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저 술집
술맛이 자주 좋았지.
깃발 높이 날리며
그릇 가득 채워 주는데
어찌하여 팔리지 않나.
아! 그 술집 미친 개들 많구나.
술 사러 온 동자
개에게 물리어 달아나더라.
이 시는 본래 현자가 관직에 등용되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노늘날의 종교의 모습에도 꼭 들어맞는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석가모니와 예수는 저마다 그 무렵의 가장 혁명적인 인간이었고 열린 생명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들의 과제는 언제나 인간들의 삶의 문제였으며 삶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 고통의 해결 방법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서 있는 그 자링서 해결할 수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성계급의 타파를 무엇보다도 앞서 말씀하였음은, 그때에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제도에서 오는것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노예제 사회에서는 가장 큰 인간의 고통은 노예제도일 것이며, 봉건제 사회에서는 토지 소유에 따른 양반 및 지주들과 소작인과의 관계에서 그 고통이 비롯할 것이며, 식민지 사회에서는 외세에 있을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독점에서 또 한 고통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와 간이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인간으 고통도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나 예수가 행한 가르침의 근존 줄기는 관념에서 오는 추상적인 고통이 아니라 상황과 변화의 관계 속에서 오는 다양한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는 현재적인 인간의 해방보다는 종교적인 신비나 영적 활동에 매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앞의 시와 같이 석가모니나 예수의 말씀은 오늘의 현실을 해결해 나가는 데 풍부한 교시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종교라는 조직과 종교인은 얼마나 미친 개가 되어 있습니까.
처사님, 오늘의 종교가 얼마나 부처와 예수를 왜곡시키고 있으며 비종교화되고 있는지는 크게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지적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첫째는, 종교가 그 본래의 목적인 참생명의 해방을 실천하기보다는 종교라는 집단 자체가 살아남기 위해서 싸운다는 점입니다. 고등종교가 출현한 지 이천여 년이 넘습니다. 그동안 종교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적응해 왔습니다. 종교 집단 자체가 변화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이러한 종교의 변화는 인간이 겪는 수많은 고통을 해결해 주고자 변화래 온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에 적응하기 위하여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으 내용과 형식의 변화도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가 희생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에 적응하면서 변화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에 교회가 아무리 많고 사찰이 아무리 많아도, 종교는 인간의 현실적인 고통 앞에서 무력하기만 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종교는 더욱 신비화되어 가고 그 교리의 내용도 추상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사실 종교 없이는 살아도 TV없이는 못 사는 것이 지금의 세상 아닙니까. 이와 같이 종교가 무용화되는 세상인지라, 종교인이나 집단은 스스로 생존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종교의 행동양식을 세속화시키고 내용을 더욱 신비화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둘째는, 오늘의 종교가 석가모니나 예수의 근본 가르침을 실천하며 그 가르침은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기보다는 종교의 권위에 대한 믿음과 복종을 강요한다는 점이지요. 본래종교의 교조는 각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사유방식과 세계관을 갖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그들 교조의 밑바탕에는, 똑같이 생명을 열린 사회로 또는 열린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깔려 있습니다. 그 길은 초현실적인 이상세계로 나아감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현실에서의 열림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ꡐ정토세계ꡑ나 ꡐ하나님 나라ꡑ는 현실을 떠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을 새롭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 주는 현실개혁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는 이상세계를 이미 설정하여 두고서 이를 통하여 종교의 권위를 인정하게 함으로써, 종교인을 복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나 예수는 전능자로서 신격화되어 종교의 보호막으로 존재합니다. 이것은 그 분들의 역사속에서의 참모습을 얼마나 왜곡시키는 일입니까. 오늘의 종교는 또한 그 분들의 역사적인 삶의 모습을 추상화시킴으로써 종교의 권위를 인정케 하고 그것에 종교인을 복종시킵니다. 그리고 현실의 고통은 숙명적이며 의식의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니 왜곡된 모습의 석가모니나 예수를 통하여 도(道)나 구원을 얻어야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현실에 대한 개혁과 변혁 의지를 꺽어 버리게 합니다. 다시 말해 현실세계를 평화와 안락의 세계로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자주적인 정신과 변혁의 의지를 없애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석가나 예수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 이 세상의 밝은 열림을 위하여 세상의 모순과 싸우다 죽었지만, 그들을 추종하는 종교 집단이 오히려 그들의 목표를 방해하고 있음은 아이러니컬하지 않습니까.
세번째는, 종교의 보수성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근본가르침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보수성입니다. 종교의 근본 가르침은 본디 혁명적입니다. 악을 고치고 선을 유도하는 일은 혁명적이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일지라도 그것을 판별하는 기준은 사회의 상황과 변화에 따라서 세워져야 할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도 종교는 그 사회에서 가장 앞선 깨우침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수성은 변화에 앞서 있지 못하고 뒤따라 오거나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움과 충돌하고 발전을 저해하며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보수성은 정체된 물과도 같습니다. 종교는 언제나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노력 속에서 변화에 따른 신선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도입해야 합니다. 흐르는 물처럼 언제나 역동적이어야 합니다. 한국불교의 흥망도 썩은 보수성을 어떻게 탈피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흔히 민중불교에 대한불교집단의 몰이해와 강고한 보수성은 얼마나 한국불교가 낡아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며, 얼마나 불교가 왜곡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보기입니다.
네번째는, 종교가 죽은 자를 위한 것 또는 죽음을 준비하는 자의 가교로 생각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본래 종교는 죽은 자나 죽음에 그다지 중요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다만 현실에서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냐에 문제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즈음의 종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사후의 문제에 깊이 천착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의 종교가 얼마만큼 영혼이나 사후의 세계를 인간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신비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가르쳐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후의 세계와 영혼의 유무를 묻는 질문에 대해 그러한 질문은 수행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하늘나라는 너희 가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종교는 포교와 선교 활동에서 사후의 세계와 영혼의 문제를 강변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의 목적을 사후에 좋은 곳으로 가는 데 두게 합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후세계는 다만 권선방편문(權善方便門)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네 가지 문제가 일어나게 된 종합적인 원인은 종교에 노동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노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백장스님의 ꡐ일일부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하라ꡑ는 말씀은 노동이 없으면 종교는 더욱더 세속화되어 갈 것을 우려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처사님 !
오늘날과 같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고, 참다운 종교인을 만나기 힘든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지금은 제3의 종교 변혁 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것을 가름하여 믿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 가름의 기준은 석가모니와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온다면 과연 어떠한 모습과 가르침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고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이 땅에 온다면 오늘의 종교 모습을 보고 무엇이라 말할까요.
오늘 우리가 민중신학이니 민중불교를 운운하는 것은 참된 세상을, 깨어 있는 세상을 열어서 진정으로 종교마저 필요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래의 예수정신으로, 본래의 불교정신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신앙 생활은 이 세상을 불타의 세계, 정토세계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야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개인의 도덕적인 완성과 낡은 사회의 변혁을 끊임없이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처사님, 새해 새아침에 새로운 종교운동을 위하여 힘찬 걸음을 시작합시다. 다시는 보살을 병들게 하고 부처를 병들게 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