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산문을 지나면 세속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법으로 충만한 세계인 법계로 접어들게 된다. 도리천 33천을 오르면 나타나는 세계다. 해인사는 세 번째 산문인 해탈문을 지나면 법계가 전개된다. 해탈문 앞은 넓은 마당으로 트였고, 그 주변으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해탈문 바로 왼편으로는 사운당四雲堂이, 해탈문 앞 마당 오른편인 동쪽으로는 보경당普敬堂이, 왼편인 서쪽으로는 범종각梵鐘閣이 서 있고, 그 뒤로 청화당淸和堂이 축대 위에 자리잡았으며, 해탈문 맞은 편 축대에는 구광루九光樓가 훤칠하게 높이 서 있다.
사운당은 덕 많은 수행자와 신심 깊은 신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든다는 상서로운 의미를 가진 건물이다. 창건 연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4년 현 위치에 옮겨져 중수되어 해인사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보경당은 근래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보경당 자리에는 본래 명월당明月堂이 있었는데, 1982년 사운당 남쪽, 봉황문 서쪽으로 옮겨 우화당雨花堂이란 이름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 명월당 자리에 들어선 보경당은 상층은 큰 불사를 위한 집회장과 법당으로, 하층은 당시에 임시 식당 그리고 후원채 및 행자실로 쓰도록 건축되었다. 지금은 신도님과 종무소 직원들의 숙소로 쓰고 있다. 해인사에서 불교회관이라고 부르는 건물이다. 다른 건물들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지은 보경당은 해인사 건물 배치의 균형을 깨고 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해인사에는 원래 독립된 건물로 지은 종각이 없었다. 근래까지 구광루 윗층 동쪽 첫째 칸에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등 사물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1984년 지금의 자리인 구광루 앞 마당 서쪽에 종루를 새로 지어 범종각이라고 하였다. 청화당은 지형상 해인사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이 곳을 비보裨補하고 북풍을 막기 위해 1984년 축대 위 높은 곳에 새 건물을 짓고 서전西殿이라고 편액을 달았다가 1989년 청화당淸和堂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정미소와 쌀 창고가 있었으나, 청화당을 지으면서 청화당 뒤 가야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곁으로 옮겨졌다.
옛 구광루 전경
구광루는 해탈문을 대하며 마당 건너 맞은 편 축대를 끼고 서 있는 건물이다. 축대를 끼고 서 있어서, 해탈문 앞 마당에서는 2층, 축대 위 정중삼층석탑이 있는 마당에서는 단층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구광루’는 사찰 이름 ‘해인사’, 법당 이름 ‘대적광전’과 함께 해인사가 《화엄경》을 소의 경전으로 해서 창건된 사찰임을 말해준다. 해인사 창건의 참뜻은 ‘해인’ 두 글자에 응집되어 있다. ‘해인’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비롯된 것임은 이미 잘 알려져 있고, ‘대적광전’은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주전 건물에 부치는 전각 이름이다.
현 구광루 전경
건물 이름 ‘구광루’는 불교 이외의 사상에 연유하였다고 설명하여, 도교의 “아름답고 빛난다”는 뜻을 나타내는 ‘구광九光’, 그리고 고문헌에 나오는 “구종九種 광채의 휘황찬란함”을 가리키는 뜻의 ‘구광’과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구광루’에는 《화엄경》과 관련된 뜻이 분명히 담겨 있다. 《화엄경》에는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보광법당普光法堂을 비롯하여 일곱 곳에서 아홉 번(七處九會) 설법하시고 중생을 교화하셨다고 한다. 매번 설법하실 때마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모든 중생들에게 두루 그 빛이 비치라고 백호白毫에서 광명을 내어 중생들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한 다음 기쁜 마음으로 설법하셨다고 한다.
