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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대하여 불교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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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고은 1991년 12월 118호
이 글은 지난 11월 18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쉐라톤워커힐 국제회의장에서 하와이 대원사와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제5차 “불교와 평화 국제 학술회의”에 발표된 논문입니다. 이 학술회의는 평화와 정의 구현을 위한 불교사상의 사회적 실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2년마다 열리며 세계적 석학들이 다수 참여하는 뜻깊은 국제회의입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 자리는 어떤 정치적인 지리보다 훨씬 덜 각광받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의의를 가져야 할 사명으로 숙연한 바 있습니다.

문득 나는 60년대 말의 베트남 전쟁 마지막 시기를 떠올립니다. 럿셀이 \"세계는 베트남으로부터 양심을 배웠다.\"라고 통탄한 그 베트남 전쟁 말입니다.
나는, 지금은 통일된 나라의 남부 대도시 호치민 시로 이름이 바뀌어진 사아공 시가지로 가기 위해서 탄소누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 공항에 여객기보다 공군 시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베트남 남부의 정글과 해안 동지 그리고 사이공의 뒷골목 따위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나는 어는 불교 사원에 갔습니다. 머리를 이상하게 남겨 두고 삭발한 어린 행자의 시봉을 받고 있는 늙은 스님의 입에서 호아빈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소리는 미국본토에서 젊은이들이 부르짖는 반전 투쟁에 대한 바다 건너의 한 응답처럼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몇 십만의 젊은 병사를 베트남에 두고 또 한 몇 백만의 젊은이를 그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베트남의 한 스님은 그 전쟁과 반전을 넘어 호아빈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베트남의 불교승려들이 그들의 사원 안에서 기원하고 있는 비정치적인 의미뿐이었다면 한갓 늙은 혐의 체념 어린 넋두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사신공양捨身供養이라는 불교의 특별한 현신 행위를 신도나 시민들이 모인 거리에서 썩어 빠진 독재와 매판세력에 맞선 반독재 투쟁의 절정에서 보여 주었을때 호이빈의 의미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기억 가운데에서 그 말은 아직까지도 사라질 줄 모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지면 그 당시의 사건으로서의 불교와 본래 추구해 온 오랜 수행주의로서의 불교는 서로 어긋나서는 살아 있는 불교가 될 수 없습니다.
호이빈이라는 베트남 말을 굳어 풀어 보지면 한자말로 화평和平입니다. 물론 화평은 평화이지요.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이 평화라는 뜻인 호이빈을 반전, 전쟁을 반대한다는 응답으로 상정했지만 평화는 다만 전쟁의 반대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쟁의 반대나 전쟁의 싱대가 아닌 것 이상의 높은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서구의 평화 이론들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R.아롱의 평화에 대한 정의 定義말입니다.
서구에서의 모든 의미의 어원은 라틴어에 있습니다. 이런 말을 동양에 적용한다면 한자의 상형 안에도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아니 심지어는 한자의 발생 자체를 바벨탑 사건에 의해서 모든 언어가 갈라진 뒤의 그 한 족속이 바로 한족蘭族이고 그들의 한자야말로 구약 창세기와 관련된다는 주장도 교묘한 한자 풀이로써 내세우고 있습니다
아무튼 한자의 평화 平和를 살펴보면, 平은 저울 양쪽의 물건이 무게가 똑같은 상태입니다. 和는 未와 口로 나뉘는 데 밥이 입으로 들어간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질의 공정한 분배나 상태만이 비로소 平의 조건이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다 和는 바로 밥을 먹은 뒤의 그 배부른 상태로서 비로소 평과 화가 합쳐서 평화를 체험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고상한 정신 체계나 사상도 배가 고픈 상태인 굶주림과 빈곤에는 아무런 설득력을 갖출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문자의 성립은 충분히 터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원초적인 뭇으로는 평화는 골고루 살수 있는 배부른 세상의 몫입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이직도 몇 억이나 되는 굶주리는 사람이 있고 충분히 더 살 수 있는 사람이 질병의 치료도 없이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음을 볼 때에 이 같은 고통에 대한 치유와 해방이야말로 평화인 것입니다. 종교에는 사회 구원 사업도 있고 이를 정신적으로 극복하려는 수행도 있는데, 불교 역시 이러한 중생에 대한 궁극적인 구제를 실현할 수 있는 자비를 가장 크게 떠올려 마땅합니다.
여러분은 각 지역의 불상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신행 新行의 대상으로서 배려하든, 학문이나 예술의 대상으로 삼아 연구하고 감상하든, 아니면 그저 구경꾼으로서 멀건히 바라보든 간에 여러분은 불상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티베트의 불상과 중국당송시대의 불상은 다릅니다. 고대 한국의 불상과 달리, 중세 일본의 불상은 그것이 한국으로부터 건너간 불상으로부터 유래되었지만 어느덧 같을 수 없는 것으로 된 것입니다. 더구나 서인도 지역의 간다라 미술에서 보이는 불상과 동남 아시아의 불상도 아주 많이 다릅니다.
