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나는 죽는 순간의 내 의식의 전이를 고요하고 명징한 상태에서 바라보게 되기를 원합니다. 수없이 거듭했을 것이나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카르마에 이끌려 빨려들어간 어머니의 태반에서 최초로 눈뜬 나의 의식은 어떤 빛깔이었을까. 내려오고 떠오른 두 기운이 만나 ‘나’의 ‘가능성’이 출발한 그 때처럼, 그 모든 흐름의 역과정을 생생히 인지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모든 의식이 명백히 깨어 있는 상태로 근원의 문으로 들어설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나 자신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흐르는 모래의 강…. 누대에 걸친 죽음의 기억을 간직한 모래 알갱이들이 유사流砂를 이루며 흘러가는 낮꿈을 꿉니다. 흐르는 모래의 강은 개개의 모래 알갱이가 간직한 결절된 죽음의 단층을 넘어 역동적으로 출렁이는 생의 이미지를 낳습니다. 모래의 생성, 그것은 다른 자연물의 생성과는 다른 경로로 나를 매혹시킵니다. 그것은 파괴를 통해서만 생성되며, 거듭되는 무수한 ‘죽음’을 통해서만 모래로서의 생을 완성합니다. 극도의 미분화를 통해서만 ‘자라나는’ 모래! 생사가 깍지 끼고 유려하게 펼쳐보이는 유사의 율동은 나 이전의 나, 그 이전의 나, 모래에서 자갈로 자갈에서 바윗돌로 바윗돌에서 거대한 암석으로 소급해 올라가며 아득한 시절의 나를 보여 줍니다. 그 아득한 시차 속에서 미래로부터 과거로 흘러가는 기이한 연기緣起.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아름다운 그림자를 이끌고 건너가기 위해선 지금의 생과의 치열한 맞대결이 요구된다는 것을 나는 유사流砂를 꿈꾸면서 배운 셈입니다. 이 아이러니. 죽음에 대한 천착으로부터 삶에의 긍정이 시작되다니!
나의 백일몽은 다시 엉뚱한 곳으로 점프하기 시작합니다. 죽음에의 사유를 통해 획득하는 생의 에너지. 인간 사회의 참으로 교활하고 잔인한 대목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가끔 상상하곤 합니다. 죽음을 공부하는 학교 같은 것 말이지요.
나는 16년 간의 제도교육을 무리없이 이행(!)하였지만, 학교 교육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학교 밖에서 얻은 것에 비하면 극히 미미합니다. 초등학교 6년의 시간을 제외한다면 중고등학교 6년은 거의 온전히 대학 진학을 위해 바쳐진 소모적이고 제의적인 시간이었으며 대학 4년은 대학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육 외적인 것들이 나를 키운 시간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러해야 마땅한 관행으로 강제되었던 10년 세월이 아쉽습니다. 한 인간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빛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십대에 우리는 훨씬 더 다양하고 풍부한 모험을 감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규율화된 사다리 타기에 능란한 소위 한 사회의 엘리트들이나, 사다리 타기에서 낙오된 소위 열패자들이 제도화된 사다리 타기의 과정을 통해 배우게 되는 궁극의 지점은 약육강식의 현실이며 경쟁과 정복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학교 교육은 이기적이고 물질적이며 파편화된 인간을 양산하는 공장입니다. 단언컨대 나는 세상이 좀더 평화로워지기 위해선 대중매체와 학교부터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좀더 나아지기 위해 가장 시급한 몸바꾸기를 해야 할 곳도 그 곳이지요. -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상이므로, 적어도 십대를 경유하는 학교에서만이라도 다른 종류의 가르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장 비효율적이고 가장 비생산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 지난 세기를 돌이켜볼 때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말은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도탄에 빠지게 하였는지! - 을 가장 풍부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 그리하여 한 인간의 영혼의 밑자리가 섬세하고 다양한 무늬들로 충만할 수 있게끔 도와 주는 곳이 학교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때때로 쓸모없는(!) 수업들을 제안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지구별 곳곳에서 이미 멸망한 소수민족의 사어死語를 공부하는 시간이라든가 이미 멸종한 다양한 생물들의 상상도를 그리는 시간이라든가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작문 시간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지요.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도 가장 자연스러운 몇 가지 사안에 대해 과민한 금기나 도덕적 포장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가 그러하고 성의 문제가 또한 그러합니다.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회피하려고 하는 반면 생을 욕망하는 방법들은 지나치게 차고 넘칩니다. 이 불균형은 교만과 방종을 낳고, 보여지고 만져지고 획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뒤틀린 편집증을 낳습니다. 모든 태어나는 것들은 동시에 아주 자연스럽게 죽어가고 있으며 이 죽음이야말로 새로운 탄생을 담지하는 순환의 아름다운 마디라는 것을 ‘자기’라는 세계밖에 볼 줄 모르도록 훈련받은 놀랍도록 이기적인 인간의 아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 별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고리 속에서 인간이란 참으로 작은 하나의 마디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는 잠시 빌려 입은 가죽 부대에 지나지 않을 육신의 안락을 위해 더불어 아름다워야 할 많은 것들을 파괴합니다. 삶의 ‘질’보다 삶의 ‘양’에 압도되어 엄청난 돈을 투자합니다. 투자된 돈은 더 큰 돈을 위해 다시 투자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결국은 직면하게 될 죽음을 가르치는 일에, 죽을 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해시키는 일에, ‘지금’ ‘여기에’ ‘존재함’의 의미를 사유하게 하는 일에 우리는 한푼도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나는 죽음의 의미와 죽음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충분히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한성의 자각으로부터 춤추는 하나의 별이 잉태되듯이, 우리의 무지와 오만을 깨닫고 자기 자신과 서로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이 시작될 수 있기를. 더 이상 이 별을 더럽히지 않고 평화롭게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기를. 이 모든 바램이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헛된 바램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아으 이 헛헛한, 이 지독한 슬픔.
깊은 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나지막한 뒤척임들이 들려옵니다. 매일 밤 별들이 죽고 매일 밤 새로운 별들이 태어납니다. 날마다 고요히 부서져 내리면서, 모래알 하나인 내가 모래알 하나인 당신과 더불어 매일의 새로운 ‘삶’을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