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 공즉시색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편지로 읽는 불교교리 - 현응
1987년 04월 62호
사제님 반행길에 불보살의 가호와, 끊임없는 정진있기를 바라면서-
기왕의 몇편의 신통치 못한 편지가 사제님 공부에 오히려 혼란만 준 것이 아닌가 저어됩니다. 사제님도 만행길에서 뜨겁게 느꼈겠지만 중생계는 위험한 불 속에서 고통받고 있읍니다. 보살의 신속하고도 강력한 행원(역사적 실천의지)을 바라는 부르짖음은 이미 하늘 가득합니다. 성급하고 여린 마음으로야 당장 어찌하고 싶지만 동참하는 아픈 마음만 가지고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삶을 읽어내고 역사를 통찰하는 지혜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문명인들을 그토록 비극적으로 분열시켜 놓은 현대의 도덕적 파탄은 인문과학의 붕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월터 리프번. Walter Lippmann
대단히 예지에 찬 이 말은 오늘 우리의 상황에 반조해도 도움될 듯 싶습니다. 급박하게 전개되어 가는 현대 문명과 정치·경제 등의 제상황은 많은 사람들을 사회과학 만능 풍조로 몰아가고 있읍니다. 그렇지만 일면 경제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기 쉬운 자본주의도 그 이번엔 인식과 대상을 분리해 놓고 보는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적 인식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으며 마르크스주의 같은 사회주의엔 물질(대상) 중심적인 세계관이 깔려있음은 주지하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사회과학적 제법칙도 그 배후엔 하나의 세계관 및 인식적 태도를 가지게 마련인데, 부분적이고 특수한 경우에 부합하는 바 있다하여 그 전체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엔 많은 문제가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삶들의 갖가지 부정적인 모습은 정치·경제적인 정책도 문제지만 그 이면의 우리들의 세계관, 즉 인식론, 존재론에 대한 각성 부족에도 큰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 대해 불교 승려들이 특히 노력해야 할 바가 많다고 느낍니다.
오늘은 불교의 존재관, 또는 인식관(불교에서는 사실 이둘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초기 경전에서부터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불교가르침의 핵심은 존재(물질적인 것, 심리적인 것, 언어, 법, 도덕 등의 가치 체계)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읍니다. 초기 경전의 이른바 ‘존재(法)를 보는 자연기(관계와 변화성)를 보게 되고, 연기를 아는 자 존재를 알게 된다’ 는 말씀이나 반야경의 ‘오온(물질계, 정신계의 다섯 유형)이 다 공(空) 하다’ 는 말씀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모든 존재를 변화와 관계성으로 보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은 우주적인 보편논리 뿐만이 아니고 자연과학에 있어 인식의 기초가 되어야 함은 물론 구체적인 역사 현실에 입각한 사회 이론이나 역사 이론으로까지 심화 발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연기의 가르침은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면 시대의 진행과 역사적 경험의 축적에 따라 새로운 시대의 삶의 언어, 역사적 언어인 공(空)이라는 용어를 통해 보다 풍성해지는데 그것이 오늘날에 와선 본래의 공(空)의 가르침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한문 불교권에선 더욱 심한 왜곡현상을 보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반야 심경’ 의 유명한 귀절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이 말씀은 하나도 어려운 말이 아니지요. 우선 ‘색즉시공(色則是空)’을 떼어놓고 본다면 ‘물질계(色)는 공(空) 하다’ 라고 번역할 수 있읍니다. 이것을 다시 부연하여 연기의 가르침으로 대입해 본다면 ‘물질계는 순수 독자 영역이 따로 없으며 유기적으로 서로 관련되어 겹쳐 있으며 무엇보다 이러한 것들이 변화의 과정 속에 노정되어 있다’로 됩니다. 따라서 ‘물질계가 공하다’ (色則是空)는 말은 표시점이 찍혀있는 긴 문장을 대치하여 하나의 약속언어인 ‘공’ 이라는 용어로 압축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간추리면 ‘물질계는 변화와 관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며(色=空)’, 역으로 표현하여 ‘변화와 관계로서 이루어져 있는 것은 바로 물질계다(空=色)’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경전에선 물질계뿐만이 아니라 정신계도 같은 이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어려운 것도 없는 이런 이야기를 심오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데서 폐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空)에 대한 몇가지 오해를 살펴보면,
첫째, 공이란 무(없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부정이지요 따라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있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라는 알쏭달쏭하면서도 엉터리 같은 허무주의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이란 물질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정신에 해당하는 것이라 보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정신이고 정신은 물질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공이란 변하지 않는 사물의 본체며, 색은 변화하는 본체의 외적인 현상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특히 불교가 중국에 유입되어 한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노장(老莊)사상의 부정적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사실 격의불교(格意佛敎, 다른종교나 사상의 용어를 빌어 불교를 해석하는 일) 시대에 번역된 경전에서 ‘공’ 에 대한 번역과 해석상에 오류가 많은 편이며, 특출한 불교사상가인 승조법사의 조론(肇論)에서도 도가(道家)적인 본체(体) 와 작용(用) 의 이분법적 생각이 스며 있음을 느낄 수 있읍니다.
