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不二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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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목정배
1997년 06월 184호
유마거사는 방에 없었다. 내가 마음먹고 유마거사를 찾아나선 것은 초파일 전날 새벽이었다. 비가 막 그치고 뿌면 새벽 안개가 바람에 날려가는 것이 시원스러워 보였다. 그토록 맑고 싱그러운 첫새벽에 나선 것을 참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마침 새벽 예불을 마치고 난뒤라 마음도 맑았다. 안개비가 간혹 머리카락에 떨어지기도 하였으나 비 맞는다는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자하紫霞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환상에 젖어 들었다. 불국사에 오르는 문 하나가 자하문인지라 불국佛國에 가까이 간다는 희망을 안고 새벽 안개속을 나섰는데 웬일인지 유마거사는 방을 비우고 없었다. 그 빈방에 지욱한 향연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아마 향불을 살라 놓고 유마거사는 샘물이라도 길으러 갔나 보다. 처마 밑에서 한동안 기다리기로 하였다.
유마거사를 뵙고 한말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었다. 사실 물어 보나 마나한 문제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어쩐지 묻고 싶었다. 세상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물어 보나 마나 한 것이다. 인간이 부질 없는 망상과 욕망에 따라 저지르고 있는 일들을 놓고 그것을 혁파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느냐고 묻는것은 뻔한 일이다. 제 스스로 고쳐 갈수 있는 능력을 본래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묻는다는 것은 어디에 비겨 보려는 앙징스런 욕망인 것이다.
오계五械를 범하는 일들, 자찬훼타自護毁他의 사건들이 날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오계를 범하면서도 나는 한 계도 파계하지 아니하였다고 항변하고 변명하는 걸까. 자기만 깨끗하고 다른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괴물이라고 악람하는 것은 아집의 소행이 아닌가. 이런 것 저런 것을 물어 보려고 여기에 왔다. 그러나 유마의 방은 비어 있었다. 문이 개방되어 있되 진정 유마거사는 부재중이다. 부재중이 더 좋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부재가 곧 해답이지 싶었다. 현상이 있음에 만족하는 인간에게 현상 없음이 바로 청정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까지 미치려면 마음의 묘용妙用에 대하여 먼저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마거사와 사리불 사이에 오간 대화 한토막은 퍽 소중하다.
사리불이 어디를 갔다 오던 길이었다. 유마거사가 그를 불러세워 물었다.
“사리불이여,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네, 조용한 아란야에서 선정을 닦고 오는 중입니다.”
“그래요. 선정을 닦는 곳이 따로 있습니까? 선정을 닦는 곳을 따로이 정해 놓는 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요. 보시가 도량이요, 인욕이 도량이요, 무량심이 바로 도량인데 선정의 도량을 별도로 찾아다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명료하고 정확한 말씀인가. 우리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볼일이다.
이 곳은 이러한 환경이기 때문에 공부하는 곳이 될 수 없고, 저 곳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에 선정에 들수없다는 식으로 분별 의식을 드러낸다면, 어디 한 곳 마땅한 곳이 있을수 없다. 시처즉처是處郞處가 되어야 한다. 이것저것 분별지으면서 망상에 합당한 일만 고루지 말고 한마음을 바르게 부딪치게 하여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은 다만 아집의 덩어리로 변별하는 것일 뿐이지, 근원적이고 본질적으로 달관투시하는 것이 아니다. 망상에 따른 분별심으로 고루는 것은 망상의 세계에 한층 더 들어서는 지옥의 계단을 선택하는 것이다. 무명無明한 눈으로 암흑을 헤매는 것은 은산철벽을 한나는 우행이 아닌가.
우리는 날마다 무명망상으로 암흑의 굴속을 방황하고 있다. 눈의 무명, 귀의 무명, 코의 무명, 아니 육근 모두가 무명체가 되어 암혹의 천지를 굴러다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와도 칠흑의 벽에 부딪치고 저기에 가도 암담한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희망이란 광명이 있을 수 없다. 무명을 광명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하여야 한다. 분별의 바다에서 헤쳐나오는 힘을 길러야 한다.
처마 밑에서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시간이 꽤 흘러갔다는 것밖에. 그러는 사이에 내가 기다리고 있는지 그냥 있는지 그것마저 다 잊어버리고 있었다. 새벽이 조금 밝아오고 있었다. 저 멀리 산 아래로 안개구름이 붉으스레하게 물들어가는 것이 눈 속으로 들어왔다. 아마 해가 솟아오르는가 보다. 햇빛에 안개구름에 반사되는가 보다. 암흑에는 반사되는 것이 없다. 저 맑고 청순한 안개구름에는 빛이 투과하는 것이 아닐까, 두터운 용심에는 빛이 반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이상한 의심이 들었다. 칙칙하고 음침한 것은 흐린(獨) 것이다. 탁수를 마신다는 것은 쉽지 않다. 청수를 마음 놓고 마시고 싶은 충동이 나는 것은 청정이 바로 향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유마거사가 물을 길어오지 아니 하여도 좋다. 나는 유마의 빈방 향연이 ‘곧게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의 마음이 되어, 한동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몰랐다. 적멸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흐름, 사물의 변이, 현상의 생멸,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한 변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껏 이러한 적멸의 묘미를 느껴 본 시간이 없다. 느껴 본다는 생각마저 멈춰 버린시간에 내가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적멸의 깊이가 깊어갈수록 불현듯 유마거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는 유마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유마의 모습이 분명하였다. 왜 한번도 보지 못한 모습인데도 나는 저 모습이 유마의 참모습이라고 단정하는 고집을 부리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유마의 본 이름을 새기면 무구칭無垢稱이기 때문이다. 때 없음 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때 없음’ 이란 무엇인가. 번뇌가 없고 분별이 없음이다. 우리는 번뇌와 분별로써 일상을 살고 있지만, 유마는 이 번뇌와 분별이 없는 마음을 항심으로 삼아 생활하던 수행자이자 생활자가 아니던가. 수행과 생활을 가리지 아니한 불이不二로 깨친 그순간 현현한 모습이 바로 유마거사이시다.
무엇을 제 것이라고 하고 제 자신이라고 하는가. 욕망과 분별을 제 자신으로 생각하면 망집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마음과 망상을 이분법으로 분화시키는 인간에게, 유마는 불이의 논리를 깨우쳐 주고있다.
저 바위 아래로부터 물 흐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래도 유마거사는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처마밑에 아침 햇살이 밝게 비춰오고 방안도 밝아지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간모양이다. 새벽 길을 나서며 유마에게 묻고자했던 마음도 모두 사라졌다. 마냥 서 있던 시간이 좋았다. 아마 적멸이었을 것이다. 유마는 적멸과 분별이 불이不二라고 일러주는 조용한 미소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