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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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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해설 - 무관 1991년 12월 118호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잉불잡란격별성 仍不雜點觀城
구세도 십세도 서로서로 즉했으니
따라서 잡란하게 따로 이룸 아니로다

절후상으로 입동이 지나고 소설이 되었다. 세계世界라고 할 때, 세世는 불교에서 시간을 가리킨다. 물론 공간 空間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현상이나 상황도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의식 속에 전개되는 어떤 것이든지 그것의 전개는 먼저 시간의 흐름을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아름다운 것, 행복한 것, 신성한 것에서부터 그렇지 못한 것들
에 이르기에 현실이란 것은 세계 속에 포함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긴 세월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긴 세월이라. 구세도 십세도 서로서로 즉했으니, 잡란하게 따로 이룸 아니로대는 시간 속에 진리가 내재되어 있다고 하여 제시섭법분제라고 하기도 한다.
한 생각과 많은 시간이 동사하여서 조금도 걸림이 없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 가운데에 각각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와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와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인 삼세를 갖추지만 일세에 융합하고, 그 시간 속에 법과 법이 항상하지만 서로 사무쳐 있으면서도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구세도십세도 서로서로 즉했다고 표현한다.

지난 가을, 우리는 모든 감각이 고요하고 아름다운 단풍에 물든 산과 계곡의 경이로운 숲을 본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나마 모든 감각이 이 아름다움에 취하여 현실의 행복을 우리 가슴속에 넘치도록 느껴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과연 누구였는지 구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온 세계가나의 것이요 우리의 것이며, 나는 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며, 영원한 삶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영원 속을 벗어나 시작과 끝이 없는 정체와 고통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겨울 준비를 해야하고 입시에 몸아 달아야 하므로 한결 더 줍고 알뜰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무엇이 피폐를 행복하게 하고 또 이렇게 괴롭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의식과 지극히 순수환 한 원에 지나감으로써, 우리가 삶이라는 현실로 되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속에서 몰아내어 우리로 하여금 어느 딴 순간에 어두운 생의 한가운데에 외롭게 홀로 서게 만든 것이겠읍니까.?
우리는 시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법과 법이 항상 머물러 있어 서로 사무치지만 걸림이 없는 것임”을 잘 알지 못한 때문이라고 봅니다. 구세와 십세가 서로를 즉했으므로 과거의 행복이 지금의 고통과 아무 걸림 없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봄날에 싹이 터서 꽃봉오리를 맺고 꽃으로 피어나고 꽃 은 열매를 맺고 열매는 다시 새싹을 함께 하는 것은 과거의 과거에서 미래의 미래로 연결되는 순환의 원리입니다. 이 순환을 있게 하는 원리, 그것은 무엇이겠읍니까. 어린애를 어른이 되게 하고, 어른은 늙어 머리가 백발로 물들며, 백발 노인을 다시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그 원리를 불교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순환의 원리 속에 내재된 것을 연기의 이법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잘못일까. 모르면 모르는대로 겸허하게 그것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 무슨 잘못이며, 그것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인생이 봄날을 돌이켜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인생의 무더운 여름날의 고통과 결실의 가을·과 흐리고 추운 겨울날들을 깊이 있게들여다보지 않아도 우리는 살고 있고 이렇게 순종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할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우리가 태어난 날짜와 부모의 이름이 적힌 것일 따름이고 이며 나는 분명히 여기에 존재하는데, 검문하는 순경이나 군인 아저씨는 주민등록의 번호를 가지고 나를 다시 