소동파의 ‘적벽부’ 싯귀에 이런 내용이 었습니다.
그대 저 강물과 달(月)을 아는가?
흘러가는 물은 이와 같지만 정작 강물은 흘러간 적이 없으며, 차
고 기운다지만 달은 결코 줄거나 늘어나는 것이 아닌 것을. 이
렇듯 사물이란 변하는 관점에서 보면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것
이지만 변하지 않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영원한 것이니…
비교적 자연주의적인 낭만성을 깔고있는 이 이야기는 사물을 본체와 현상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보는 중국인 특유의 사고유형을 보이고 있는데, 문제는 많은 불교인들이 의외로 이런 사조에 쉽게 공감하는 데에 있읍니다. 간혹 선사(禪師) 들이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다리(橋)는 흐르는데 물은 멈춰 서 있다’ 라든가 ‘산(山)은 흐르고 물은 서있다’ 라고 말하는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도 본체와 현상의 이분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와 무상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통찰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존재를 바라봄에 있어 본체와 현상이라는 따위의 이분법적 사고에서도 벗어나야 되지만 그러기 위한 방편으로 도입한 ‘공’ 이란 말을 ‘색’ 과 다른 세계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도 멈춰야 하는 것입니다. 즉 현상계의 여러 상태를 분석해가고 사상(捨象) 해 가서 그끝에 가서 공을 보게 되고, 공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계의 온갖 사물이 공한 양상(변화와 관계)으로 존재하며, 공이란 현실계의 존재양상 그것임을 알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색 그대로가 공이며, 공 그대로가 색인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존재의 모습을 변화와 관계로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때도 여전히 계속되어 야기되는 중요한 오류에 대해 알아야만 합니다.
연기의 가르침(空의 가르침)은 ‘변화와 관계의 기르침’이라고 보통 이야기합니다만 사실 이 가르침의 요점은 어떤 ‘것’ (사물이든, 개념이든 간에) 이 있어 그것이 다른 어떤 ‘것’ 과 관계맺으며 변화해 가는 것이 아닌, 명사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이라는 그것이 우선적으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존재의 변화와 관계성 때문이지요. 현상계에 있어 어떤 ‘것’ 이 인정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모든 존재는 실체 (我)가 없다(諸法無我)는 불교적 대표적 인식
출발의 명제가 됩니다. 철학적인 표현으로는 늘 어떠한 형태의 실재론(實在論)도 거부하는 입장이 되는 것인데, 이러한 비실재론(非實在論)적 입장은 물론 무실재론(無實在論) 적 입장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이 비실재론적 입장은 ‘존재계에는 순수 독자 영역이 없으며, 어떠한 존재형태도 자기원인적인 것 (이를테면 신 따위)은 없으며 모든 것은 타원인과 결부되어 생성 변화한다’ 는 것이지 존재가 숫제 없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모든 존재의 모습을 존재하기는 하되 변화의 과정 속에 서로서로 겹쳐있는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존재를 변화와 관계성으로 파악하기는 하되 기본 관점이 여전히 실재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문젠데, 그것은 다음의 몇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 다원론적인 실재론에 근거하는 경우. 이 세계에는 A,B,C,D…등의 무수한 사람과 생각이 있고, a,b,c,d……등의 사물과 기타 등등의 것들이 있어 서로 영향관계 속에 변화해 간다는 생각을 들 수 있읍니다. 일종의 요소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둘째는 이원론적 실재론에 근거하는 경우. 이 경우는 첫번째 경우의 축약된 형태라고 볼 수 있읍니다. 이 세계를 크게 인식과 대상으로 구분하여, 삶과 역사를 이 두 영역의 상호 교감과 그 발전으로 보는 생각이지요. 이러한 인식과 대상의 문제는, 상호규정 및 형성의 관계 법칙으로 볼 때 선후의 관계나 각각의 순수 독자 영역으로서의 부분을 전혀 인정할 수 없음은 불교의 기본입장이지만 일반 학문에서도 변증논리나 현상학 등에 의해 진작에 극복된 생각입니다.
세째는, 일원론적인 실재론에 근거하는 경우. 브라마니즘 유일신적인 기독사상, 또는 물(物)을 말하는 마르크시즘 등이 여기에 해당되겠지요. (어쩌면 마르크시즘은 세 가지의 경우에 두루 해당할는 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지면상 두루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각각 상이한 세계관을 토대로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의 주장들이 실제론적인 세계관으로 분류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아뭏튼 불교가 제일 우선적으로 부정하고 나선 ‘실재론적인 사고방식’ 에도 이렇듯이 다양하고 심층적인 갈래가 있음은 초학자로선 무척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기본적 불교의 명제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간단한 것이 아니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각성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근본적인 시각을 통해서만 흔들리고 불안한 마음을 떨치고 마침내 열반에 이를 수 있으며 보살은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내는 방편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색즉시공하니, 큰 지혜로 생사에 머물지 않고
공즉시색하니 큰 자바로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
觀色卽空, 成大智而不住生死
觀空卽色, 成大悲而不住涅槃-華嚴還原觀說
마땅히 수행자가 늘상 교훈삼을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늘상 건강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