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꾼 생활 속의 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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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이은자
2001년 07월 233호
내게 있어서 방황은 떨쳐버릴 수 없는 필연 같은 것이었을까?가끔씩 세상 사는 일에 지칠 때면 변화 없는 무기력한 일상생활을 벗어나 잃어버린 나를 찾겠다고 무작정 어디론가 떠났다가 돌아오곤 했다. 마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늘 분주하게 떠돌다가 지쳐서 돌아온 내 자신은 여전히 무엇인가 무거운 짐을 부려 놓지 못한 힘겨운 모습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내 자신 스스로 속박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몸도 마음도 자유스러워질 수 없다.’라는 것을 늦게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언어가 주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문자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온 것 같다. 들끓는 마음 하나 잠재우지 못하고 사는 내게 참선을 만날 수 있게 된 커다란 계기가 있었다. 흔히 참선이라 하면 스님들만의 일이거나 재가불자가 복을 쌓는 정도로만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내게 참선수행에 관심을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고봉화상의 어록인 《선요禪要》라는 책이다. ‘선요’란 말 그대로 선의 요결이다. 참선을 하는 데 필요한 요건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선요’의 ‘요要’는 여인이 옆짐을 짚고 있는 모습을 상형한 글자에서 나온 것으로 허리는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듯 선요는 선수행의 길잡이로 그 역할을 해왔다,염불을 열심히 하는 것도 수행일 것이요, 기도를 하는 것도 수행이요, 또한 경전을 탐구하는 것도 일종의 수행일 것이다. 수행에는 이처럼 갖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목적을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을 구하는 것에 있으리라. 그 중에서도 참선 공부는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공부가 아닐까? 부처님도 이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산에서 6년간 그 피나는 고행을 감행하셨고 달마 대사도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을 하신 것이다. 혜가 대사가 왜 팔을 자르면서까지 달마 대사의 계시를 기다렸겠는가.
오늘날 선방에서 물욕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을 인욕으로 끊어내며 불철주야 화두에 매달려 용맹정진하는 수행자들도 바로 이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일 것이리라. 이러한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간경하고 염불하고 참선하는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방법은 역시 참선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부처님은 마음을 깨달으신 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뭔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다. 왜 나는 중생으로 살고 있는가? 어떻게 해서라도 이 마음의 세계를 알아내고야 말리라고 굳은 결심을 한 끝에 부처님을 닮아 보겠다고 발심을 낸 나는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와 좌선을 하기로 했다. 마치 몸은 천길 벼랑 위에 앉은 듯이 생각하고 용맹심을 낸다고 처음부터 무리를 한 탓인지 고역스러울 만큼 견디기 힘든 결가부좌의 자세로 허리와 다리의 통증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분별심을 놓아버리기는커녕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졸음까지 쏟아지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쉬운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렵게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왕지사 시작한 일 중도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흐르는 기억의 수면 위에 한 송이 연꽃이 떠올랐다. 한 순간 마음의 물주름이 자잘히 잡히고 물 위에 둥글게 번져가며, 고요히 올라앉은 환한 미소를 보았다. 밤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묵언정진을 하고 있는 연꽃처럼 내 마음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나는 몸과 마음이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생각을 해왔었다. 그럼에도 내 몸과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외면이 아닌 안으로 깊숙이 들여다보이는 내면을 키우는 일, 바깥의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싫다 좋다라는 느낌을 같게 하는 나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매일같이 물을 마시면서도 물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것처럼 사물에 대한 직관력 또한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직관이란 열 개의 눈이 종횡으로 살펴본다는 뜻으로, 주마간산 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만일 경전을 보는 것으로 마음을 본다면 경전의 설명을 거쳐 마음을 헤아리므로 어떠한 매개체를 거치게 되지만, 참선은 그대로 실상을 향해 곧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참선은 자신의 마음 발견인 것이다.
마조 선사의 제자 중에 대매大梅 법상이 있었는데, 그가 젊었을 때 마조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조 선사가 대답했다.
“마음이 곧 부처다.”
이 말에 대매는 곧 깨닫고 그 길로 깊은 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수년이 흐른 뒤에 마조 선사는 대매를 시험해보기 위해 한 스님을 보냈다.
대매를 찾아간 스님이 물었다.
“마조 선사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이렇게 깊은 산에 들어와 있습니까?”“마음이 곧 부처라기에 그 길로 여기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마조 선사는 요즘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매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말한다는 말이요?”
“요즘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자 대매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는 여전히 ‘마음이 부처’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선은 오랫동안 잃어버린 기억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자연을 만난 느낌처럼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무엇인가 쫓겨다니는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했던 마음이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참선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얻었고, 언어와 사물에 대한 집착의 끈을 놓아버릴 수 있는 커다란 계기를 가졌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참선을 하다보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알아 참된 자신의 충실한 삶을 가꾸어 가는 일, 바른 지혜의 가르침을 따라 믿음을 세워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여기에 길이 있지만, 아무도 가는 길을 말해 주는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는, 그러나 그 길에는 문이 없다. 마침내는 그 길 자체도 없다.”라고 하신 어느 스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나의 방황은 아직도 끝나질 않았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지극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구하고, 용맹정진 한다면 내 자신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