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사람은 입어야하고 먹어야 하며 또한 잠을 자야 합니다. 이렇게 입고 먹고 잠을 자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자리가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일자리는 어느 누구에게나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서양사람이나 동양사람, 남자나 여자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 심지어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일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아니 앞으로도 모든 사람들의 제일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자리가 무진장하게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원하는 사람마다 그들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여 그 나름대로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기에 그 곳이 극락세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일자리는 언제나 모자라서 어디에서나 아우성들입니다. 일자리가 많다는 제3국에 이민을 가도 일자리로 인한 아우성은 그치질 않고 있으니 그 곳 역시 극락세계일 수가 없지요. 극락세계는커녕 아귀다툼 속에서 사람 스스로가 파놓은 지옥 속에 서서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긴다고 한들 그러한 지옥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기야 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옮겨다닌다는 그 자체가 이미 지옥 생활이니 그 인생이 어찌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지옥은 이미 사람 속에 있는데 사람 밖에서 해탈하고자 해도 해탈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지옥을 극락세계로 바꾸기 위해서는, 아니 참된 자신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는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그리고 사람 안에서는 그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먼저 일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 일자리가 없는데 어찌 손에 일자리가 잡히겠습니까! 설령 손에 일자리가 잡힌다고 하더라도 손에 집힌 일자리는 이미 일자리가 아니라, 고생 자리이고 자기 없는 자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가지 못해 그러한 일자리는 곧장 잃고 말지요. 그렇다면 손이 가는 곳에 일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가는 곳에 참된 일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없는 것이고, 손은 눈에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어 그 효력이 대단하지요. 심지어 손작은 사람보다 손 큰 사람이 언제나 먼저 눈에 뜨여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대우를 받기도 합니다. 하기야 손 작은 째째한 사람보다는 손 큰 사람이 훨씬 더 매력이 있지요.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보다 많은 것을 퍼줄 수 있는, 아니 그보다는 통 큰 사람들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은 몸에 달려 있고, 통은 마음에 달려 있어 하나밖에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안에 있으므로 서로의 위치는 극과 극입니다. 분명 이 둘은 둘이나, 결국 둘이 아니고 하나에 있음은 손에서 마음을 혹은 마음에서 손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이 모두를 사람의 삶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손 큰 사람도 쉽지 않은데 어찌 통 큰 사람까지 바랄 수 있겠습니까마는 결국에는 통 큰 사람이 크게 살지요. 그런데 손 큰 사람은 눈에 보이나 통 큰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고 맙니다. 참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일까요? 세상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고들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오직 눈에 보이는 몸에만 눈독을 드립니다. 그래서 얼굴과 몸매는 그 어느 때보다 지고의 칭송을 받아 그 극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몸의 향기에만 눈독을 드리니 어찌 온전한 일자리가 눈으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몸에 맞는 일자리란 언제나 한정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몸이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환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아니 아무리 풍요하고 묘하다고 하더라도 몸 그 자체로 유한할 뿐만 아니라, 한 찰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몸을 저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바로 살리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가다듬을 때 몸에 익숙한 일자리를 언제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그 삶으로 인해 일자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몸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마음을 함께 가진 사람이고 깨어(覺)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치고 일자리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한낮에만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한밤에도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일자리가 없을 수가 없지요. 그들은 큰일도 마다하지 않고 작은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은 큰일 따로, 작은 일 따로 하나, 깨어 있는 마음의 사람들에게는 그 모두가 하나의 일이므로 모든 것을 하룻날에만 그냥 묶어 두지 않습니다. 그 하룻날은 내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일에 서서 그들은 오늘의 일들을 자기 전체에다 묶어 순리에 따라 서서히 풀어 나갑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일 그리고 일과 일이 결코 부딪치지 않습니다. 하나의 유기체가 그 생체리듬에 따라 진행되고, 이 우주질서가 하나의 생명처럼 흘러가듯이 그들은 하룻날에서 이튿날을 함께 살아갑니다.
참으로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것은 몸의 생각이지, 깨어 있는 마음의 생각이 아닙니다. 몸의 생각에 따라서만 일자리를 찾으니 찾기 어렵고, 설령 찾는다고 하더라도 몸의 한계로 불평투성이이고 소외투성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싸움도 일어나고 파업도 일어나지요. 이 때 어느 한편이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승자는 승자대로 그리고 패자는 패자대로 상처를 입게 되어 그러한 상처가 결국에는 사회 전체 내지 사람 전체에 폐해를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승리야말로 정복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패배자의 마음 가운데 있다 함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그러하였고 예수가 그러하였는가 하면, 희랍이 로마에 정복되었으나 결국에는 로마가 정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로 구별되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일자리는 몸을 위한 일자리라기보다는 마음을 위한 일자리입니다. 몸을 위한 일자리는 마음을 갈라 놓으나, 마음을 위한 일자리는 몸을 하나로 묶어 일일신日日新하게 합니다. 일일신의 마음이 몸과 함께 할 때 일자리는 지천에 깔려 있게 되고, 지천에 깔려 있는 일자리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다시 태어난 일자리는 이미 그 옛것의 허물을 벗고 값진 것으로 되나, 그것 또한 인연의 고리에 매여 허물로 영겁에까지 이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안肉眼에 보인 것이지, 불안佛眼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법안法眼에서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