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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 박한영 큰 스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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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서정주 1991년 12월 118호
해후 邂逅
1933년 초겨울에 내게도 인연이 닿아서 석전 박한영 큰스님을 만나 뵙게 된 것을 나는 지금도 큰 복으로 여겨 하늘과 땅의 영원 속에 감사한다.
이때에 이미 예순넷의 노인으로서, 이 나라 불교 교종의 최고 대표자였던 큰스님께서 이 사람을 꼭 한번 만 나고싶다고 해서, 이 전갈을 내게 전해 준 불교 신자인 배상기씨를 따라 서 서울 동대문 밖의 안암동에 있는 개운사騙棄寺 대원암으로 찾아가서 뵈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1933년 가을에는 레오 툴스토이의 「가난한 사람들」편의 인도주의에 빠져서 서울 마포의 빈민굴에 살면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며칠 동안 넝마주의 노릇을 하며 지낸 일이 있는데, 그 당시의 내 시골집 형편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고 그러한 내 사정을 잘 알 던 중학 선배인 불교 신자 배상기 씨는 그가 존경하는 스님인 우리 박한영 스님을 어느 날 찾아뵙고는 나를 마치 구도자처럼 소개해, 기특한 소년이라는 석전 스님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실제의 내 모습은 그런 구도에도 철저하지 못해, 거지반은 허영으로 그 넝마주이들을 따라다니다가 정동의 영국대사관인가 미국대사관 근처인기에서 예쁜 서양 여자가 내팔을 뻔이 쳐다보고 있는 순간을 겪고는 부끄럼증이 후욱 솟아올라 이내 그 넝마주이 노릇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던것인데, 우리 석전 큰 스님은 물론 내 본 색을 잘 들여다보지 못한 채 그분의 즉흥卽興으로만 나를 보고 싶어서 부르신 것이다.
또한 나는 나대로 세상의 시끄러움이나 따분함과는 다른 절간의 고요함을 좋아하는 취미도 있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은 데다가, 석전 스님의 그런 특별한 이해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으므로그분의 부름에 쾌히 따렸다.

스님을 처음 만나 뵈러 갔을 때, 내 몰골은 그야말로 구면 봉발 垢面蓬髮증로 형편없었는데, 스님은 그런 나를 마치 구도의 순례 巡禮 길에 있던 진짜 레오톨스토이 백작을 대하듯할 뿐만 아니라 국민학교 시절의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난 듯이 여간 반기시는게 아니었다. \"여보게. 무엇 때문에 넝마주의와 같은 고생살이를 일부러 사서 하고 다녔지? 집에 가면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별스런 사람도 다 보겠군. 어디 보세.” 스님은 앉았던 지리에서 일어서서 내 곁으로 바짝 다가앉으시며 내 낯을 뻔히 들여다보시고는 껄껄껄껄 매우 반가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나셔 물으셨던 것이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대답도 못하고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잠깐 침묵이 흐르자 큰 스님은 드디어 \"廷柱!”하고 미리 일아 두신 내 이름을 부르시고는, ‘잘 왔네. 잘 찾아왔어! 자네, 그러지 말고 여기서 나하고 같이 불경 공부공부나 한번 해보세. 어떤가?하고 내게 자기의 제자가 되기를 권하셨다. 스님은 이때의 내 나이와 같은 열아홉 살에 전라도의 한 부농의 아들로서 유학의 사셔 삼경을 다 마치고 자원하여 불교 에 귀의하셨음을 나는 뒤에 들어서 알고있거니와. 그런 그의 불교귀의 때의 심정을 이분은 나를 앞에 두고 회고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분의 그늘이요 환영인지라 나는, 그저 한 반가운 친구 같은 마음만이 저절로 일어나서, “예\"하고 그의 제자 되기를 자원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그 리고 그 이튿날 나는 이분이 지지켜보시는 가운데에 그 심난스런 머리털올 칼로 박박 밀어 버리고, 아직 중이 된 것은 아니지만한 불경학인佛經學人으로서 이곳 조선불교중앙강원의 학생이 되어, 스무명 남짓한 학인들 사이에 끼이게 되었다. 내가 한 스님의 손에 머리를 깎이고 있을 때, 옆에서 시종일간 지켜보고 계시던 우리 석전 스님께서는 내 머리가 두루 다 깎인 것을 보고 한번 뺑 둘러보시고는 ‘곡 알 같구나! 파아란 알 같이 생겼어!”하시며. 팩 유쾌해 하셨다.

내가 1933년 겨울부터 석전 스님에게서 배우기 시작한 물경은 능엄경煙嚴經이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사촌 아우이자 제자인 아난 阿難과 천민 계급인 마등가摩登伽라는 미인 사이의 염사艶史를 다루어 집요한 마등가 여인의 유혹과 이를 이겨내는 아난의 노력을 표현한 이 불경을 이분은 왜 먼저 내게 배우게 하셨을까? 그것을 석전스님은 내게 말씀하신일은 없지만 아마도 이 려난 女難의 극복이라는 것이 젊은이들의 인생을 건실하게 이끄는 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임을 잘 아시고, 스님은 내게도 먼저 이것을 자각시키려고 이 경을 골라 가르치신 걸로 짐작된다.

이듬해 봄까지 이 능염경을 아침마다 배우고 지내는 동안 스님은 내게 잘 배운다고 칭찬도 많이 하셨다. 그러나 다른 학인들에 비해서 내가 어느 만큼이라도 잘 배우는 듯한 인상을 이분에게 주었다면, 거기에는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일본말로 된 불경도 이쉬운 대로 읽을 수 있어서 능염경도 일본말로 된 책을 늘 참고하여 풀이하였으므로 우리 큰스님 앞에 앉아서 그 풀이를 할 때에도 어느 정도 유창함을 나타낼 수가 있었지만, 일본말로 된 책을 읽기에 아직 서투른 다른 학인 스님네들은 나만큼은 못했던 바로 그 한 기자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나는 학d니 스님들에게는 물론, 우리 큰 스님에게도 사실대로 알려드리기는 했던 걸로 기억한다
계속

지난 11월호에 실었던 본 글 가운데에 제1회, 동국대학교 역경원장 이었던 운허스님의 법호가 경허 鏡虛로 오식 되었기에 여기에 말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