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실속 있고 돈줄 될 것이 고추가 그 중 나아보였다. 다른 작물은 조연배우나 행인 1·2처럼 적당히 구색 갖추고 고추를 주력 농사로 선택하였다. 밭은 갈아놨건만 거름이 있나 방법은 알기나 하나 고추에 대한 열망 하나만으로 맹목적인 사명감까지 느끼며 덤벼들었던 용기는 지금 생각해도 의문이다.
동네 내려가 가장 먼저 안면 튼 집에서 쓰고 남은 퇴비를 두어 자루 얻어오긴 했으나 큰 밭에 기별도 안 갔다. 다른 데는 이미 이식을 마친 한참 뒤나 끝물에 구한 모종도 오종종했다. 서글펐지만 잘 키우면 결과는 좋겠지라는 마음에 나머지는 격식 갖춰 진행했다. 놉도 두 명이나 얻고 성스러운 제전의식처럼 정성껏 모종을 부치고, 누구네는 작년에 얼마를 땄다더라는 설에 맞춰 우리도 그 수준으로 목표를 세워놓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고추는 무럭무럭 자라주면 좋을 텐데 그러질 않았다. 애가 타는 사람은 ㅅ보살만은 아니다. 여기서 안보니 낫긴 한데 오르내리며 동네 누구네 잘 지어진 고추밭과 꼭 비교하며 기를 죽였다. “왜 뉘집 고추는 끄어멓게 잘 됐는디 우리 것은 앙당하다냐.”고 맨날 성화다. 우리는 늦게 시작했고 그만큼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커지고, 본래 남의 고추가 커보이는 거라고 아무리 말해도 먹혀들지가 않는다. 그래도 정보를 얻어서 약이랑 비료를 부지런히 사날랐다. 항상 한 박자씩 늦었지만.
고추가 조금씩 열렸다. 알량한 고추도 사람들은 탐을 낸다. 오는 사람마다 따가고 그 때마다 승록이는 뾰루퉁해졌다. 어린 마음에도 수확량이 정해졌는데, 저러다 제 문자로 한 근도 안 남겠다고 난리였던가 보다. 익는대로 따 말렸다. 그 해엔 비만큼이나 왔지. 고추만 따면 비가 왔다. 마을에 건조기가 있다고 다들 친절히 일러 주었다. 그럴수록 군방귀도 안 뀌었다. 장에 내다 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럴까. 난 당신들과 달라라며 속으로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모셔 놓고 의기양양했다. 설마 했던거지. 설상가상, 고추 서너 번 땄는데 태풍에 다 쓰러졌다. 그냥 놔두라는 걸 일으켜 세우고 비료도 넉넉히 주었다. 식물이라도 일생을 그렇게 마치면 불쌍할 것 같아서였다.
가을로 접어들던 어느날, 화장실에 앉아 고추밭을 내려다 보니 뭐가 허옇게 덮여 있었다. 미친 것들. 뒤늦게야 거름발을 받고 꽃이 만발했다. 풋고추 인심 좀 썼다.
그 해 고추 총수확량은 모다해서 네 근. 그 때부터 건조기에 말려온다. 모셔 놓은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 그런거지 뭐. 그래도 썩는 것보담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