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팔당 상수원 유기농업 운동본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맑은 땅 좋은 벗 - 안혜령 1999년 11월 213호
양수리. 또는 두물머리라는 이름대로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줄기가 하나로 화합하는 곳. 그물과 겹겹이 포개진 산자락의 어울림이 한갓지며 정겹기 그지없는 곳. 빼어난 풍광으로 수도권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엠티’ 장소의 하나이며, 이마적에는 데이트 장소로, 신혼부부의 촬영 장소로 각광 받는 곳.
이 아름다운 마을 양수리에 ‘팔당 상수원 유기농업 운동본부’가 있다. 팔당상수원 구역에서 유기농사를 짓는 이들이 모여, 자연 섭리에 순응하고 바른 농사를 실천 보급하며, 팔당호 수질 보호를 비롯한 환경 보전 운동과 농촌의 공동체 회복 운동에 앞장 설 것을 목적으로 1995년 12월 22일에 설립한 생산자 공동체이다.
현재 양평군과 남양주시를 중심으로 광주군과 멀리는 춘천, 여주, 이천 쪽에까지 걸쳐 130명쯤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으며, 유기농산물 생산에서 나아가 저장, 가공, 유통, 판매까지 일체를 회원들의 힘으로 이루어내고 있는 알찬 농민 단체이다.
양수리 발치 팔당에 발전용 댐이 들어선 것이 1973년이었다.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양수리와 마주 보고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대리와, 그 마을에서 한강 건너 바라보이는 하남시를 잇는 이 댐이 들어섬으로써 서울과 수도권의 근 이천만 주만들이 생활 용수와 공업 용수를 공급 받게 되었다.
수도권 주민들에게 맑은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팔당호 유역을 상수도 보호 구역, 수질 보전 특별 대책 지역 등으로 지정, 엄격한 규제와 단속을 펴 왔다.
서울 사람들이 그 덕에 좀더 맑은 물을 마실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댐 건설 전부터 그린벨트로 지정되었던 지역 주민들로서는 고통에 가까운 불편이 시작되었으니, 이십 년을 참고 기다린 1994년에 주민들은 ‘팔당 상수원 피해 주민 공동 대책 위원회’ 라는 긴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다. ‘상수원 보호와 피해 주민 생계 대책’에 관한 공청회를 열어 수렴된 의견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정책 제안을 하는 한편,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부당한 규제에 반발하여 상당한 개선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규제의 완화라는 것이 상수원 보호의 명분을 넘어설 수는 없는 일인즉, 이 단계에서 재발과 보전의 두 길을 놓고 지도부 안에서 갈등이 불거져 나왔다. 이른바 친개발론자들은 팔당댐 근처에 있는 취수구를 북한강 쪽으로 올리고 규제를 풀어 더욱 지역 개발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친환경론자들은 다소 불편과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팔당호를 살려야 한다고 맞선 것이다.
대다수 주민들은 친개발론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친환경론자들은 ‘피해 주민 공대위’ 조직에서 점차 배제되고 스스로 이탈해 갔다. 이렇게 갈라져 나온 이들은 주로 일찍부터 개별적으로 유기농사를 짓던 이들로 근본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농업에서 찾으려 했으니, “농업이 바로서야 물도 깨끗하게 되는” 이치와 삶을 실천하고 확산하기 위하여 힘을 모은 것이 지금의 팔당 상수원 유기농업 운동본부이다.
이 때 주축이 된 이들이, 교사생활을 하다 귀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이 지역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권오균 고문과, 정농회원이던 정상묵 회장, 기독교 농민회에서 활동하던 김병수 전사무국장 들이었다.
이 대목에서 정농회를 짚고 가지 않을 수 없다. 현재 팔당 유기농본부는 정농회 팔당지회이며, 정상묵 회장은 정농회 회장을 겸하고 있다. 또 유기농본부 회원의 80퍼센트가 정농회 회원들이기도 한데, 이는 유기농본부의 태동은 물론이요, 이념과 실천적 삶에 정농회 정신이 뿌리가 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76년 정월에 창립된 정농회는 우리나라에서 ‘생명의 농업’을 자각하고 실천한 최초의 농민 조직일 터이다. 일본 애농회를 창립한 고다니 준이치에게서 감화를 받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농민 서른여 명이 “농업이 인류 생활의 근본임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생육 번성케 하시는 일에 순응하기 위하여 바른 농사에 정진”함을 강령으로 삼았으니, 즉 “경천애인”의 진리를 유기농업으로써 구현하기 위한 농민 조직인 것이다.