그것은 이들 불상을 이룬 그 지역의 인간과 사회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석존 입멸 훨씬 뒤로부터 발달한 불상은 이를테면 야쇼카 왕 시대의 그것 한가지로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율이 숭상되는 지역에서는 밀교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이루어진 보살상은 배척당하기 십상이고, 예술적 역량이 가장 완숙한 시기의 한국 백제 미록반가좌상은 다른 지역의 그것에 대해 독특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혀 다른 불상에서 한가지 기본적으로 공통된 것은 부처님의 얼굴이 평화로운 얼굴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명화 그 자체이거나 평화 그 자체로서의 얼굴이지요.
그것은 흔히 예를 드는 모나리자의 미소와는 또 다른 형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그림에서의 배경론으로 본다면 모나리자라는 여인의 배경을 전혀 다른 것, 이를테면 함부르크의 창가 婚街를 배경으로 했다면 그 미소는 영원한 미소가 아니라 한 손님을 유혹하는 교태로서의 미소로 바뀔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불상의 명화를 표현하고 있는 얼굴은 눈 하나 입 하나 따로따로 떼어놓으면 전혀 미소나 기쁨의 표시가 아닌데도 그것들을 다시 제자리에 두면 평화스런 얼굴이 됩니다. 웃지도 않는데도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의 보일 듯 말듯한 웃음을 나타내는 평화의 희열이 거기에서 우러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평화란 이 같은 불상의 얼굴로 강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번 임무를 마치고 경주 불국사라도 간다면, 그곳 석굴암 석가모니부처님의 명화가, 동해 해돋이 무렵의 머니면 햇살에 어려 나나내는 그 적정寂靜의 세계가 얼마나 감동적인 가를 알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불교에서는 이처럼 불상의 조각 예술과 회화 예술에서 이러한 평화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불고가 전파될 때도 이 불상을 모시고 가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형상으로부터 전파됩니다. 형상 없는 상태를 지향하는 불교인데도 형상은 아주 소중한 방면이지요.
그런데 이런 불상의 평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사성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하자면 불교사장은 자비와 평화의 시장이고 그 사상이 평화의 형상을 이루었지요. 이는 불교 사상과 신앙이 담긴 경전이야말로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만들어진 경전, 즉 평화의 경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법구경은 어떤 경쟁이나 전장에서 이기는 일은 바로 원한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섭대승론은 인내와 인욕의 가치를 역설하면서, 인내는 능히 나와 남의 평화를 낳는데 내가 성내는 잘못에 물들지 않으면 나의 평화요, 분노와 원한을 일으키지 않으면 남의 괴로움을 낳지 않으니 이것이 곧 남의 평화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나 한 지역과 지역 사이의 군사적인 관계로 말해도 거의 고전적으로 부합하는 평화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들을 그저 단순논리로서의 현실 방임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 당시에 그의 사촌 아우인 제자 아난은 승단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존나에게 외도들이 싸움을 걸어와도 \'거기에 이끌려 들지 빌라, 만약 싸움을 일으키면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괴로움을 낳게 하고 나아가서 여러 천인 중생에게도 괴로움을 낳게 한다\'고 경고하는 장면이 경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불고가 회교의 침략으로 그 발생지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장차의 커다란 불교사로 보아 이러한 반투쟁의 이념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회교는 그들의 반월도가 그런 것처럼 싸움의 종교라고 해도 될 만큼 많은 싸움의 역사를 이루어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원시 기독교가 로마에서 정당화되기까지의 순결한 자기 회생으로 쌓아올린 평화 정신을 버리고, 점차 이 세계를 정복하는 역사로 나아가서 오늘에 이른 것에서도 기독교의 박애 사상과 그들 배후의 제국주의가 한 몸인 것이 근대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여지없이 드러나 버린 사실로 증명됩니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의 전쟁은 불의의 전쟁을 거부하는 것이지만, 그 의도로부터 변질되어 서양사의 수치인 없년 전쟁을 초래했고 그 뒤로도 으례 전쟁의 본능을 억제하는 받성은 흐지부지 되기 일쑤였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전쟁을 인간 사회의 자연 현상으로 파악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솔직성을 보게 됩니다.
동양에서의 군사란 본래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무기를 가로막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 광대한 지역에서도 비군사적인 시대는 그렇게 길지 않았습니다. 노자와 공지는 바로 춘추 전국 시대라는 전쟁으로 가득한 난세를 헤매면서 평화와 행복의 풍부한 근본 이념을 더욱 꽃피웠던 것입니다.
