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에서도 선거를 한다. 이를테면 소임자를 뽑는 일도 이에 해당한다. 대중을 통솔해나갈 대표자를 대중스님네의 뜻을 물어 선출하는 것이다.오늘 뽑는 소임자는 입승이다. 말 그대로 먹줄 긋듯 법도를 바로 세우고 대중을 살피는 게 바로 입승 스님의 본분이다. 대중스님네의 공부를 도우는 이러한 외호外護 소임자를 잘 뽑아야 한철 공부를 짬지게 할 수 있다.대중스님네가 큰 방에 다 모였다. 오늘이 삭발일이라 그런지 스님네의 모습이 더없이 맑아 보인다. 웬지 이런 공사公事의 자리가 좋다. 강당에 막 힘을 부치고 처음으로 소임자를 뽑는 자리에 앉고 보니, 절집 안에 이런 좋은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절집 안의 좋은 가풍들이 자꾸만 바래어 간다는 노스님의 말씀이 있다. 이전엔 조그만 일도 대중에게 묻기 위해 모이던 대중 공사, 서로 허물을 지적해 주고 참회하는 자자 포살, 그리고 운역들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화합에 바탕을 두어 어느 개인이 혼자 종무宗務를 처리하는 독단을 방지했다는 것이 돋보인다. 한집안의 전통은 곧 질서로 통한다. 그래서 이런 날엔 그저 기분이 흐뭇해진다.우리 앞줄에 마주앉은 스님네는 아마 처음 참석하는 법석法席인 모양이다. 붐이 많 이굳어 보인다. 세 분 스님이 대중 뺨l1 나섰다. 말하자면 후보인 셈이다. 경經 패에 속한 스님으로 치문繼門 때부터 살아온 그야말로 강당의 장판 때가 묻을 대로 묻은 도반들이다. 조용하게 수행 잘하기로 소문난 스님, 그리고 대중에게 사람 좋기로 알려져 있는 것이 장점인 스님, 또 다론 스님은 대쪽 같은 성격으로 공사가 분명하다는 소릴 듣는 쪽이다. 간단한 프로필올 마친 세 분 스님이 이제 소견 발표를 할 차례.‘저는 능력이 부족하고 수행이 익질 못했습니다.”모두가 이런 식으로 사양한다. 이럴 땐 누굴 뽑을지 난감해진다.‘걸레찰중’으로 불리던 스님 생각이 난다. 찰중察聚 후보로 나옹 스님이 이런 소견을 큰소리로 발표하여 온 대중이 웃었다. 그 때 그 스님 말을 꽤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중생이 있는 곳에 보살의 행원이 있고,더러움이 있는 곳엔 걸레가 필요하지요. 구석구석 홈칠 수 있는 걸레, 저는 이런 걸레가 되길 발원했습니다. 중생의 굶은 곳을 닦아 주고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청소한다는 걸레 정신이 우리 출가자에게 요구되는 실천행이 아닐까요. 대중 스님네의 걸레가 되겠습니다.”‘걸레론’올 주장한 그 스님은 대중 전원의 지지로 한철 소임을 맡아 보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소임자와 대중의 마음이 맞닿아야 한철을 지내는 데에 힘이 들지 않는다. 자신 있게 나서는 스님이 없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아집에 길들어 진 스님네를 외호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그 동안 대중 처소에 살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게 있다면 침묵과 하심下心이다. 이 두 가지만 지키고 살면 일체 시비가 없다. 혼자 사는 일보다 대중과 지내는 일이 훨씬 힘들다. 말을 잘 다스려 마음이 얼마쯤 익어야 대중 처소에서 살 자격이 있다. 결국 대중 생활은 타인이라는 거울로 제 모습을 비춰 보는 일이 아닐까.
아무튼 투표로써 한 분 스님을 뽑아야 할 순서이다. 조그만 종이 쪽지가 내 앞에 놓였다. 미리 생각해 두었던 스님을 적었다. 어는 한 분이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무슨 횡포 같아 미안해진다. 대중들은 선뜻 한 스님에게 마음을 내기 어려울 게다. 이럴 땐 아무래도 성격이 부드러운 스님네에게 표가 몰리는 경우가 많다.
개표, 예상했던 대로 대중들은 우유부단한 쪽보다 일을 분명하게 처리하는 스님을 뽑았다. 새로 뽑힌 입승 스님은 죽비를 힘차게 세 번 울린다. 죽비로 법도를 지키겠다는 맹세의 삼성三聲. 한차례 우렁찬 박수가 지나갔다. 이제 대중 소임자로 뽑힌 도반은 많은 덤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고정된 시각을 대중쪽으로 되 돌려야 할 게다.
달빛이 환하다. 큰방에서는 곧 차담이 있을 모양이다. 국향菊香 사이로 달빛이 하얗게 부서진다. 무척 정겹게 느껴지는 달빛. ‘그렇지 수행자의 삶은 달빛 같아야지. 결코 요란해서는 더욱 안 되는 법이야.’ 달빛은 사시 어느 때나 변함이 없다. 달빛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질 않는다. 빛의 느낌이 마치 조용해진 마음 같다.
“달빛은 한참 쳐다보아도 눈이 시리지 않아서 좋아요.”
함께 달 구경을 하던 도반이 내게 한 말이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늘 쳐다보아도 좋은 사람이 바로 달덩이 같은 사람일 게다. 갖은 위선과 기식으로 가득 찬 세상에 한 줄기 은은한 달빛은 한결 사람을 차분하게 한다. 자고로 우리네 인품도 저래야지. 남에게 좋은 빛이 될 수 없는 것이 이래저래 부끄럽다.
소임자를 뽑는 날. 오랜만에 산서山居의 조촐함을 누려 보았다. 이제 이 선거가 끝났으니 결제날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