‘구광루’라는 건물 이름은 부처님께서 아홉 번 빛을 낸 사실에 연유하였다. 따라서, 구광루는 해인사가 화엄 사찰임을 보여 주는 건물이다. 사찰 창건의 소의 경전인 《화엄경》과 깊은 관계를 가진 연유로 화엄 사찰인 해인사는 가람 한가운데에 자리한 건물에 ‘구광’ 두 글자가 들어가게 이름을 지어 부처님의 빛과 말씀이 사방으로 퍼지는 뜻을 담게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구광루 건물이 정면 7칸인 것은 7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인지 모른다.
우리 나라의 많은 사찰에는 해인사의 구광루와 같이 산문을 지나 법당으로 나가기 전에 경사진 곳에 누각이 자리잡고 있다. 법당 앞에 누각 건물이 위치하는 것은 우리나라 불교건축사에서 건물들의 가람내 위치와 기능이 변화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후 상당한 기간 동안 법당에는 노전 스님을 비롯하여 큰스님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법당과 마주 보는 곳에 누각을 짓고 이 누각에는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승도들이 모여 법당을 향해 예불하고 큰스님의 설법을 듣는 곳으로 삼았다. 이 누각은 사찰에 따라 보제루, 만세루 등으로 불린다. 보제루, 만세루는 두루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가지기 때문에 누각 이름에 많이 쓰였다. 해인사의 ‘구광루’는 부처님께서 광명을 내고 《화엄경》을 설법하시며 두루 중생들을 구제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으므로, 화엄 사찰의 법당 앞에 위치한 누각 이름으로는 제격이다.
우리 나라 사찰들의 누각은 시대가 흐르면서 일반 대중들까지 법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됨에 따라 법당 규모가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그렇게 되자 누각은 법당을 향해 예배를 드리는 본래의 기능에서 떠나 다른 용도로 바뀐다. 멀리 있는 자연 경관을 산사로 끌어들이는 소임을 하는 건물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자연을 배경으로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기능을 가진 누각은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문과 벽이 없이 지은 다락집이지만, 사찰에 따라서는 벽을 둘러 실室로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누각은 자연히 종과 북을 달아 종루와 고루의 역할을 하기에도 좋았고, 두루마리로 된 경經이나 책 형태의 경전을 보관하기에도 좋았다.
구광루 기둥에 걸린 주련에도 구광루가 그러한 역할을 한 건물임을 보여준다. “육근이 단지 삼공계를 지키기만 하면(六根但守三空戒), 두 눈으로 벌써 칠조등을 얻는 것을(雙眼曾得七祖燈). 보찰의 누대는 팔면으로 통하고(寶刹樓臺八面通), 주림 운수는 천산과 어울리도다(珠林雲樹千山合). 맑은 경치는 항상 송령월을 열고(淸景常開松嶺月), 향기 나는 샘물은 시시로 석문을 쳐서 바람을 일으키네(香泉時擊石門風). 옥호에는 세간의 티끌이 닿지 않아서(玉毫不着世間塵), 일황 금륜으로 불광이 용솟음친다(日晃金輪湧佛光).(번역은 해인사 내부자료를 참고하였음.)”는 시구가 바로 그러하다. 구광루에 올라 해인사와 그 주변의 경관을 상찬하는 이 시를 통해 구광루가 어떤 성격을 가진 건물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구광루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1490년 성종 연간 인수仁粹, 인혜仁惠 두 분 왕대비의 후원으로 학조學祖 대사가 해인사를 확장, 중창할 때 지은 원음루圓音樓가 구광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해인사의 확장, 중창은 해인사의 건축역사상 획을 긋는 큰 불사였다. 그것은 해인사의 면목을 일신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해인사 가람 배치의 틀이 이 때에 이루어지게 한 중창이었다. 이 때 팔만대장경을 봉안하는 판전 건물도 지금과 같은 규모와 건축형식으로 건립되었다.
구광루는 1817년(순조 17) 화재를 만나 소실되었다가, 1824년(순조 24) 순찰사 김이재(金履載, 1767-1847)의 주선으로 중건되었다. 그 뒤 퇴락한 것을 1949년에 당시 주지 금봉錦峰 화상이 중수하였고, 1967년부터는 사중 보물을 보관하는 보장전寶藏殿으로 사용하며 현재까지 이르던 것을, 1993년 기존의 구광루를 헐고 지금의 건물로 지었다. 이 때 구광루 아래 마당 서쪽에 범종각을 새로 지었고, 새로 지은 구광루는 불교관련 자료의 전시장 등으로 사용하도록 공간을 넓혔다.