불교는 이런 세상에 대해서 그동안 너무나 출세간주의로 일관해서 봉건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되는 시기와 현실로부터 떠난 자기 세계의 시기로 그 역사를 충당해 왔습니다.

오늘 한국의 선종은 중국선을 그대로 이어받아 세상의 모순이나 갈등으로부터 유리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인류사상 전쟁 기간이 평화 기간보다 훨씬 길다는 비극은 평화 자체까지도 전쟁의 준비 기간이 아니면 전쟁으로 가고 있는 피의 예비 단계로 보지 않을 수 없는 비극과 함께 세계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관 문명의 발달을 강조할수록 전쟁의 역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런 전쟁의 역사에 충실하게 해 있는 강대국이나 그 밖의 국가들의 지도자가 비둘기를 날려보내고 창공을 바라보며 박수 칠 때의 모습처럼 위선적인 것은 없다고 느끼다가 불현듯 날아가는 비둘기에 생각이 미친 적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모든 동물들은 그 활동 구역을 확보하고 있습디다. 새들도 그런 구역에 대한 의식이 철저합니다. 그런데 조류학자에 따르면 비둘기는 이런 활동 구역을 곧잘 벗어나는 침범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새는 전쟁의 새일지언정 평화의 새가 아닙니다. 그것이 아무리 노아의 방주方舟에서 살려온 새라 할지라도 밀입니다. 굳이 덧붙어 자면 일본의 군신들을 섬기는 야스쿠니 신사의 하얀 비둘기가 보여 주는 질서 정연한 비상은 훈련된 것에 지나지 않고, 서울시청과 지난날의 서대문교도소 사이를 평화롭게 통근 비상을 하면 비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철저히 평화의 의지로 단련시켰을 때나 그것들은 타 영역 침범의 본농이 퇴화함으로서 평화의 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란 새의 세계에서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지금 세계는 이른바 냉전 체제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고민이 다 들어 있는 레바논도 평화를 향해서 그 지쳐 버린 삻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페르시아 만 전쟁이 일단 끝나자 국제 사회는 외무장관의 시대에 접어들였습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평화 회담을 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여 있는 이곳 한반도는 어디입니까.
이땅 이야말로 얄타 체제에서 비롯한 냉전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첨예하게 대결하고 있는 휴전 상태
에 있는 분단 국가입니다. 이런 곳에서 한국의 휴전 기간이 전시냐 명시냐를 따지는 이론의 대립도있거니와 지구 위에 마지막 남은 분단 국가에서, 지구 위에서 아직도 냉전체제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고 총구멍을 맞댄 지역에서 명화에 대한 관심을 나누는 불교의 전망은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짐을 진 것이기도 하고 바람직한것 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토록 많은 대가를 바친 반천 반핵 운동도 이 지역의 실질적인 비핵화가 가능하다면 더 이상 지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땅에도 가장 삼엄한 긴장 상태로부터 한 발짝 한 발짝 평화에 다가가는 역사를 확신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불교의 역할이 과연 무엇인가를 자문해 봅니다. 먼저 불교가 평화의 기쁨의 허상에 덩달아 춤을 출 것이 아니라 아주 진지한 명화 운동에 스스로 나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교는 원융의 평화사상이고 자비를 행하는 명화의 종교라고 아무리 큰소리로 말해도 얼마든지 떳떳합니다. 한국의 고대 승려 원효는 그의 화쟁 사상으로서 일체의 분별을 극복 승화시키는 한국 불교의 첫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불상의 평화, 부처님 얼굴이나 그 앉아 있는 상태에서 그윽하게 풍겨 나오는 평화적인 정감의 극치는 그것을 인간사회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사업이 없이는 어떤 탁월한 주장도 공리 공론에 그친다고 하겠습니다.