확인함으로서 이 현실과의 사이를 거슬러 올라가 그 끝없는 시작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 더러 있음을 생각허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런 식의 시작이라면 처음부터 없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왜땐 그 시절에 접하려면 당장 모든 생각과 기억을 정지시켜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셔 다시 끝없는 과거의 과거를 향해 되돌아가는 꿈을 꾼다고 해서 그 시작이 없어진 것이 아셔라, 그 시작은 심술궂은 술래처럼 한발 앞서서 도망치기 때문에 우리의 사과 아무리 뒤쫓아 달려가도 결코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맙니다. 마치 지평선을 쫓아가도 푸른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은 끊임이 없는것과 다를것이 없습니다. 하늘은 언제나 땅 위에 저만치 머물러 있고, 지평선은 끝끝내 아득하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애초에 그 시간이 우리에게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원점에 도달하더라도 대체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억 속에 수많은 번뇌의 파도에 휩쓸리는 일말고도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삼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현실의 우리는 법과 법에 상주하는 존재와 존재가 제각기 성립한 모습으로서, 구세라는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일어나는 시간의 지평에서 존재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서로 사무치면서도 걸림이 없는 것은 십세라는 하난된 시간의 지평에 섰을 때에라야 존재의 일체성이 파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과거, 다시 말해서 처음 시작은 지금것 전하는 한 생각을 시점으로 하써 과거와 미래로 비상하기 때문입니다. 시각적으로는 연역적이지만 이러한 계속된 생각은 한 순간마다 분절을 이루고, 끊어졌다가는 다시 이어짐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숫자가 일에서 이로 넘어갈 때는 일과 이라는 사이가 분절을 이룹니다. 이러한 분절은 새로운 한 세계로 우리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따라서 집단하게 따로따로 이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어떤 자체가 있다는 것은 섞임이 있고, 모양이었으면 그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체가 없으면 곧 모양이 없기 때문에 쓰임이 없는 쓰임이 되고, 쓰임이 없이 싼 까닭에 그것을 썩만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삼세를 건립하는 것도 나에게 있는 것이며, 한 생을 내어 과거의 과거로부터 미래의 미래를 거두어 들이는 것도 나에게 있기 때문에 삼세가 곧 일시오 일시가 곧 삼세입니다.
\"일불잡란격별성\"이라고 할 때의 집, 란 亂, 격 隔, 별 別은 서로의 바탕이 그 본질을 잃어버림으로서 어지러워집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 화합한다고 말할 때는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상대의 속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와 동일한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듯이 순수하게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계해서 연결되는 시간인 과거의 과거에서 미래의 미래를 포섭하여, 그와 같은 시간의 지평위에 낱낱으로 나권 현재 세계가 새롭게 건립되었음을 인정하려는 것입니다. 존재자의 통일인 일념이 존재와 동시에 차별 양상으로서의 현실 존재, 디시 말해서 시간과 현상이 각각 다르다는 설명입니다. 잡란어 현양적인 것들의 차별을 인정하고자 한 것이라면, 격별은 계해서 연결되는 시간적인 것을 존재의 양상을 빌려서 순서를 매기고 그것이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
실을 일깨우려 함입니다.
우리는 존재의 양상을 시각으로부터 청각, 미각, 후각, 촉각들과 같은 여러 가지 기관으로 파악해 가지만, 결과적으로는 여섯 번째 감각 기관인 의식에 집합되고 이 의식은 시간상으로 새로운 것을 생각활 때, 곧 하나에서 둘로 넘어갈 때에 분절을 이룹니다. 그것도 옛과 다르지 아니하면서도 바로 새로운 것이며. 새로운 것과 다르지 아더하면서도 바로 옛것이니 일체로서 뻗친 듯이 옛과 지금에 간격이 없습니다. 봄날의 꽃봉오리에서 겨울의 대지에 돌아가지 가을의 단풍은 아름다운 행복을 주었고 지금은 을씨년스런 겨울의 어느 아침이지만 마음속에 간직한 행복감은 뜯겨져 나갈 리가 없습니다.
인생의 새벽빛이 마음속에 내재된 행복을 열어 줄 때에만 의식 속에 향기가 저절로 풍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겨울이 깊어 가면 봄이 개갑다고 말해, 나무를 쪼개어도 꽃은 보이지 않지만 봄이 오면 가지마다 보이지 않던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고 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