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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젯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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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문리 일기 - 현진 1991년 12월 118호
결젯날 아침에 얼음이 얼었다. 이상하게도 겨울 안거가 시작되는 날은 늘 춥다.;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는 동안거冬安居라는 얘기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닌 듯싶다. 그만큼 추워야 공부가 잘 된다는 뜻일 게다. 그냥 손을 담그기엔 수각水閣의 물이 이젠 너무 차갑다. 겨울 안거 기분이 비로소 느껴진다. 새로 털신까지 신으니 더욱 그렇다. 또 안거 한철을 산중에서 나게 되었다. 더군다나 대중처소에서 지낸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좋다. 역시 천연수림이 자라는 산중은 수행자의 영원한 적정처寂靜處. 해제철엔 다른 때보다 행각行脚을 많이 돌았다. 마땅히 행장을 풀 곳이 없을 땐 우리 산중의 풋풋한 소식이 그리워지곤 했다. 정말이지 내가 사는 숲으로 돌아오면 무엇보다 숨통이 확 트이는 듯하다. 혼탁해진 의식이 새롭게 열리고 시들하던 마음도 금새 환해져 온다.
산중은 수행자로 말미암아 새롭게 깨어나고 수행자는 산중이 있으므로 더욱 빛을 발한다. 또 언제든지 산중에 돌아와 출가본분사出家本分事을 점검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수행자에겐 더 없는 정복淨福임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

시끄러운 가운데 힘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고요한 가운데 공부 짓지 않음과 마찬가지이다.

대혜종고大慧宗  스님의 서장誓狀속에서 만난 글이다. 정처와 요처에 끄달리지 않고 여여如如하게 화두를 들 수 있어야 잘 익은 공부라는 말씀이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법랍이 쌓인 구참久參들도 요처에서 하는 역경逆境 공부하는 성글게 마련이라는데 우리 같은 풋내기 수행자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아무래도 산중의 한처閑處가 힘을 얻기에는 좋다. 경을 보는 일도 마찬가지. 고요한 새멱에 소리내어 독송하면 그 뜻이 확연히 다가오고 창음唱音도 훨씬 맑아진다. 아직은 순경順境에서 공부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결제 법문을 들으면서.
해제철 느슨하게 놓았던 살림살이를 짬지게 챙겨보리라 마음 먹었다. 궁현당 큰방이 비좁을 정도로 대중이 모였다. 아랫절 비구니 스님네도 큰절에서 법문을 듣는다. 이렇게 눈빛이 형형한 스님네를 보면 절로 신심이 난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낯선 스님네가 산중에 모이기 때문에 철마다 공부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결젯날은 기분이 늘 새롭다. 강당엔 사미沙彌 스님들이 새로 공부를 하고 어제 사시 공양巳時供養을 끝낸 뒤, 榜발표를 마쳤다. 이로서 그들은 대중의 일원으로 소임을 보게 외었다. 아직은 얼굴이 많이 낯설다. 막 수계受戒한 태가 그대로 묻어나는 스님도 있다.
걷어 부친 팔뚝에 연비 자국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 알까
세면장에서 보았다. 몸도 무척 굳어 있다. 수행자의 위의가 몸에 배일 때까지 몇 번의 습의를 거쳐야 할 게다.
이제 그들은 대중 생활을 하면서 ‘인욕과 하심下心을 차츰 배우게 될 것이고, 그리고 대중실이가 중노릇에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하나둘씩 경험하게 되리라본다. 보통 대중 처소에선 괴각乖角질만 하지 않으면 크게 미움받을일 일이 없다. 대중의 공부를 방해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괴각은 오래 살지 못한다. 금새 대중의 눈밖에 나 공사 公事를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생괴각처중무익 一生乖角處購廳無益이라 했다. 그래도 용사 龍渣가 섞이어 산다는 절집안이다. 감화를 주는 좋은 스승들이 많다. 수행 잘하는 이가 몇 명만 있어도 한철 공부는 그저하는 셈이다. 먼저 정진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도반을 잘 만나야 공부에 힘이 덜 든다.
사실 좋은 도반을 가지는 일만큼 귀한 인연이 또 있을까.
두고두고 보이지 않는 힘이 곧 만연 伴緣이 아닐까 싶다.
결젯날이 도반이 보이질 않으니 여간 서운한 게 아니다. 이런 날 도반의 자리는 더욱 커진다. 모두들 다른 처소에서 한철을 보내게 되는 우리 도반들.
그간 대교 大敎의 이력을 마치고 각자 운수객이 되었기 때문이다. 같이 얼굴을 맞대고 살 적엔 때로는 귀찮게 여겨지건 도반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우리가 살던 적묵당 큰방을 지날 때면 갑론 을박하던 도반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떨어진 장미꽃 한 잎을 내 책갈피에 넣어 주며 젊은 수행자의 눈물이라고 읊조리던 도반의 그 낭만과 넉넉함을 이제 어느 회상 會上재회할 수 있을런지.
벌써부터 아련해진다. 강원 도반은 평생 반려 伴侶라고들 말한다. 선방은 한철이지만 강원은 몇 해를 한솥밥을 먹고 살기 때문에 인간적인 정이 더 짙다. 더군다나 한참 중노릇을 익히던 시절의 인연이라서 더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석달 한철을 착실히 보내고 좀 더 맑아진 도반의 눈빛을 보고 싶다.
이번 철은 다른 때보다 잘 지어내야지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매번 이런 결심을 하곤 한다.
같은 날이지만 결제 땐 마음이 영 달라진다.
해제, 결제를 가리지 말고 정진하라지만 그래도 결제철이 공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간 밖으로만 치닫던 눈을 안으로 돌리는 시간, 겨울 안거는 그래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