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이 되면 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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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7년 06월 184호
관세음보살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보살이다. 한국은 물론 대승불교권의 여러 나라에서 관세음보살이 어느 불, 보살보다 많이 신앙되고 있는 이유는 관세음보살을 신양하면 확실한 영험과 불가사의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이 어떤 보살인지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은것 같지 않다.
관세음보살에 대해 설하는 것이 「관음경」이다. 「관음경」은 「법희경」 곧 「묘법연화경」의 일부로서, 제25장의 ‘관세음보살보문품’ 이 바로 이 「관음경」에 해당한다. 관세음보살은 본디 ‘정법여래’ 라는 경지가 매우 높은 부처님이었다. 그러나 높은 경지의 부처님으로는 낮은 단계의 중생을 구제할 수 없으므로 일부러 보살이 되어 일체중생의 구제에 나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관세음보살이라는 하화중생下化樂生으로만 사는 보살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은 그 용모가 매우 아름답다. 그래서인지 관세음보살을 여성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관세음보살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 언제나 모든 사람을 구제해 주는 자비의 화신이기 때문에 남성이든 여성이든 필요에 따라 갖가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관세음보살의 참다운 모습이다. ‘관세음’ 이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세음世音을 관觀한다’ 라는 뜻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괴로운 소리, 다시 말하면 인간뿐아니라 지옥을 비롯하여 모든 세계 고통의 소리를 다들어 준다는 의미이다.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관자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세상의 고통받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관자재라 한다.
「관음경」을 보면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모든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보살로서 삼십삼신身으로 응현하며, 일심으로 그 명호를 외우면 화난火難이나 수난水難 등 일곱가지 재난은 물론 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준다고 되어 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다면 관세음보살은 어떤 때 나타나는 것일까?
당나라 때 본정 선사라는 분이 있었다. 어느날 제자가 ‘어떻게 하면 관세음보살을 볼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처處하는 곳마다 무심이 되면 비로소 관세음보살을 볼수 있다’고 한다. 어떤 대상이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무심으로 응하면 곧 관세음보살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무심이란 어디에도 자신의 마음이 머물지 않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집착하면 그것에 구속되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씨름 경기를 할 때 상대의 어디를 공격해야 할까 생각하면 이미 무심이 아니다. 상대의 어디에도 틈이 있다고 생각한 순간 유심이 된다. 상대의 어디에도 자신의 마음이 머물지 않을 때, 이기거나 진다고 하는 것에도 머물지 않을 때 비로소 무심이 다. 무심은 멍하게 생각이 없는 상태와는 정반대이다. 천지를 껴안는 기력이 온천지에 충만해 온몸이 살아있는 모습, 이 때가 무심의 경지다. 무심의 사람은 일체의 경지를 포용한다. 이 무심의 당체 그 자체를 관음이라 부른다. 따라서 관음은 각 개개인의 당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은 무심이 되어 일심으로 칭명할 때 비로소 응현한다. 일심이 된다는 것은 관세음보살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 중국에 한 장군이 있었다. 그는 활을 잘 쏘는 명사수였다. 어느 날 혼자서 산속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도중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으르릉 거리며 달려들 기세로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장군은 결코 호랑이 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오로지 일심으로 활을 당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활을 호랑이의 미간에 적중했는데 호랑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명사수의 활이라 하더라도 화살 하나로 이렇게 멋지게 사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가까이 가 보았다. 그랬더니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 모양을 한 큰 바위였다. 화실이 호랑이의 미간이라 생각되는 곳에 명중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놀랐다. 이에 장군은 ‘내 활 쏘는 솜씨는 천하 제일이다. 내 화살이 바위도 뚫는 힘이 있다는 것에 정말 놀랐다’ 고 중얼거리며, 더욱 자신을 가지고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 다시 한번 시도해 보았다. 화살은 활을 떠나 쀼웅 소리를 내며 날아갔지만 이번에는 무슨 이유인지 맞지 않았다.”
이것은 처음에는 오로지 일심이 되어 호랑이와 화살과 내가 삼위일체가 되었기 때문에 바위까지도 관통했지만, 다음에는 시범으로 활을 쏘았기 때문에 잡념이 섞여 활이 빗나가버린 것이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목숨을 걸고 일심으로 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영험이나 이익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오로지 일심으로 목숨을 걸고하면 반드시 영험이 었다.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신앙하여 관세음보살과 내가 완전히 일체가 되었을 때, 세계의 힘은 모두 여기에 집중되기 때문에 그 힘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어 천지도 감동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르로 관음의 력(관智力)을 얻게 되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는 것도 쉽다고 한다.
「관음경」의 목적은 한마디로, 누구라도 관세음보살이 되는 방법을 설하는 데 있다. 관세음보살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일심으로 청명하면 눈 앞에 나타난다. 이것은 갖가지 번뇌로 흩어져 있는 우리의 마음이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움으로써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어지러운 마음이 점점 안정되어 편안함을 얻게 됨으로서 마음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외우면 삶에 대한 용기가 생겨나고, 분노로 격한 마음은 자비심으로 전환한다. 이 때의 나 자신을 관세음보살이라 한다. 그래서 「관음경」에서는 “생각 생각 의심치 말라. 관세음인 거룩한 성자가 온갖 고뇌와 죽을 액 가운데 의지가 되어 주고 구세주가 되어 줄 것이다” 하였다. 의심이란 뭐가 뭔지 모를 때 생긴다. 관음사상이 손에 잡힐 듯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섣불리 의심해서는 안된다. 누누이 말하지만 불교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이기 때문에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인體認하는 것이다. 몸으로 체인하기도 전에 미리 의심부터 한다면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멀어질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영험은 자신의 신앙의 힘에 따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믿음이 진정으로 관세음보살과 하나가 되어 관세음보살과 완전히 같은 마음이 되고 관세음보살과 같은 행동을 할때 비로소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