈을 붙이곤 했는데, 그날은 잠깐 누웠다가 그만 잠이 깊이 들고 말았다. 누군가 ‘일어나 불때라’고 흔들어도 일어나지 못했는데, 잠도 잠이지만 너무 고단해 축 늘어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흔들며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행자들이 하나둘 몰려와 마구 내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깨워도 일어나지 말고 끝까지 누워 있자’고 작정한 나는 이미 잠은 멀리 달아나 있었으나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행자들은 꼬집어도 보고 간지럼을 태워보기도 했다. 그래도 꼼짝하지 않자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듯 하더니 자기들끼리 그랬다.
“어? 안행자가 죽은 모양이야.”
그 말을 듣고도 일부러 가만히 누워 있었다. 행자들이 총무 스님께 달려가 얘기를 했는지, 잠시 후 총무 스님이 들어와 죽은 듯이 누워있는 어린 행자를 흔들었다. 총무스님이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분위기로 바뀌어지는 게 느껴졌다.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이왕 이렇게 된 거 누워서 배겨보자’ 하는 배짱이 생겨 모르는 척 누워 있었다.
“오늘 안행자는 하루 쉬게 해야겠다. 원주실 뒷방에 데려다 눕혀라.” 총무 스님의 명이 떨어지자 행자들이 나를 떠메다 뒷방에 눕혔다. 행자 예닐곱 명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나는 꾀병으로 그날 그렇게 고단함을 호소하고 시위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수님의 손을 잡고 한없이 이어진 오솔길을 걸어 걸어 도선사에 들어왔다. 그리고 형수님의 손을 놓는 순간부터 고행의 연속이었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는 것도 고행이었고 졸음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부엌에 불을 때 밥을 짓는 일도 열넷 소년에겐 고행이었다. 밭 매고 나무 해나르고, 무명옷을 풀해서 숯불다리미로 다림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코피를 쏟았다. 너무 힘들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도선사에서 고향 충주는 너무 먼 거리였고 가는 길도 몰랐다.
도선사 밑 개울가에 내려가 남몰래 많이도 울었다. 너무 고단해 울었고, 절에 들어오기 전날 끌어안고 울었던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쏟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금씩 법당의 부처님과 탱화들이 다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아궁이 앞에서 선배들을 흉내내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염불을 익혔다.
그래도 몸은 한없이 고단했고, 소낙비처럼 퍼붓는 잠을 이기지 못해 급기야는 꾀병을 부려본 것이다. 가끔씩 쥐들이 들어와 손가락을 깨물며 꾀병으로 누운 행자에게 ‘행자님 어서 일어나요.’하고 말을 건네고 있을 즈음, 몸은 누워 있었지만 정신은 말짱한 내 귀에 큰방에서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안행자가 아무래도 죽으려는 모양이야. 죽으면 뒷산에 묻자구….”‘정말 내가 죽은 줄 알고 땅속에 묻으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초조하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쿵쿵 뛰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불안해 하고 있는데, 다시 쥐가 와서 귀를 물어뜯으며 그랬다.
“괜찮아요 행자님, 지금이라도 일어나요.”
11시쯤 슬슬 일어나 큰방으로 들어갔다. 등을 만들고 있던 대중들이 꾀병을 스스로 해제시키고 일어난 행자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어? 안 죽고 살았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꾀를 다 내었겠는가 하는 웃음 띈 얼굴들을 뒤로 하고 나와 개울가로 내려 가서 얼굴을 씻는데,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그랬는지 어지러워서 혼났다. 그렇게 순수함으로 행자시절을 열었다.
그렇구나, 다 내가 있어서 그런 거야
은사이신 청담 큰스님 시봉을 들고, 또 스님의 간곡한 법문을 들으며 마음이 안정되어 갔고 중물이 들었다. 스님께서 주무시던 방의 다락방에서 잠을 잤는데, 새벽이면 어김없이 스님께서 나를 깨우시며 하신 말씀은 이랬다.
“어서 일어나 예불해라, 이놈아. 부처님 밥 먹고 살고, 또 부처님 제자 되려면 조석예불 빼먹지 말아야 한다.”내가 스님을 시봉한 게 아니라 스님께서 어린 내 시중을 한 셈이 되었으니, 돌아보면 웃음이 난다. 생식을 하셨던 스님의 공양상을 차리는 것은 내 몫, 그래서 쌀을 잘 갈아 놓고 정성껏 야채를 씻어 놓아드렸다. 그리고 그 당시 귀하디 귀했던 귤 하나를 까서 밥상에 놓았는데, 나중에 상을 치우다가 남기신 귤을 후딱 먹어치웠던 일도 지금에 와선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른다.
은사 스님의 검소함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아침마다 죽을 쒀먹던 우리들에게 죽이 너무 되게 쑤어진 날이면 ‘옛 분들은 하늘의 별이 보일 정도로 묽게 쒀서 공양을 했다. 시주물 아껴라.’ 하셨고, 후원을 돌아보시다 수채에 버려진 콩나물대가리를 주워서는 ‘오늘 저녁상에 이것을 요리해서 내 밥상에 놓아라.’ 하셨으니, 스님 밑에선 물건을 허투루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욕보살’로 불려졌던, 엄하면서도 한없이 자상하셨던 은사스님께 내가 배운 것이 어디 검소한 생활 뿐이었겠는가. 무엇보다 스님이 내리신 법문 속에서 나는 인간사를 관통하는 인과법을 깨우쳤고 무상의 도리에 눈을 떴으니, 날이 갈수록 ‘절에 오길 참 잘했구나’하는 흐뭇함 속에서 행자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한 번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계속되었던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었기에, 큰어머니 밑에서 눈칫밥 먹고 자란 일이나 낳아준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던 상처를 씻을 수 있었다. ‘불법 만나기 어렵고 사람 몸 받기 어렵다’는 진리에 마음이 열리면서, 부모형제에 대한 미세한 원망을 버릴 수 있었음은 물론,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했던가. 게다가 부처님법을 만나기까지 했으니 부모님이 고마울 뿐이었다. 절에 들어와 몇 년 후 아들을 만나고 돌아서던 부모님의 뒷모습에서 생로병사의 ‘덧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 은사 스님의 무상법문은 내게 깊고도 깊은 가르침이었다.
그 후로 나는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해보지 못했다. 때로 경계에 부닥쳤을 때 잠시 미워했다가도 곧 ‘모두 내 탓이다’ 하곤 돌려버리고, 과거에 연연해 하지 않고 현실긍정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도 스님의 산 법문 덕분이었다.
‘검소하되 남에게 베풀며 살라,부처님 섬기듯 사람을 대하라’는 스승의 산 교훈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서른다섯 해 전, 두 해 정도 보낸 내 행자시절은 그렇다. 기도하고 예불하며 큰스님 법문을 듣고, 《부모은중경》을 읽으며 그토록 지중한 부모님의 은혜에 눈을 뜨고, ‘인연의 주재자가 곧 나’라는 연기법에 눈을 뜨던 시절이었다. ‘중노릇은 행자 때 다 한다’는 말이 있듯, 그 시절 스승을 모시면서 배우고 익혔던 그 모두가 그 후로 수행의 근간이 되고 힘이 되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