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당신과 나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아직 젊은 날, 삶이라는 폐곡선 위의 임의의 두 점을 이룬 것은 삶 이후의 삶 - 죽음에의 욕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개체의 탄생과 성장과 영면이라는 직선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나는 좀더 착하게 나의 생을 위로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좀더 간단하게 죽음에 이르렀을지도. 생의 유한성과 불연속성에의 공포란, 비껴갈 수 없는 카르마에 의해 운용되는 저 영속하는 순환적 세계인식에 비하면 얼마나 평평하고 순연한 것인지. 부끄럽지만, 또다시 이 세계에 던져지고 말 것이라는 공포가 결국 지금의 생을 끌어안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내게 있어 생이 비극인 것은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또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에 있었으므로.
서두르지 않아도 그것은 옵니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이거나 훨씬 늦게이거나. 그 때가 언제일지는 이제 내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이 가까이 왔을 때 미리 알아챌 수 있는 밝은 눈이 내게 있기를. 나의 의식이 보다 명확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기를. 마지막 호흡을 스스로 관觀하면서 나의 의식이 전이되는 각 단계들을 명료한 의식으로 대면할 수 있기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죽음 중에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몇 있습니다. 나는 가끔 그들의 최후를 상상해 보고, 그 상상의 끝자락에 나의 최후를 비끌어매며 즐거워지곤 합니다.
그 하나는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Loving and Leaving the Good Life》라는 아름다운 책의 주인공인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생애는 ‘삶의 질’에 대한 참으로 아름다운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평생의 정신적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그들이 반세기 동안 함께 땅을 일구며 깃들어 살던 자연의 품속에서 선택한 죽음의 방식은 아름다웠습니다. “스코트는 자기 힘이 아주 사라지기 전에 가고 싶어했다. 그이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가기를 원했고, 의식을 갖고 또 의도한 대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과정에 협조하면서 죽음과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이는 죽음의 경험을 피하려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기꺼이 그리고 편안하게 몸을 버리는 기술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기대했다. 죽음으로서 그 자신을 완성할 것이다.” 헬렌이 참으로 신뢰했고 아낌없는 존경을 바쳤던 스코트 니어링은 노쇠하여진 육신이 더 이상 창조적인 일과 사유를 허락치 않을 때 스스로 단식을 선택하여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다른 차원의 문을 열어젖히는 새로운 경험이며 평화로움과 행복감 속에 이루어진 아름다운 마무리였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참으로 자유롭고 의로운 방식으로 실천했던 그들,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자유인이었던 그들의 삶과 사랑과 죽음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배운 셈입니다.
또 하나는 붓다의 죽음. 붓다는 그 탄생과 죽음의 순간 모두가 경이롭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출산의 징후가 나타나자 마야 부인은 성스러운 숲 룸비니 정원으로 향했다지요. 그 곳에서 그녀는 무우수無憂樹 나무에 기대어 서서 석가모니를 출산했다고 합니다. 나무에 기대어 아이를 낳고 있는 한 여인을 상상해 보세요. 거칠 것 없는 하늘과 숲을 쓰다듬는 바람의 향기와 어머니 된 한 여인의 땀냄새와 드디어는 쏟아져 대지를 적시는 신선한 양수. 그리고 우렁찬 아이의 울음…. 회백색 병원 천장 아래 결박당한 듯 누워 악다구니 쓰곤 하는, 우리에게 익숙한 출산 문화로는 감지할 수 없는 어떤 성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이 룸비니에는 있습니다. 하여 나는 붓다의 탄생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윽하게 즐거워지곤 하지요.
붓다의 전 생애에 걸쳐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에 환幻처럼 겹쳐지는 나무의 이미지를 나는 사랑합니다. 무우수 나무 아래에서 탄생한 붓다는 신성한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꿈을 꾸고 너무도 인간적인 악몽에서 깨어나지요. 우주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존재의 저 밑편으로부터 떠오르는 나무 아래에서 당신과 나의 꿈꾸기도 거듭 태어나고 거듭 사라집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몽환의 물질성! 이 아득하게 겹쳐진 시공의 틈새를 넘나들며 흔들리는 나뭇잎들! 붓다는 열반에 들 때 그의 육체의 마지막 힘을 다하여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난다야, 히라니아바티 강을 건너 쿠시나가리에 있는 나무숲 ‘살라’에 어서 가자꾸나. 머리는 북쪽으로 두고 두 그루의 살라 나무(사라쌍수) 사이에 나를 눕혀 다오. 오늘밤 나는 완전히 숨을 거둘 것이다.” 죽음의 때를 알고 ‘보잘것없는’ 작은 마을을 택해 ‘보잘것없는’ 어떤 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든 붓다.
존재와 부재의 속성을 동시에 갖는 나무 아래서 그가 맞이한 최후는 거듭되는 최초였으며 명징한 의식으로 가장 나지막히 임한 자의 자연스러운 율동, 일테면 ‘우주를 가로지르는 춤’ 같은 것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 아득하게 평화로워지곤 하지요.
이 우주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세계는 율동이며 모든 생명체는 끊임없는 몸 바꾸기의 과정에 놓인 댄서들인 셈입니다. 개체의 아트만 속에 우주적 호흡이 숨쉬며 동시에 그 역이 성립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역동성.
세계가 비극이라면 그것은 ‘죽음’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인간 스스로 부여한 오만한 의미들과 부질없는 욕망들 때문입니다. 운명이 허락한다면, 당신과 나의 죽음의 순간이 지극한 고요와 평화 속에서 함께 오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만, 조금 더 먼저이거나 조금 더 나중이어도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게 될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나무나 바람이 되고 싶다고 종종 말하곤 하지요. 나는 햇빛을 가득 받으며 흔들리는 아름다운 은사시나무 한 그루를 떠올립니다. 당신이 지금 그리워하는 것은 당신의 미래가 그러하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또 종종 말하곤 하였지요. 당신과 내가 미래로 돌아갈 때, 당신도 나도 다시는 인간의 몸을 받지 않기를 열망하지만, 부족하여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의 인연이 사랑의 힘으로 다시 맺어질 수 있기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가 창 밖 저 나뭇가지들을 환하게 흔들며 지나갑니다. 섬세한 스텝을 밟으며, 공기의 결들을 타고, 마른 나뭇잎 한 장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