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산책자 왕유
남종화의 원조, 비파의 명연주자, 시인 왕유 시인은 유마경의 주인공 유마힐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王·維·鷹인 것이다. 유사경은 범어 비마리꺼르띠 Vimalakirti의 음사. 무구칭 정명 이구라고 한역된다. 유마힐은 그 자위처럼 번뇌 속에 있으나 번뇌의 물듦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는 자유인이다. 대승적인 인간의 전형으로서 유마힐은 \'인간은 번외의 오물에 더렵혀져 있으나 더러움 그 자체는 아니다.\"라는 붓다의 선언을 범부의 일상 속에서 자유롭고 당당하게 실현한다. 왕유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상을 자신이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삼았으며, 그 자신 선과 문학을 통해서 유마의 길에 오르고자 했던 불교체험자였다.
젊은 날의 왕유는 재기발랄하고 명석한 정신을 갖고 있었다. 태평광기는 묘년결백, 풍자도미했던 왕유의 편모를 이렇게 기록한다.
우승 와유, 약관에 문장득명, 음율에 밝았다. 특히 비파의 명연주자로서 여러 귀인들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기왕이 그를 중히 여겼다.
이처럼 문학, 음악, 회화에 다재다능했던 왕유는 721년 진사로 입신하여 관리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왕유도 봉건 왕조사회에서 지식인과 시인이 겪어야 할 시련을 피 할 수 없었다. 왕유도 백거이도 당왕조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에 견디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정치가 손을 뻗을 수 없는 세계, 소세계에서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다. 이 점이 당대시인들의 연대기에서 보 여지는 공통적인 운명인 것이다. 성당盛害 (7l2-766)이후 작문, 작시 능력을 위주로 하는 과거제도가 정착되면서 신분이 낮은 독서인도 고급관리로서 입신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는 했으나,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정쟁에 휘말려 불우한 생애를 보낸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이상과 재능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는 귀족사회에 모순을 느꼈으며 그 비분강개함을 시로 표현했다. 특히 백거이의 풍유시를 계승하는 만당의 피일휴(843-883?)같은 시인은 직접 황소의 난에 참여하여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문학이 아닌 행동으로 표출해 내고 있기도 하다. 이 불우한 생훨과 그들의 재능이 바로 당시의 문학적 에네르기였던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몇 차례의 좌천생활을 경험한 왕유레게 가장 힘들었던 시련은 755년 안록산의 난중에 입은 부역자의 혐의와 그 수모였다. 당 왕조의 부패와 전황에 분개한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자현종은 사천성으로 피난하고 수도 장안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장안에 남아 있던 왕유는 반란군에 의해 보리사에 구금된다. 시인은 약물을 복용하고 이질병을 가장했으나, 반란군측은 그를 낙양으로 이송하여 급사중의 벼슬을 강요했다. 반란이 평정된 757년 왕유는 부역자의 혐의로 중죄에 처해질 뻔했으나 반란평정의 공신으로 승진한 동생 왕진의 간절한 구명운동으로 f화를 면하게 된다. 이후 왕유의 명에는 빠르게 회복되어 759년에는 우숭상에까지 오르지만 시인은 안록산의 난중에 격은 곤욕과 정치에 대한 절망 때문에 관직에 대한미련을 버리게 된다. 이미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린 왕유는 장안 남쪽의 교외에 소재한 망천장에 은거하여 관리로서의 입신보다는 시와 그림, 선에 몰두한다. 도광선사의 문하에서 \"십년좌하十年座下, 부복수교 俯伏受敎\"한 선불교 접촉은 모친 최씨의 영향이 컸다. 7502년 모친 최씨가 세상을 떠나자 왕유는 집을 기증하여 절 만들기를 청하는 표에서 이렇게 쓴다.
신의 망모 고 박롱현군 최씨는 일찍이 대조선사의 문하에서 삼십여 년 사사하였습니다. 신의 어미는 살아 계시는 동안 거친 옷과 채식, 계율을 지키며 참선하였습니다. 산림에 즐거이 머물며 적정越靜을 구하는 일에 뜻을 두었습니다.
대조선사는 바로 북종 신수의 사법제자關法弟子인 보적普寂(651-739)의 시호諸虎이다. 왕유의 모친 최씨는 중국여인들이 바라마지 않는 비단옷마저 몸에 걸치지 않고 북종선의 보적선사에게 선을 수업한 불교도였던 것이다. 모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불교사장인 영향을 받은 왕유는 아내가 죽은 서른 살 이후 완전히 불교사상을 체현하는 생활을 꾸리게 된다. 그의 전기를 싣고 있는 구당서권백구섭은 이렇게 적는다.
그의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차 끓이는 도구와 경을 보는 작은 책상, 노끈 의자가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처소에 돌아와 향을 피우고 홀로 앉아 참선으로서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죽자 재취함이 없이 삼십여 년을 홀로 살았다.
장안에 머물 때는 항상 십여 명의 명승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현담을 나누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현대의 우리는 그가 왜 이처럼 고독한 산책자로서 살아갔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단 한가지 이미 자기발견의 정점에 도달해 있는 구도자는 누구나 이단자로서의 고독과 숙명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뭇 이웃들, 세계와의 화해, 자신과 이별하기 전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없다. 떠남의 질적인 변화로서의 만남 그것이 바로 심법의 숨은 비밀인 것이다. 그리고 너무 난해하기조차 하다.