왜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는가. 왜 부처가 곧 중생이 고 중생이 곧 부처라는 불교 고유의 창조적인 고양商動이 어느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지각성에서만 가능한가 불상의 평화가 바로 우리 모두의 명화로 확대될 때, 비로소 평화를 평화 이전의 상태로부터 달성하는 불교의 대승적 니르바나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고가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려면 먼저 그 목적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대체로 부처가 되는 일인성불에 두었습니다. 부처가 되는 일은 단적으로 말해서 가장 빠른 방법이 선수행입니다. 우리나라의 남쪽 선원鄭完에는 삼일암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옛날 어느 선사가 수행 정진한지 사흘 만에 도를 통했다고 해서 삼일암이지요
그러나 부처가 되는 일이 이렇게 빠른 기간 안에 가능한 것인지는 이 자리에서 길게 늘어놓지 않겠습니다. 다만 중생이 그 카르마로 하여금 부처가 되거나 해탈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어울려서 타력 신앙을 낳아서 부처님을 섬기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의 절실한 염불 신앙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사실을 전제하면서 나는 감히 주장합니다. 부처가 되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 불교에서 진정한 목적은 자비를 실천함으로서 일체의 불화와 갈등의 원인인 전쟁. 흉악 범죄, 착취, 억압, 기아 인구 과잉, 질병, 환경 파괴와 같은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세계 구원이 목적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칸트의 영구명화이론을 능가하는 평화 논리가 불교 정신을 통해서 구축되는 것과 함께 그 실천 문제에 대한탐구가 있을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성불보다 자비와 평화를 실현하는 불교에 대해서 말했거니와 이는 정의보다 명화를 가치의 상위 개념으로 삼는 오늘의 국제 현실에서도 동떨어진 것이 아닐 터입니다. 특히 불교의 중도사상의 엄연한 객관적인 인식은 불교의 근본 교리가 전혀 배타적이지 않은 모성애적인 보편성과 함께 아我와 비아非我사이의 대결 구조로 된 세계를 변혁시키는 힘으로 나타나자면 행行인 종교인 불교에 행이라는 말보다 그 실체를 더 많이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불교의 승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체가 아닌 공동체를 뭇하고 있습니다. 이는 평화 역시 어느 한사람의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희망으로 시작한다고 여길 때 교단의 화합중이야말로 인간과 인간 씨의 명화,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적 평화를 거쳐서 세계 평화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미국이나 소련이 핵의 부분적 폐기를 발표한 것을 어떤 고매한 명화사상 때문이라고 봐 않습니다. 핵 폭발물이라는 죽음의 무기를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그들의 삶의 질은 하락하며, 그 많아진 핵으로 하여금 어떤 이득도 더 이상 있지 않다는 현실에 이르러 그것을 어느 정도 폐기하기로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1950년, 미국과 소련이 원자 폭탄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 인도식 네루는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랑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자랑이다’ 라고 말했을 때, 도리어 그는 고대 인도로부터 연면하고 있는 평화의 사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평화는 철저하게 불교적입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어떤 섭리 사관에 입각해서 은혜를 받는 상대가 아니라 우리 하나 하나의 평화로 가는 역사적인 삶이 만들어 내는 인간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세계관으로 보자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윤회를 거듭하면서 단 한번도 진정한 평화를 누려 본 적이 없는 전생들과 함께 이 세상의 끊임없는 불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제 이 같은 숙세의 악업으로부터 다시 태어남으로서 그동안 인류가 저질러 온 모든 전쟁과 재난을-영구히 파묻어 버리는 장례식을 거행 해야하겠습니다.
나는 이 연설의 마지막에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를 생각합니다. 그 좌절의 끝부분이 하나의 반전론과 평화론으로 되어 버리고만 것은 문학적으로는 지적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러시아 군의 총사령관이 전쟁광인 나폴레옹에게 모스크바를 비워 두고 철수하는 작전의 어리석은 듯한 그러나 뛰어난 지혜 -그렇습니다. 이것은 전술·전략의 차원을 넘어서서 지혜입니다-와 또 하나 프랑스 군대가 얼어 죽어가며 러시아를 철수할 때, 러시아 군은 러시아 영토 밖에까지 추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평화에 대한 철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만약 러시아총사령관이 프랑스의 전쟁 황제였다면 아마도 파리까지 추격해서 떵떵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실이야말로 불교적인 평화 애호 사상과 완전 일치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1955년 반동 회의에서 채택된 평화 10원칙의 의의는 그것이 지난 시대의 제3세계 존재 양식에 불과한 유산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한 최선의 평화 헌장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평화사장이 알게 모르게 스며든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국제적으로 평화 증진을 위한 노력이 있어도 이에 역행하는 국가 범죄의 증대가 바로 평화의 적이 된다는 것을 환기할 때, 우리는 국제 문제뿐만 아녀라 국가 내부와 사회, 그리고 인간 하나 하나가 얼마나 평화식 불상으로 재현 되느냐에도 순결한 열의를 바쳐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지구 위에서 평화란 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고 부처라는 것도 굳이 있을 필요 없는 전불全佛, 전불토全佛土의 세계에 대한그리움을 품고 실어가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릇이겠습니까.
근대 한국의 승려이자 시인인 한용운은 그의 불교 유신론에서 파괴는 곧 건설이라는 메시지를 원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 모든 평화의 적을 파괴하고, 그 파괴로 하여금 평화를 건설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파괴란 폭력이 아니라 이제까지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로운 지혜의 결집일 것입니다.
불교와 자비, 불교와 해방 그리고 불교와 평화는 어느 쪽이 덜하고 더한 것이 아닌 펑平이라는 글자처럼 똑같은 값어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는 평화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손님이 아니라 평화에 관한 한 주인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