유기농업을 가장 원칙적으로, 양심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농민들이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세간에 알려진 바는 적으니, 이들이 조직이나 홍보에 신경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 올바른 농사를 짓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재 여기는 생산농민들이기 때문일 터이다.
그러므로 출범한 지 이십 년이 지났건만 전국 여섯 군데의 지회에 약 오백여 명의 회원이 있을 뿐인데, 그러나 이들은 각 지역 유기농업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해마다 유기농업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며, ‘바이오 다이나믹 농사력(생명역동농업)’을 발행하는 등 유기농업의 저변 확대에 힘쓰고있다.
87년부터는 도농직거래 운동에도 힘을 기울여 정농회 직영 농산물 유통센터를 개설했다가, 90년에 경실련과 합작하여 경실련 정농 생활협동 조합을 만들어 유통업무를 맡겼다.
77년에 부친과 함께 관행농법에 따른 농사를 짓고 있던 정상묵 회장은 몇몇 청년들과 함께 풀무원 농장 원경선 선생에게서 기독교 농민 지도자 교육을 받던 가운데 정농회 연수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연수회에서 그는 땅과 사람을 망치는 관행농업에 충격을 받으며, 나아가, 기존의 삶에 대한 크나큰 반성과 깨우침을 얻었으니, 그 때부터 유기농업으로 길을 바꾸게 되었다.
78년에 그는 부인 정상일 씨와 함께 만여 평 ‘두물머리 농장’을 열었다. 이 농장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에 유기농업 바람이 일었으며, 남양주시 송촌리에서는 한솔 생명 공동체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팔당 유기농본부의 태동에는 서울시와 농협도 한몫 했다. 창립 즈음 서울시와 농협중앙회가 이 지역에 유기농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팔당댐의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주로 서울 사람들이고 보면 깨끗한 물에 대한 책임 또한 서울 사람들이 져야 함이 마땅한 이치요, 물을 깨끗이 하자면 농약과 제초제, 성장호르몬 대신 발효퇴비를 쓰는 유기 농업이어야 할 터인즉, 서울시에서 이 지역 농가에 투자한다는 논리였다. 게다가 생산에 필요한 자금보조 뿐만 아니라 판매까지 서울시가 책임지기로 했다.
유기농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나 지원이 미미한 우리 현실에서 이런 좋은 조건이 어디 있을까. 유기농본부는 유기농가를 확대하고 교육을 통하여 생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단계부터 일이 틀어졌다. 서울시에서는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유기농업 물류센터를 차리고 시청 공무원을 직원으로 파견하기까지 하였으나, 가락동 농수산물 유통공사 쪽에서 계약을 꺼리는 등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유기농업이란 얼마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인가, 애써 재배한 농작물의 판로가 막히자 분노한 농민들이 밭을 갈아엎거나 트럭에 싣고 서울로 올라가 시청 잎에서 데모를 벌이는 사태가 일어났다.
순전히 수도권 주민들의 식수를 보호한다는 명분에서 비롯된 서울시나 농협의 이런 시도가 유기농 내지 환경농에 관한 이들의 의식 전환에 대한 한 가닥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기는 하나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생태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또한 유기농업에 관한 한 경험이 없는 서울시와 농협의 지원에 한계가 뚜렷이 드러났으니, 유통과 판매를 스스로의 힘으로 가닥잡기까지 유기농본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농회 생협과 공동 출자하여 주식회사 새농을 만들었으나 이 또한 가락동 직판 상인들의 방해와 반대에 부딪쳐 운영되지 않았고, 새농과 정농생협을 분리하고 통합하는 재시도를 하다 마침내 분리, 팔당유기농본부가 대주주로서 회원들의 공동출자에 의한 유통회사로 키우게 되었다.
현재 새농은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의 물류센터를 중심으로 삼성동에 판매장을 갖추었으며, 농협 하나로 클럽 같은 유기농산물 판매장과 한살림, 경실련 정농생협, 여성민우회 생협 등에 농작물을 공급하고 있다.
유기농본부가 이렇듯 가공과 판매에 힘을 쏟는 것은, 도농직거래를 꾀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바, 여기에 유기농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순 생산에 견주어 부가가치가 높을 뿐더러 품질이 떨어지거나 상처난 농작물의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농민이 저장, 가공 시설 하나 갖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독일에서는 농업인만이 농산물을 가공활 수 있으며, 미국 같은 경우 누구라도 신청하여 설비 기준에만 맞으면 허가를 내주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자산이 몇 억이 되어야 하고 까다로운 기준에 따라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기업이 아니면 손댈 수 없는 규모이다. 문민정부 이후 점차 규제가 풀리고 질도 뚫리고 있다 하나 아직도 농민들로서는 까마득한 벽인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고난은 한편 자생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을 터인즉. 만 사 년 사이에 팔당 유기농본부는 눈에 띨 만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양수리에 농산물 집하장을 갖추었고, 회원들의 공동 출자로 가공회사 ‘두물머리 식품’도 만들었다. 사무국을 포함해서 저장, 가공, 판매회사에서 일하는 상근 실무자가 사십여 명되며, 이들 월급을 빼고도 적지 않은 흑자를 올리고 있다.
