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타종교 비판 이유
과거의 무절제한 타 종교 습합을 반성하기 위하여 불교도는 타 종교 비판의 이유를 알아야 한다.
흔히 불교인들은 타 종교에 대한 비판을 순화되지 않은 야박한 인심의 현상으로 간단히 매도해 버리고 타 종교를 인정하는 것을 이웃과 우애좋게 지내는 집안을 보듯이 단순하게 좋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이 단순한 한담거리라면 여러 다른 종교와 그것들의 서로 다른 특이한 형태들이 오히려 대화의 내용을 풍부하게 한다는 점에서 좋다하겠지만, 종교란 사회 생활에 그 사상을 반영하고 삶의 양태와 그 내용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건강을 약속하는 약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는 부작용이 있거나 또는 건강을 망치는 불량품도 있기 때문에 좋은 약을 선별해야 하는 것과 같다. 부작용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극복, 발전케해야 하며 건강에 도움은 커녕 해로울 뿐이라면 마땅히 색출하여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당시의 인도 신본주의를 부정한 것은 그것이 사성차별이라는 신분계급주의를 합리화시키는 종교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그 종교는 하층 계급에게는 하나의 질곡이었다. 창조주 브라만 신의 머리에서는 바라문 계급이 태어나서 존귀함을 받고, 신의 어깨에서는 무사와 정치인이, 배에서는 상인들이, 그리고 발에서는 평생 위의 세 계급의 시중을 들며 노동하는 천민인 노예 계급 수드라가 각각 태어난다 하여, 이들 각 계급은 상부 계급을 위하여 또 상부 계급은 하부 계급을 압박하며 살아가는 착취 구조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질곡에서 민중들을 해탈시키기 위하여 부처님은 브라만 신본주의를 부정하였다.
다른 종교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이다. 92종 사견 외도들을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부처님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질투하는 신과 같은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사견(邪見)은 결국 잘못된 인생관을 낳고 그것은 다시 불행의 과보를 잉태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 와 이지적인 교설인 12연기의 주제가 “고통의 소멸”이며 그 수행 방법인 팔정도(八正道)의 첫째가 정견(正見) 인 것은 올바른 견해가 인생고를 극복하는 만행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타종교의 문제점은 물론이요 불교 내의 왜곡된 견해에 대한 비판은 인류 구원이란 입장에서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대승불교의 잘못된 타 종교 대응 역사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대승 교리 자체가 비판력이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번뇌 즉 보리’ 라는 교리의 강조는, 그 진의의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사견에 대한 비판력을 잃게 만들 우려가 있다. 또 평화와 포용 정신의 강조로서 합리화하지만, 불의와 공존이 자비 평화일 수는 없으며 불교 흥왕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점에서 선교 방편도 되지 못했다. 불교가 과거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오직 정법(正法)에의 확신으로 온갖 방편을 다하여 광선 유포하는 길 밖에는 없다.
타 종교 긍정론자들의 흔한 이론이 전쟁 방지론이다. 그러나 물리적 전쟁이 아니라도 비폭력 저항이나 사상투쟁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교도가 그 탄합을 철회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지 불교도가 그 저항을 둔화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교학계에서 인도 아쇼카왕의 종교 공존 정책을 자랑하지만 이도 잘못된 생각이다. 타 종교를 탄압하지는 않더라도 정치 권력의 방편으로 전 인도를 불교화했어야 했다. 그러한 아쇼카왕의 미약한 노력은 인도 불교가 사라지게 된 하나의 먼 원인이 되었다. 그것은 곧 신분계급주의를 철폐하려 했던 불교의 패배였던 것이다.
4.세계평화의 사명
불교도는 과거의 종교 대화 실패의 쓰디쓴 교훈을 반성하면서 넓은 시각으로 불교와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불교는 종교적이며 철학적이고 역사적이다. 불·법·승佛法僧) 삼보에의 귀의 의미가 그러한 것이다. 불보는 종교성이고, 법보는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의 가르침이므로 승보는 철학적이며, 사부 대중이 보살도로써 사회를 정화하여 정토를 구현하므로 역사적이다. 현대 과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아인쉬타인(Einstein) 박사도 ‘불교는 종교 중의 종교요, 철학중의 철학이요, 과학중의 과학이다’라고 격찬했다.
