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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깊어지는 공부를 해야겠다 금강 / 해남 미황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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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1년 06월 232호
왜 이걸 잊고 살았을까.’
정확히 이해되어지며 마음이 그대로 맑아지는 《육조단경》을 읽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을 때마다 저절로 우러났던 신심, 그리고 환희. 그 때는 지금보다 더 감명이 깊었었다. 아마도 지금 읽으면 오히려 그렇게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당장 육조 스님처럼 살고 싶었다. 모든 것 놓아버리고 오로지 도만 닦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등학교 일 학년 끝 무렵, 해남 대흥사 아랫마을에서 태어나 맑디맑은 영혼으로 세상에 서 있을 때였다.
참선을 하시는 한 선생님에 의해 전해 받았던 《육조단경》이 내 지난 생 오래 걸어왔을 출가수행자의 길을 다시 틔어준 셈이다. 지난 겨울에 곡성 성륜사 참선법회에 들렀더니 마침 선생님께서 친구분들과 함께 와 계셨다. 이미 정년퇴직을 하고 삭발을 하신 채였는데, 여전히 공부엘 열중하고 계신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 뒤 《선가귀감》과 조사 스님네들의 어록을 읽고는 아예 짐을 싸들고 선생님이 소개해 준 지금의 은사 스님이신 대흥사의 지운 스님에게로 갔다.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었던 은사 스님과 스님의 방안 가득했던 책에 반해 행자가 되었고 절에서 학교에 다녔다.
새벽에 일어나 예불 드리고 밥지어 은사 스님의 밥상을 차려놓고, 도시락 싸 가지고 이삼십분을 뛰어서 버스를 타고 학교엘 다녔다. 얼마 전 대흥사를 지나면서 ‘집에서 해주는 밥 먹고 편히 학교에 다닐 수도 있었는데 내가 왜 그 때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도의 길에 빨리 들어가고 싶어 조급한 마음을 내었던 그 시절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방학 때는 《초발심자경문》과 염불을 익히고 나무 패서 뒷곁에 쌓아놓으며, ‘나는 출가자’라는 심정으로 불교교리에 심취한 채 꿈 많은 고교시절을 보냈다.
나는 분명 전생에도 출가수행자였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로 다음날 정식으로 출가하기 위해 해인사로 가 행자실에서 하룻밤 자고 눈을 뜨니 들어오는 광경이 낯익은 것들이었다. 예전엔 경학원 쪽에 행자실이 있었는데 그 곳의 김치창고며 건물들이 예전에 보았던 것들이었다. 불 때는 부엌의 구조까지도 기억해내곤 ‘아하 내가 전생에 이 곳에서 중노릇을 했구나’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절에 들어온 것에 고민 한 번 제대로 안하고 아무런 갈등 없이 당연히 내가 공부하며 갈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나 훌륭한 수행자였든 아니었든 간에, 오랜 세월 수행해온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도 지난 생에 출가자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해인사에선 처음 행자가 들어오면 한 주 정도 머리를 깎이지 않은 채 지켜본다. 차수叉手를 시켜 후원에 세워놓거나 설거지 정도 시키면서 마지막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남을 자는 남고 떠날 자는 떠나게 된다. 그리고 한 주 지나면 삼천배를 하고 삭발을 한 다음 비로소 행자복을 입는다.
내가 행자방에 들어간지 사흘째 되는 날 나보다 며칠 먼저 들어온 행자가 삼천배를 한다기에 행자반장에게 쫓아가 ‘나도 삼천배하고 머리 깎고 행자복 입으면 안 되느냐’고 할 만큼 빨리 행자복을 입고 싶었다. 지금이야 많이 느긋해졌지만 그 때는 어서어서 공부해 걸망지고 공부하러 다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해인사 행자방의 규율은 엄격하기로 소문나 있지만 내가 행자로 있던 시절에는 규율은 엄격하되 애정이 잔뜩 담겨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위아래 서로 챙겨주고 아껴주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일찍 출가하여 훌륭한 도량에서 좋은 도반들을 만날 수 있었던 복됨을 누리고 있었다. 행자시절을 끝내고 그때 같이 계를 받은 도반이 모두 열 넷이었는데, 우리 도반들이 제방에서 가장 공부 열심히 하는 스님들로 소문 나 있는 걸 보면 그 시절 우리 행자방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만 보고 착실히 행자시절을 보냈지만 그 가운데 두 여인으로 인해 한 번은 눈물을 흘렸고 한 번은 잠시나마 오래토록 뒤를 돌아다 봤다.
아마도 출가인이면 누구나 부모님으로 인해 마음이 무거워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라는 존재는 더 마음을 아리게 한다. 사남매 중 셋째인 나는 ‘해인사로 가 한 삼 년 공부하고 오겠다’는 말씀을 어머니께 드리고 집을 나왔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속에 어머니가 짐으로 남아 있었다. 행자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는 그만 편지봉투만 보고도 눈물이 쏟아져 아무도 몰래 학사대 뒤로 넘어가 혼자 편지봉투를 뜯었다.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간단한 내용이었는데도 어머니의 편지를 보고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움보다는 언제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던 어머니, 지금도 그 이름 앞에서는 아릿한 아픔으로 눈시울이 뜨겁다.
내 어머니는 내가 강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돌아가셨다. 새벽 한 시 어머니가 위독한다는 전갈을 받고 해남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후회했다. ‘출가를 미루더라도 한 해쯤이라도 잘 모셨어야 했는데…’라고. 스님들이나 노스님을 극진히 시봉하면서 행자도반들끼리 곧잘 그랬었다. ‘부모님께 이렇게 잘했더라면 온 동네 효자 소리 들었을 텐데’, 그러면서 두고 온 부모님께 죄송해 했었다.
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번뇌도 아니고 그것이 도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때 지극한 마음,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공부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오히려 애달파 하고 집착할 때 공부에 방해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기에 강원에 있을 때도 방학이 되면 아버지 없이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들러 안심시켜드리고 돌아오곤 했다.
고백하자면, 어머니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나는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했었다. 하나는 ‘이렇게 쉽게 가시나’ 하는 회한으로 가슴을 쳤고, 한편으론 ‘이제는 온 마음을 다해 죽어라 공부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중환자실에서 한 주 동안 출가한 아들의 시봉을 받고 어머니는 떠나셨다. ‘무상無常’이라는 무언의 법문과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남긴 채.
그리고 봄날이었다. 한 벌 밖에 없는 행자복 앞이 반들반들 때가 끼어 있던 어느 날 한 사람이 면회를 왔다. 학교 다닐 때 대흥사에 들르던 여학생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잠깐 나누고 일주문 밖 팔각정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서는데 문득 일어났던, ‘이대로 따라 가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시 들었던 일도 행자시절의 짧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지금 한반도 끝 해남의 아름다운 절 미황사에 있다. 나는 왜 여기 서 있는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나는 출가수행자로 사는 것이 삶의 방식 중 가장 멋진 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욕망’이라는 가짜에서 벗어나 ‘대자유’로 나아가는 길에 나는 서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존재도 자신이다. 아름다운 삶은 무엇인가. 올바른 삶이다. 이천오백년 전에 오셨다 간 한 선각자가 걸었던 길, 그리고 매순간 그가 제시해준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올바른 삶 아니겠는가.
출가의 길을 결심한 후로 나는 늘 서원했고 또 발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향기를 뿜어내는 수행자로 살자고, 그리고 누군가 나를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맑아지는 모습을 지닌 삶을 살자고.
매순간 정확하고 견고할 수 있도록 더 깊어지는 공부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