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농부의 마음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시적암 이야기 - 법장
1999년 11월 213호
올해는 바람과 비만 풍성했다. 장마부터 시작하여 가을이 거의 중간쯤에 와 있음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어쩔려고 이러는지 가을을 한껏 느끼게 해 줄 코스모스마저 지쳐 겨우겨우 엎드린 채로 피어 지탱하고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맑은 날 보아야 아름다울 것인데 가을빗속의 꽃은 그럴 겨를이 없다. 장마 전에는 온갖 새들이 밤 새우며 울더니 그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뒤죽박죽 되어버린 자연의 조화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일. 하지만 가을걷이를 앞둔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다. 여름 내 흘린 땀에 비해 거둘 것이 별로 없어서 이다. 언덕 아래 밭둑을 내려다보면 한숨이 저절로 새 나온다. 실농한 농사꾼의 심정도 알 만하고. 올 한해 참 땀 많이나 흘렸었다. 그러면서도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은 서툰 농사 기술과 매번 놓쳐 버린 시기였지만, 순전히 그 탓만도 아닌 것이 올해 유난히 잦았던 태풍과 비 때문이었다.
그런대로 잘 돼 가던 작물들은 비바람 한번 크게 쳐 버리면 맥을 못 추었다. 그 중에도 ㅅ보살과 가장 애썼던 고추농사는 허망하기까지 하다. 늦게 이식했었고 부족했던 퇴비 깐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미영이와 첫물 고추를 딸 때만 해도 콧노래를 불렀으니까. 이 땅에서 웬만큼만 된다 해도 누구도 몇 근 주고 아쉬운대로 인심도 낼 만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문제는 말리기 였다. 아무리 작황이 좋았어도 마무리에서 날씨가 부조해 주지 않으면 농사는 허사다. 아랫마을에는 그럴 때를 대비해서 건조기에 한번 밀린다는데 그런 데는 별 매력이 없었다. 어떻게든 햇볕에 말려 보려다 반은 썩고 나머지는 희니리가 태반이다. 인심을 내기는 커녕 먹을 것도 모자랄 지경이다.
누가 그랬는지 ‘하다 안 되면 농사나 짓지’라고. 별 웃기는 소리 말라고 꾸짖어 주고 싶다. 하다 안 되면 덤비는 것이 농사는 아니더란 말이다. 세상 일 어느 것도 의미나 가치를 나름대로 다 가지듯 농사도 마찬가지. 차근차근 익히고 자연을 따라야만 될 일이다. 특수하게 장치하고 인위적인 기술로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냥 자연과 짝하며 흙을 일구려면 순리를 어그러뜨리지 않는 겸허함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누구나 다 아는 진리이기도 하겠지만. 농사를 쉽게 여긴 건 아니다. 욕심대로 다 채워지리라 기대했던 것도 아니다. 경험이 쌓여 안 된다고 말들 쉽게 하던데, 당장 살아내야 할 현실도 있다. 재미 삼아 지어 본 농사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한 가지 얻은 것은 봄부터 가을까지 씨 뿌리고 땅 파며 흠뻑 땀 적셔내는 노동의 기쁨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러하였다. 일찍이 맛보지 못했던 노동의 기쁨. 한해 농사는 잘못 지었어도 땀 흘리는 기쁨을 새롭게 찾아냈다. 계획적으로 농사나 지으며 살겠다고 이 산골로 찾아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노는 땅을 그대로 묵혀둘 수도 없고, 서툴고 힘들어도 이런 산골 토굴에 살려면 일하지 않고는 도리가 없다. 굳이 백장청규를 들추지 않아도 다 내 차지인데 또 어쩔 것인가. 대중에서는 운력 시간지나면 일단 멈출 수 있지만, 이런데는 어두워질 때까지 혼자 일하다 때를 거르는 적도 많다. 해도해도 끝이 없고 모양도 나지 않지만, 비가 억수로 쏟아지지만 않으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된다. 큰 의미 부여하지 않더라도 하게끔 되어 있다.
땀으로 멱 감고 앞 개울로 달려가 몇 번 첨병거리다 씻고, 아랫방에 뜨뜻하게 군불 땐 날은 무엇 하나 부러움도 달리 생각키우는 것도 없다.
다만 남은 가을 날씨라도 좀 좋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뿐. 호박이랑 가지도 썰어 말리고 콩도 거둬야 하니까.
밖에 나가 밤하늘을 이따금 쳐다본다. 별이 총총한가. 차츰 농부의 근성을 닮아가는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