선문 禪門의 비명 碑銘 집필자로서의 왕유
왕유는 선승들의 비명 집필자였다. 그는 먼저 북종선의 등사燈史 능가사자기를 정각의 비명 대강대 안국사고대덕정산비명을 썼다. 정각은 중종황후 위씨의 동생이다. 세속의 길을 따라 걸었다면 좋았을 법했던 정각은 황후인 누이의 권력욕을 질타하며 출가의 길을 더욱 멀고 높이 걸어갔던 인물이다. 정각은 피로 피를 씻는 궁중의 권력투쟁에 전율했다.
그래서 그는 왕질의 공주들이 바쳐 오는 법의조차도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변정치의 선승이었다. 이런 사람의 비명을 왕유가 쓴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묘비명이란 고인의 세계를 잘 얼고 있는 친지에 의해서 씌여지는 것인 만큼 왕유와 정각은 같은 주소를 갖고 있는 정신 세계의 주민들이었다. 또한 왕유의 선종 접촉은 북종뿐만 아니라 남종을 망라하고 있다. 돈황의 선문현 신회어록神會鍵은 남종와 거장 신회와 왕유의 만남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개원 28년(740)경 시어사 왕유는 공무 여행중이던 남양군 임단역에서 신화를 만난다. 왕유는 물었다. \"만일 수도한다면 반드시 해탈할 수 있겠는가?\" 신회는 대답한다. \"중생의 자심은 본래 모든 오염으로부터 벗어난 청정 그것이다. 만약 억지로 수도한다는 마음을 일으켜 닦는 바가 있다면 곧 망심이다. 해탈하지 못하리다. 왕유는 신회의 확신에 찬 답변을 듣고 놀라서 말했다. \"놀랍도다. 나 일찍이 여러 대덕들의 설법을 들어 왔건만 이와 같은 설법은 들어보지 못했다.\"그리고 며칠간 신회로부터 skawhdehsey의 종지를 귀기울여 들은 왕유는 주변의 관리들에게 말한다. \"이곳 남양에는 거룩한 대덕이 계시다. 불법의 심원함이란 실로 불가사의하기만 하다.\"왕유는 시심유수를 단호히 부정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본래 모든 불결에서 해방된 자심청정의 세계를 갖고 있다고 설히는 신회의 압도적인 인간신뢰정신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그 감동이 당시의 어느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었던 순수한 인간 확신의 정신, 남종선의 세계로 왕유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만남을 인연으로 신회는 왕유에게 선의 제6조 혜능의 비명집필을 의뢰한다. 그래서 씌여진 비명이 「能禪師磋」이다. 왕유가 쓴 대표적인 이 두 비명은 오늘날까지 남겨져서 선종사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왕유의 시와 미적 美的 단념 斷念
「녹채塵菜」「목란채 木蘭蘭」 「죽리관 竹籬館」 「산거추명山廳願螟」 「과향적사過齊靜」와 같은 왕유의 대표적인 자연시는 자연의 수려한 이미지를 섬세하게 포착, 응결하여 동정일여의 세계로 환원시키는 한편 단순한 자연묘사가 아닌 인생이 원숙한 통찰을 보여 준다. 인서 人世의 허상을 체험한 왕유의 절망은 자연복귀, 오로지 자연을 대상으로 한 미적 美的 단념 斷念을 통해서 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불교는 단념을 가르친다. 단념이란 우리의 흔한 통념처럼 어떤 희망이 나갈구가 ‘좌절 되었을 때, 그 욕구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염 念이란 번뇌이며 망상이며 죽음에 이르는 집착이다. 결국 우리의 인생이란 단념의 재반복을 끊임없이 연출해야만 하는 악몽 같은 것이 아닐까? 왕유의 자연시에 내재된 자연현생활적 단념은 이미 자연현상 자체의 형상 자체에서도 해방된鍵, 무한절대의 이법瓚去을 보아 버리고 있다. 시간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
모든 현상은 끊임없이 변하는 무상 속에 있는 미적 단념을 통틀어서 직관된 진은 그 인간의 운명을 함에 완성시켜 버린다. 그래서 무상과 영원이란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이다. 확실히 왕유의 문학적 상상력은 선불교의 접촉을 통해서 체득한 직료견성直了見生 내심지중 심법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동시대의 시인 원함은 \"당대의 시장, 선리에 정통한 왕형\"이라고 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적인 시련을 거쳐서 도달한 시인만이 지복, 소세계에서의 해방이었다.
761년 7월의 어느 날, 시인은 눈을 감는다. 구당서는 시인의 북음을 이렇게 적는다.
임종 무렵 시인의 아우 왕진은 봉상에 있었다. 시인은 붓을 찾아서 진에게 작별의 서신을 쓰고 평생의 친구들에게도 서신 수통을 썼으니 모두 더욱 열심히 봉불수심에 힘쓸 것을 권하는 내용이었다. 시인은 서신 쓰기를 마치고 이내 숨을 거두었다.
소세계小世界의 고뇌와 절망을 조용히 감내하면서 지신의 문학을 원숙한 불교 체험으로 이행시킨 이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시인은 독백한다.
일생의 수많은 상심사
불교가 아니면 무엇이 있어 달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