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1년 불교 학계의 활동을 평가해 달라는 청을 「求道」지로부터 받고, 곧 불교학계의 10대 뉴스’를 선정하여 평가와 반성을 해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학술 활동의 양적인 평가에만 국한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므로 양적 평가에 관해서는 (1991,12월호)지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불교학계의 학술 활동에 대한 질적인 문제점과 아울러 불교학이 발전하려면 교계는 어떠한 인식의 변화와 지원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몇 가지 제언하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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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은 많은 성과를 낸 한해였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적인 평가는 예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내려진 명가일 뿐,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살펴볼 때에 더 많은 문제가 지적될 수 있음도 사실이다.
여기서 필자가 개별 논문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다만 전 체적으로 몇 가지 문제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불교학과현실의 거리는 아직도 꽤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때에 현실은 교단 현실. 사회 현실, 우리 삶의 현실들을 말한다. 원론적으로 보면 어떠한 학문도 백퍼센트 비현실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일반 대중들이 거리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교계의 책임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솔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자들의 직업과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학자들의 연구를 \'이론을 위한 이론,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오해하게 되고, 그 저 어려운 이야기이며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그것은 불교학의 소외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일차적인 책임은 우리 불교학자들의 몫이다.
이의 극복을 위해서는 학문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하겠다. 불교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불교학 그 자체를 문제삼는 학문이다. 불교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불교와의 관련 속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가? 불교학은 이론으로서의 학문은 아니다. 그것은 신앙, 실천, 구도와 하나가된 학문이다. 본질적으로 선교일치 禪敎一致 선교겸수 禪敎兼修의 학문인 것이다. 그런 듯에서 불교학은 서양적이고 근대적인 의미의 학문(science)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불교학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불교 학자는 대중과 만나고 현실과 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입장에 서지 못하고 학문을 위한 학문을 고집한다면 불교학의 쇄는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불교학을 하는 경우에도 전달의 문제는 남는다. 학자들이 논문에서 행하는 논증들이 일반 대중들의 고민과 다르지 아니하며, 논문은 그 같은 공동 관심사를 해결해 가는 문제풀이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반 대중들에게도 학자들이 추구한 해답은 전해져야 한다.
이를 위하여서도 먼저 논문을 좀더 쉽게 써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 현실과 접하고 대중과 만나려면 먼저 가능한 한 쉬운 언어로 전달되어야 한다. 어려운 이 이야기는 주 註에서 다루고 논문의 본문만 이라도 쉽게 써야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래도 논문의 형식이 쉬워지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논문 말고도 얼마든지 주를 생략하면서 연구의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글들이 씌어지고 발표되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학자들의 이른바 잡문에 대한 평가도 달라져야 한다고 보며, 논문과 잡문의 중간 정도 수준의 글들을 수록하는 매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 학계 분위기가 너무 침체되어 있다. 메아리 없는 외침만이 있을 뿐이 다. 토론과 대화가 없이 서로의 주장만 이 계속되어지고 있다. 선배 학자들의 주장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는 야심적인 논문도 드물고, 어쩌다 있다손 치더라도 그에 대해서 반론을 하거나 토론도 하지 않고 지나간다.
학문은 본질적으로 주관성主觀性을 면치 못한다. 어느 큐의 학설도 그것이 학설인 한 주편성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이같은 주관성의 한계는 간주관적 間主觀的으로 극복됮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토론이고 논쟁이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각자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주관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또한 토론과 논쟁은 일반대중에게 사고의 여러 갈래를 제시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학문 이 꽃피는 것이다.
개별적인 연구만 있으며, 공동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대화와 토론 부재의 지금 불교 학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공동 과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공동 연구로 실천하려면 먼저 교계로부터 재정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또한 대화와 토론의 장이 마련되고 나아가 논쟁이 활발한 학계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교계는 학자들에게 그런 분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서는 남녀 노소, 승속, 선후배가 있을 이유가 없다. 어떠한 권위도 있을 수 없다. 있어서도 아니 된다. 어떤 사람의 학설을 비판할 때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과 견해를 비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법과 사람은 다르다. 법에 의지하는 것이지 사람에 의지하는 것이지 사람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셋째 올해에 발표된 많은 논문들 전부가 과연 논문인지에 대해서도 못내 의심이 간다. 뭔가 새로운 학설의 제시가 있어야 논문이다. 기존 학설에 대한 도전에 반론 옹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미개척 된 연구 분야를 새롭게 개척한 참구의 결과여야 한다. 이때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세계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공부 분야가 아닌 경우에 뭐라고 단정을 할 수는 없었으나, \'저런 내용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저런 주장은 이미 다른 학자들의 논문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또는 \'저것이 강의 노트와 어떻게 다른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많았다. \"논문\"과 \'논문 아닌 논문\"이 준별되는 방법 역시 토론과 논쟁 밖에 없다. 특히,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학문적인 서평이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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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은 불교를 위한 학문이다. 불교의 발전을 위해서 초석이 되는 분야가 불교학이다. 포교, 승가교육, 역경들의 대화와 토론의 장이 마련되고 나아가 어느 분야도 불교학의 튼튼한 토대가 없는 논쟁이 활발한 학계 기쁨을 위해서라면 꽃피울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불교학의 증흥 없이 불교의 중흥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제는 무엇보다도 교계와 학계의 긴밀한 협동 체제(敎學協同)가 이루어져야 하는 까닭에 그 몇 가지 대안을 여기 서술한다.