현대 세계는 뚜렷이 두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신본주의인 기독교 문화권과 회교 문화권, 그리고 유물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 그룹의 양대 세력이 서로 세력 확보에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현실이다. 이 양대 세력은 유신론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그룹과 무신론적 유물론을 숭상하는 공산주의로 표현할 수도 있다.(기독교가 자본주의 발달에 끼친 영향은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의해 주창되었다.)
사회적 입장을 제한다면, 불교는 분명 유신론이면서도 무신론인 이중 구조로서, 신본적인 타력도(他力道) 와 철학적이며 인본적인 자력도(自力道) 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서로 화해가 불가능한 두 집단을 교화하여 능동적으로 평화를 주도할 수 있는 단체는 불교인 것이다. 불교는 풍부한 철학과 교리로 모든 종교와 철학을 회통하여 일미법(一味法)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종교 대화의 주체 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의 참모습에 대한 통일된 정확한 견해를 사부 대중에게 교육시켜야 한다. 이는 종교 대화에 관심을 갖기 전에 해결해야할 선결 과제이다. 만일 그러지 않으면 이제까지 불교에 대한 이해조차 부족한 불교도들이 종교 대화에 잘못된 방식으로 대응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예수가 불교를 배워간 숨겨진 사실이 드러나서 교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또 선전되고 있다. ‘예수는 충실한 불교 고승이었다’라는 제목으로 선전되고 있다. 이것은 긍정적인 면도 갖지만, 예수가 불교의 ‘정통 계승자로 호도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이와 같은 경우는 결국 불교도에게 타 종교 신앙 권장으로 곡해되고 불교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타종교인이 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자신의 종교도 모르면서 어떻게 종교 대화에 나서겠는기.
무신론 철학과 기독교와 회교, 이 셋은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집단이다. 회교와 기독교와의 관계에서도, 회교는 기독교의 예수를 분명히 부정하였다. 그런데 불교도가 기독교 편에 서서 회교를 간접적으로 공격한다면 이는 커다란 문제가 된다. 진실한 사랑은 결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 손상받지 않으면서 통일되는 길은 불교의 방식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철학성의 빈약과 그밖의 여러 문제점 때문에 유물론과의 문제도그렇고 타종교와의 대화에 그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교의 기독교 유화 정책을 역이용하여 전 세계를 기독교화하려는 데에 최대의 기량을 다할 것이다.
종교 대화에 임하여 불교도는 이천오백년 불교를 결산하는 참으로 중대한 역사적 시정에 처하여 있다. 곧,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추진해야하는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무분별한 습합의 과오를 또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과거를 비판함은 물론이요 현재의 지나친 대화 낙관론도 철두철미하게 경계해야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불교의 최대 장점인 통일력으로써 세계사상의 모든 대립을 해소시키고 나아가 전 세계를 불교화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용이주도하게 추진되어야만 한다. 이제까지는 대화낙관론으로 불교도의 권리와 책임을 타 종교에 양도해 버리는 자멸적인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첫번째의 작업에 상당한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불교에 대한 특수성이나 우월성에 대한 인식이 없는 채로 타 종교를 인정함은 결국 지배와 종속당함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마치 인솔할 의욕이나 힘이 없는 술 취한 사람이나 어린아이가 악인과 손을 잡으면 도리어 그에게 끌려가고 마는 경우와 같다.
불교가 종교 대화에 성공적으로 처신한다면 세계 평화를 성취하고 온 인류를 구원하게 되지만, 경솔히 처신하여 실패한다면 기독교의 이용물이 되어 소위 인류 복음화의 충실한 노예로서 그 공과마저 빼앗겨 과거 역사에서처럼 타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 눈물흘리는, 비극이면서 희극이기까지 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는 결국 모두에게 중대한 과오를 범하는 것이 되며 이 땅은 분열과 전쟁이 그칠 새없는 저주받은 유형지가 될 것이다.
불교도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여러 난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여 세계를 평정하고 평화를 성취하여야 한다. 그것은 곧 한국불교도가 남북의 대결을 평화통일로 이끄는 주체 세력이 되어야 함을 깨달아 그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필연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