그런데, 구광루 개축은 우리나라 기존 불교사찰 건물을 어떻게 보전하고 중수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가르침을 던져 주었다. 조선시대 영조 때 화가 김윤겸金允謙이 그린 해인사 전도에는 구광루 건물 동쪽 한쪽에서 앞으로 덧대어 진입부를 구성한 누각이 서 있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비록 이 그림에 보인 구광루는 1817년 화재 때 불타버렸지만 구광루의 기본적인 건축의 틀과 건축형식은 그 후 중건한 건물에 이어졌다.
김윤겸의 그림에는 구광루 동쪽에서 두 번째 칸에 진입부가 묘사되어 있다. 1993년 헐리기 전 구광루 역시 구광루 동쪽에서 두 번째 아래 칸을 틔워서 그 속을 지나 정중삼층석탑이 있는 마당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1817년 화재 전의 건물과 그 후 중건한 건물은 비록 건물형식은 다르지만 대적광전 앞 마당으로 통하는 기본 진입형식은 그대로 지켜졌다. 그렇게 한 것은 그만큼 구광루 건물 아래를 통하여 법당 앞 마당으로 진입하는 방식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진입축은 일주문에서 시작하여 구광루를 지나 대적광전에 이르고, 다시 그 뒤 판전에 이르는, 사찰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축이다.
구광루 아래에 난 통로를 지나 구광루 뒤 정중삼층석탑이 있는 마당으로 올라서면, 마치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자마자 새로운 세계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듯 그러한 극적인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정중삼층석탑이 대적광전 앞 마당 한가운데에 위치하지 않고 동쪽으로 약간 옮겨져 조영된 것도 구광루의 한가운데가 아닌 동쪽 둘째 칸에 난 통로와 상응하기 위해 그렇게 배치된 것이다. 그만큼 이 통로는 해인사의 사격寺格을 말해주는 중요한 진입축이다. 헐리기 전 구광루는 이 통로로 해인사 가람의 특성을 크게 돋보이게 하였다. 대적광전이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서, 해인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의 열락과 법계의 장엄함을 보여주며 해인사 가람의 중심영역을 구성토록 하였다.
새로 지은 구광루 건물은 얼른 보면 옛 구광루와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건축 구조에서 크게 바뀐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로 지은 현재의 구광루에는 옛 구광루의 진입공간 형식이 지켜지지 않았다. 구광루 밑을 통해 대적광전 앞으로 나가는 통로는 사라졌고, 그 대신 구광루 건물 밖 양쪽으로만 낸 계단으로 사람들이 오르내리도록 바뀌었다. 이로 인하여 해인사 가람 전체의 중심축이 갖는 의미와 상징성은 반감하였다. 신축한 구광루는 사상과 삶을 반영하고 담는 그릇인 건축이 어떻게 보전되어야 하는가를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보듬게 하였다.
사찰 전각의 처마 아래에 감도는 바랜 단청 빛깔, 기둥과 창살의 정갈한 나뭇결은 사람들에게 불심을 일으키게 한다. 거기에는 그렇게 지어진 건물 이면에 내재하며 작용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 들어선 구광루는 비록 해인사 가람배치의 특성을 크게 잃게 하였지만, 창건 이후 설정한 가람배치의 기본틀이 워낙 튼튼하기 때문에 지금도 해인사는 새로 이루어진 불사의 벗어남을 받아들이며 그것을 고요하게 잠재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구광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다른 사찰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옛 고승들이 일구어낸 가람의 향기도 지키고, 오늘날 승도들의 수행과 예불에 필요한 도량의 공간을 제대로 가꾸고 만드는 지혜를 모으는 일이 현대 사찰이 안고 있는 과제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