첫째, 불교학과 불교 학자에 대한 인다. 어떤 사람의 학설을 비판할 때. 그 인식의 전환이다. 일방적으로 불교 학자를 이론이나 파고 앉아 있는 문자법사로 보아서는 된다. 스님들은 불교계에서 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노력하고 잇는 각계 각층의 일꾼들과 똑같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며, 나름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선우들을 인식해 주어야 한다. 올바른 인식과 평가가 무엇보다도 불교 학자에게는 평가가 무엇보다도 불교 학자에게는 격려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한 불교학자들을 종단의 현실을 합리화 해 주거나 이론을 제공해 주는 사람들로 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마음 밖의 어던 것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으로 대우해서도 아니된다.
둘째, 근래 종단에서는 제도 개혁에 대한 논의로 왈가불가하는 소리가 높고, 대형 발표회도 잇었다고 한다. 그때 몇몇 학자들도 참여하여 발표하였다. 그 같은 발표회가 자주 있어야 할 것은 틀림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바는 그러한 위촉을 평소에 시간을 두고, 학계에 맡겨 달라는 것이다. 교계는 학계의 연구를 지원하고, 학계는 교계의 발전을 위한 연구 활동을 하는 것이 교학 협동이니 말이다.
이러한 연구 지원 사업을 위해서 현재의 불교 진흥과는 별도로 \'불교학술진흥재단\'이나 \'대우재단\'의 학술 지원 사업을 보노라면 부럽기가 짝이 없다. 우리 교계는 언제쯤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인지.
셋째, 불교학의 토대 구축과 불교 학자의 저변 확대에 힘을 기울려야 한다. 이는 둘째와도 연관되는 문제이다. 대학의 한정적인 전임 교수 자리에 앉지는 못하더라도 불교 학자로서 인정하고 연구 활동을 계해 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불교 학자의 수급 관계는 이미 공급이 수요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러므로 고용을 창출하고 확대해 야 한다. 승가 대학이나 교계 설립 연구소에서 불교 학자들을 포용해 주어야 한다. 특히, 교계 설립 연구소에는 상임 연구원제를 채택해야 힘을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한 바 있다.
넷째, 학술 서적 출판에 대한지원 대책이 있어야 한다. 학자들의 연구는 출판을 통해서 대중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현재 우리 불교계에서 학술 서적을 출판해 주는 출판사는 얼마나 될까? 동국대 출판부를 빼고 나면 단 세곳에 지나지 않는데 민족새사(사장:윤창화), 경서원(사장:이규택) 그리고 금년부터 가세 한 불광출판부(대표:광덕스님) 뿐이다.
학문이 출판을 발전시키기도 하지만, 역으로 출판이 학문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에 불교 학술 서적 출판사가 단 세 곳밖에 되지 않는 여건 속에서 다시 어떻게 불교학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교계 차원에서 학술 서적 출판에 대한 특별 지원이 필요하다. 위에서 말한 \'불교학술진흥재단\'이 설립되면 그러한 일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라도 먼저 최소한 재단 법인인 대원정사 그리고 사찰이나 스님들이 세운 비영리생 출판사들에서라도 학술 서적을 출판해 주였으면 한다.
쉬운 책만 펴내고 읽히며 포교하겠다 는 생각은 일견 타당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그것은 근시안적이라 는 지적을 면치 못한다. 학술 서적의 활발한 출판과 독서 운동의 전개로써 뿌리를 깊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꽃 좋고 열매 많음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처럼 우리 불교 출판계가 쉬운 책만 펴내고 불자들은 쉬운 책만 찾아 읽는 풍조가 지속된다면, 불교학의 고사 枯死는 피할 수 없다. 불교학의 고사는 곧 불교의 고사로, 불교학의 소외는 곧 불교 의 소외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우리 불교학계가 이만큼 성장했음을 생각하면 선배 불교 핮가들이 고군 분투가 눈물겹게 다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