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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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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1년 12월 118호
용성 대선사(하)

용정 선사께서 전생애에 걸쳐서 그렇게 간곡하게 전개해 갔던 대각교의 사상적인 지반은 무엇이며 또한 대각교 운동의 방향과 성과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스님의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에 따르면 부처와 참된 마음(眞心)과 개아個我를 일체로 파악하는 한편, 참된 마음에 말미암아서 천지 만법이 창조되며 천지 만물과 더불어 개아는 동근 동체同根同體일 뿐만 아니라, 이는 곧 일진 광명체一眞光明體로 유심唯心이라고 설파하셨다.
여기에서 일진광명체란 다름 아닌 법신불로 자재와 대비를 갖추고 처처에 자비 시설 慈悲施設을 성취하고 영원히 무애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은 다름 아닌 역사 속에 나타나신 법신불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스님은 대각에 대하여 그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내시기도 했는데, 진심을 자기 스스로 깨치고 또 다른 사름을 깨치게 하여 상대가 끊어져 원만하므로 구경각究竟覺이라 하고, 대각이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과 구경각을 다 깨친 것을 뜻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적인 근거는 기신론起信論의 각사상覺思想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선사의 대각 사상도 기신론의 여래장如來藏 사사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러한 사상은 선사의 대표적인 저작이라 일컬어진는 「각해일륜覺海一輪」에 잘 나타나고 있다.
각해일륜에 따르면 선사는 대각의 근원을 여래장에 두고, 모든 중생은 본래 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각자가 그 불성의 계발에 전력을 다해야 함은 물론이요 나아가 남에게도 그 깨우침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각 각타自覺覺他로서 이의 완성이 대각이라고 설파하셨다.
지각 각타, 스스로도 깨닫고 남도 깨우치게 하는 사상, 곧 대각교 사상은 선사의 후반부 생애를 중생을 구제하려는 치열한 삶으로 승화시켜 주었던 사상적인 토대였다. 스님은 대각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적인 실천 운동을 펼치기 위한 선결 조건인 자각, 곧 대도를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체득하였고, 그 자각한 바를 오로지 어떻게 중생을 위해 실현할 것인가를 궁구하였다.
이미 대각교 운동에서 살펴본 것처럼 스님은 민중을 떠나서 불법을 구하지는 않았다. 민중은 각타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깨달음의 모체요 토대였으며, 나아가 민족의 독립과 장래마저도 중생 교화의 한길로 파악하였는데 이는 불법을 떠난 민족이나 민중의 문제는 생각할 수조차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다. 그만큼 스님에게서 중생 교화는 지상 과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중생 교화의 방편으로 등장한 대각교 운동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대각교 운동은 먼저 구체적인 몇 가지 활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첫째가 저술과 역경이며, 둘째가 선수행의 대중화, 셋째가 민족의 장래를 위한 독립 운동, 넷째가 이미 일본 불교의 아류로 전락하고 있던 당시 불교 교단의 정화 운동, 다섯째가 이조 오백 년 동안 억불로 인하여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사원 경제의 자립화, 여섯째가 전근대적인 방법에 머물러 있던 포교의 현대화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여섯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스님의 저술 활동과 역경 사업인데, 스님의 저술과 역경의 정신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신이 펼치려고 했던 대각 사상에 대한 이론적인 전개와 일반들의 이해, 그리고 어려운 한문으로 된 경전이 서민 대중들에게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쉬운 한글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경전의 한글화 작업은 가히 선구자의 지위에 서 있었는데 스님이 번역한 금강경서문에 이르시기를 \"한자 장경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읽지 않는다면 한갓 종이요, 오물더미일 뿐이다\"라고 밝히고 있거니와 「조선어 화엄경」 의 서문에서는 조선인에게는 조선 글과 조선말로 번역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 주장했는데, 이때의 시대 상황이 우리말 우리 글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을 때임을 감안하면 스님의 역경 정신은 항일 민족 독립운동의 한줄기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스님의 역경 정신은 항일 민족독립 운동의 한줄기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는 선의 대중화를 위하여 선학원을 위시한 선종 포교당을 건립하여 선의 대중화를 제창하며 일반민중으로 하여금 자각케 함으로서 대각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운동은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대각사에 여성들을 위한 선원을 개설했으며, 망월사에 활구참선만일결사活句參萬日結社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의 대중화 운동은 곧 자각 각타의 방편으로써 자신도 결코 선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대중에게도 선이 생활 속에 스며들게 했는데, 스님이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그 어려움을 넉넉히 헤쳐나갈 수 있었던 힘은 이 참선 정진이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셋째는 항일 운동으로서 스님은 한 용운과 더불어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3·1독립운동에 참여함으로서 민족의 독립이 무엇보다도 수중함을 몸소 보여 주었다.