활동 내용도 다양하여 유기농업의 보급과 기술의 연구 개발에 힘을 쏟아 자체 연수회를 열고, 자체적으로 품질 검사장비를 확보하여 자율적이고도 철저한 품질 관리 체계를 갖추었다. 수시로 소비자들을 초대해 유기농가 견학과 교육을 실시하며, 자연 환경 보호 운동에도 앞장을 서서 특히 팔당호와 관련된 일에는 지역의 관련 환경 단체들과 함께 일을 하고, 판매 이익금의 일부를 지역 사회를 위한 교육과 문화활동에 쏟고 있다.
유기농산물의 가공과 판로 개척에 들이는 정성 또한 대단하니, 빵과 저장식품에 치중해 있는 두물머리 식품의 상품을 다양화 할 계획이며, 올 12월부터는 정농회, 북한강 유기농업운동본부, 흙살림연구소, 풀무생협 유기농 생산자 협동조합과 함께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상거래에도 뛰어든다.
거대한 소비지 서울이 가깝고, 상수원인 팔당댐을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에다가, 일찍이 농민운동을 하면서 다져졌던 운동성과, 정상묵 회장이 자랑하는 유기농본부 안의 “두뇌집단”이 시도하는 새로운 사업, 이들이 가진 “역동성과 성실성 들이 서로 맞물려” 이루어진 성과이겠다.
반면, 생산자 공동체이니만큼 소비자와의 관계가 예컨대 한살림만큼 탄탄할 수는 없다. 도농직거래라는 것이 단순히 중간상을 배제하는 것이라면 이윤만을 추구하는 관행농과 다를 바 없다. 생산자와 소비자기 땅을 살리고 생명을 존중하는 자연 질서대로의 삶이라는 한배에 탄 공동운명체임을 인식하고 연대하려면 무엇보다 서로 얼굴을 맞대어야 한다. “내가 아는 저 이의 삶”에 대한 책임이 따라야 할 터.
팔당 유기농본부에서 올해부터 여는 작은 음악회는 이런 까닭으로 고심 끝에 기획한 행사다. 팔항 유기농산물을 이용하는 서울의 소비자들, 한살림과 정농회, 여성민우회 생협의 회원들을 초대하여 봄에는 클래식 음악회를 열었고, 지난 10월 16일에는 ‘99 맑은 물 사랑 추수 감사 축제’를 펼치면서 가수 정태춘과 박은옥 부부의 음악회를 열었다. 기온이 뚝 떨어져 날은 한겨울인 양 찹고 강바람도 모진 밤 늦도록, 서울의 소비자들과 생산자들, 양수리 일대 주민들까지 한마음으로 두물머리 농장 곁의 큰 느티니무 아래를 지켜 주었다.
올해 9월 29일 환경부는 수도권 천만 명 주민의 상수원 팔당호를 보전하기 위해 여의도 면적의 서른 배에 이르는 그 일대 지역을 수변구역으로 묶어 규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지역 안에서는 공장, 축사, 음식점, 숙박시설 등을 신축할 수 없으며, 이 지역 밖에서도 오폐수 정화 기준을 충족시키는 조건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조처가 팔당 유기농본부로서는 유기농업을 확산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양적 확산이 진정한 해결책일까. 정상묵 회장은 “유기농업이란 생활의 전체 양식과 사고구조의 전환”이라 했으니, 만 사년 동안 이러한 안정신적 이념을 불어 넣어 주기”보다 “돈 벌어 주는 방법의 교육이 더 빨랐”던 게 아닌가 우려 하는 바이다.
오재길 정농회 고문은 “죄책감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정농회”라 했다. 고다니 준이치는 농사 기술은 “당신들 마음이 돌아서서 결정만 하면 해결된다” 했다 한다. 죄책감, 자연과 땅에 대한 겸양의 마음, 그 마음의 유대와 확산이 유기농업 그 자체보다 근본임을 잊지 않는다면, 양수리 뿐이랴, 온 한강물이, 온 땅이 맑은 물 맑은 땅일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