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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허구 그리고 믿음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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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 - 윤영해 1999년 11월 213호
불교와 기독교를 동시에 논할 때,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대체로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두 종교의 참과 오류, 또는 탁월함과 열등함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두 종교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이다.
첫번째 물음의 이면에는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한 자부심과 다른 종교에 대한 하시下視가 묻기 이전부터 깔려 있다. 이런 태도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이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뉜다. 먼저 두 종교를 그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아주 쉽게 두 종교의 가르침이 결국 같지 않느냐고 말한다. 반면 두 종교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두 종교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심각한 다름을 느끼고, 두 가르침을 지탱하는 인격적 유신론有神論과 이법적理法的 연기론緣起論이 도저히 양립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관심과 이해는 종교의 속성상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런 관심을 갖는 이들은 모두 종교를 ‘사실’의 관점에서 파악하려 드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실, 그리고 믿음과 의미
요즈음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은 과학기술이다. 요즘 들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배우자의 정조를 믿지 못하고 유전자 판독을 통한 친자 확인을 시도한다고 한다.
어떤 가정은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이 자기 친자가 아님을 확인하였다. 추적 끝에 간호사의 부주의로 병원의 신생아실에서 아이들이 바뀌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사실을 확인한 두 아이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현재 상태로 그냥 계속 키우기로 결정했다. 사실의 복원에 뒤따를 충격과 부작용이 우려되기도 하거니와, 낳아 준 부모가 아닌 키워 준 부모에게 두고 있는 아이들의 믿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들은 ‘사실’보다도 ‘믿음’이 갖는 가치를 깨달았던 것이다.
아내에게는 몇 가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새끼손가락 만한 크기의 플라스틱 머리핀 한 쌍인데, 아내는 그것을 장장 25년 동안 고이 간직해 오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아마도 한 개에 100원씩 200원을 주고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플라스틱 제품의 그것은 너무도 하찮은 것이어서 요즈음에는 아예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그 동안 서랍정리를 할 때마다 그것을 버리자고 했지만 아내는 그럴 때마다 펄쩍 뛰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딸을 낳게 되면 대대로 물려 준다는 것이었다. 허나 이제 딸을 바랄 수 없게 되자 아예 더 깊숙한 곳에 간직하여 둔 듯하다. 조카딸들이 있지만 그들에겐 주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처음에는 무엇이든 함부로 버리지 않는 아내가 그것이 아까워 그러는 줄만 알았다.
객관적 ‘사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머리핀 한 쌍은 참으로 하찮은 것이다. 요즈음은 만들지도 않을 만큼 싸고 하찮은 것이며, 용도도 전혀 없다. 그러나 ‘의미’ 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아내에게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이성에게서 처음 받은 선물이며, 그로 인해 사랑과 결혼으로 이어지게 한 선물이다. 즉, 아내는 그것에서 사랑의 시작,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찾는다. 아내는 그 머리핀 한 쌍에 결코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과 허구, 그리고 믿음
우리는 늘 수많은 주장과 진술에 당면해 있다. 주장이나 진술을 피력하는 사람은 그것을 논증하려 들고, 그것에 당면한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를 판명하려 든다. 어떤 주장이 사실임을 논증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논증=주장+근거). 반대로 어떤 진술이 허구임을 논증하려 해도 또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사실이냐 허구냐는 근거의 유무에 따라 확인하면 그뿐이다(사실=확인, 사실 무근=확인).
그러나 우리 앞에는 사실로도 허구로도 논증할 수 없는 수많은 진술이 있다. 만일 어떤 주장이 사실임을 논증할 근거도 없고, 허구임을 논증할 근거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 때는 믿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을 논증할 근거도 없고 사실 무근임을 논증할 근거도 없는 경우, 즉 사실 확언의 영역에서 벗어난 주장은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 이런 경우에는 사실로 믿든지 허구라고 믿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사실 여부는 확인하면 끝나지만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게 되면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자 어거스틴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설파했다. 사실로 확인된다면 믿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앙인의 사실과 의미
종교적 교설들은 대부분 사실 확인이 아니라 믿음과 의미의 영역에 속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인이나 불자들의 믿음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믿음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 또한 믿음이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논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천재들이 기독교의 교설들이 사실임을 논증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확인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주관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사실이 되자면 모든 이들에게 수긍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허구임이 논증된 것도 아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교설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종교들의 대다수 교설들은 사실로도 허구로도 논증될 수 없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허구일 뿐이다. 여를 뒤집어 말하자면 대부분의 종교적 진술은 사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니다. 따라서 이들이 사실로 믿든 허구로 믿든 그저 믿음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처럼 종교가 가르치는 교설들은 사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니지만 믿는 사람에 따라서 진실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믿는 사람에 따라서 진실이 되는 순간 그것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의 신성神性과 희생과 부활의 교설을 비웃지만,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인간이 된 하느님 예수의 사랑이라고 믿는다. 예수의 죽음을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믿음을 갖는 기독교인들은 사실뿐인 지신의 삶에다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마더 테레사가 그런 분이다.

사실과 의미, 그리고 인간의 행복
오늘날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과학기술은 오로지 사실만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다. 과학자는 사실 이외의 것을 다루지 않는다. 사실 확인이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실보다도 의미와 믿음이 인간의 행복을 더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 종교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어떤 점에서는 불교가 월등하고 어떤 점에는 기독교가 월등하다. 열등 요소도 마찬가지다. 종교학은 사실 확인을 지상 과제로 삼는 과학이 아니다. 사실로도 허구로도 판명될 수 없는 진술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써 모든 사람을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온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믿음의 기능에 주목한다.
불교와 기독교는 같은가 다른가, 어느 편이 더 우월한가 하는 관심은 사실 확인의 관점이다. 그것이 지적 관심사는 될지언정 종교나 종교학의 관심사는 아니다. 종교학은 종교적 교설의 사실과 허구를 판명하는 지적인 작업이 아니다. 사실 확인으로써 자기 신앙의 우월감을 확인하려 든다면 그것은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의 우열 판단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나는 믿음과 의미 부여의 결과인 ‘사랑이나 자비를 두 종교의 신자들이 얼마만큼 자신의 인격으로 구현하는가, 그리고 세상을 향해 그것을 얼마만큼 실천하는가 하는 점에서 두 종교의 우열이 판가름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