넷째는 교단의 정화 운동인데, 스님은 교단이 급격하게 왜색화되어 가자 한국 불교의 전통을 되찾기 위한 교단의 정화 운동에 앞장섰다. 1926년, 두 차례에 걸쳐 전국의 비구승 스물 일곱 명과 더불어「건백서建白書」를 총독부에 제출하여 일제의 불교 정책이 잘 못되었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안으로는 스스로 계율을 엄중히 지키면서 이제까지의 한국 전래 전통 계맥을 이어 청정한 승단 기풍을 진작시켰다. 이때의 시대 상황은 총독부의 사찰령에 따라서 삼십일 본사의 승려들 대부분이 대처와 취처를 한 상태였으며, 강대련을 비롯한 대부분의 승려들은 취처를 허락해 줄 것을 총독부에 건의까지 한 상태였다. 따라서 신성해야 할 사찰은 승려들의 처자권속이 차지하여 수행승들은 오고갈 곳이 없어지고 말았는데, 결국 이는 해방 뒤의 대처 비구정화 운동으로 이어질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다섯째는 사원 경제의 자립화로서 이조 E쾌여 년에 걸쳐 불교 안팎에서 빚어진 억불과일제의 경제적인 수탈이 극심해지자 스님은 사원 경제의 자립을 위하여 노력했는데, 1918년에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우리의 토지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걸쳐 경제적인 수탈이 시작되자 스님은 만주로 가서 용정에 농장을 만들고 대각교당을 설립했으며, 하동에 화과원華顆完을 만들어 선농禪農불교를 실천했는데 이는 선가의 전통연 백장 청규의 실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섯째 포교의 현대화는 이미 지난호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의식의 한글화, 경전의 한글화를 비롯하여 포교당 중심의 교화 방법을 일찍이 제창하사고, 대각사 법당에 민요 학교를 개설하여 노송게서 손수 오르간을 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오늘날에도 불교 의식의 한글화가 실시되지 않는데, 그 때에 이미 천수경시식 들이 한글로 표현되고 실천 되었다고하니 대단한 혁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흔히 대각교 운동을 마치 새로운 신흥 종교로까지 착각하여 잘못 알려져 온 적도 있으나, 이는 기성 종판이 일제의 관제 불교로 전락하자 일제와 관련 없는 순수한 한국 전통 불교를 되찾지는 운동이며. 현대 민중에게 맞도록 혁신하자는 새로운 불교운동이라고 보이야 할 것이다.
그런 여러가지 것들을 돌아보았을때, 선사의 안목은 참으로 탁월하다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암울했던 시대에 스님 같은 분이 청정 교단을 지키지 않았다면 비구승판인 오늘날의 조계종이 존립할 수 있었을까 하고 스님의 성덕을 새삼 기리며, 지금도 스님의 원력대로 청정 교단이 제대로 서지 못하고 갈팡 질팡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에 후학의 한사람으로서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스님은 이처럼 시대를 훨씬 뛰어넘는 대각교 운동을 펼치시다가 스님 세수 칠십칠 세, 범람 육십일 세 되던 1940년 2월 24일 새벽에 목욕 재계한 뒤, 제자들을 불러 두고 ‘그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입적했는데, 해인사 용탑안에는 스님의 세수 육집일 세 때에 나온 치사리
齒舍利를 모신 탑이 있다.
최근 들어 용정 선사의 문도회가 결성되어 스님의 대각교 사상을 다시 선양한다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한보광 스님의 글을 참고했으며, 부분발훼했음도 아울러 밝혀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