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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밑에 묻혀 있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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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이야기 - 이원섭 1991년 11월 117호
종지용출품(從地湧出品)


ㄱ. 땅에서 솟아나온 보살들
앞의 법사품으로부터 안락행품에 이르는 부분에서는 법화경을 유통하는 일의 중요성과 그 과정에서 주의할 것을 밝히시고, 아울러 그 같은 불사를 짓는 데에서 오는 공덕을 드러냄에 설법의 촛점이 맞추어졌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님의 일대사 인연이 밝혀진 법화경의 사활에 중생들의 손에 위탁된 것이어서, 그 만큼 듣는 이들은 깊은 감격에 휩싸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였는지.
다른 국토에서 찾아와 법회에 끼어 있던 팔항하사수八桓河沙數의 보살들이 부처님만 허락하신다면 이 사바세계에 남아서 법화경을 설하겠다고 나섰으나, 부처님은 이 요청을 물리치셨다.
“그만두라. 선남자야. 굳이 너희가 이 경을 호지護持할 필요 없나니, 어째서이뇨. 사바 세계에는 본디 육만 항하사수의 보살들이 있되, 그 보살 하나마다 각기 육만 항하사수의 권속이 있거니, 이들은 능히 내가 멸도 한 뒤에 호지 ·독송하여 이 경을 널리 설활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사바 세계의 대지가 진동하여 갈라지면서, 그 속으로부터 삼쇠 이상을 갖춘 무량 무수의 보살이 솟아나오니, 이들은 모두가 사바 세계 밑의 허공 중에 살고 있다가, 이제 석가 여래의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자 옵고 아래로부터 나타나온 것이었다.
이들은 땅에서 나오고 곧바로 허공에 떠 있는 보탑으로 다가가서 다보불과 석가여래께 예배 드리고 분신불께도 각각 그렇게 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오십 소겹이 지났건만 부처님의 신통력 탓에 대중들은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보살의 우두머리인 상행上行·무변행無邊行·정행澤行·안립행安立行이라는 네 대보살이 있어서 부처님께 안부를 여쭙고 부처님은 그것에 대답하셨는데, 이를 목격한 대중 모두가 의혹에 잠기는 가운데에 미록보살이 게송을 설해 물었다.
“무량 천만억 저 보살들은 일찍이 못 본 바이니, 바라옵건대 설하소셔. 어디로부터 오며, 무슨 까닭에 여기에 모임이니까”
그때, 분신불을 따라왔던 보살들도 각각 의혹을 일으켜, 이 무량한 보살들은 어디서 온 것이냐고 제 부처님께 질문하나, 분신불은 이미 미록보살이 물었으므로 곧 석가여래의 대답이 있으실 것이라고 제지하였다.
이상이 이 종지용출품의 전반부이거니와, 이 기상 천외의 환상적인 파노라마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겠는가.

ㄴ. 심지心地의 불가사의、
마음을 땅에 비유한 심지라는 멀어 있다. 하기야 모든 것을 낳는다는 의미에서 마음은 땅을 닮았다. 작게는 가정으로부터 크게는 국가에 이르는 온갖 사회 조직도 우리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리하여 오늘도 그 안에서 우리가 일으키는 온갖 선악의 업(행위)의 소용돌이 또한 그 모체는 이 마음이라는 이름의 땅이다. 우리는 땅의 인력에 발목이 잡혀 있어서 죽는다고 해도 이를 떠나지는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땅은 실체로서 존재함은 아닌 까닭에 공空하다 해야 할 것이니, 견고하기가 땅 같음을 마음이라 하는 것은 무명의 깊이를 마음인 양 착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을 꿰뚫어보아 사실은 공이 그 정체임을 이해하면 그것이 ‘땅 밑의 허공 중에서 사는’일이요, 이 같은 지혜의 성숙이 무명을 캠으로써 미혹의 생존을 초월하게 만들면 그것이 바로 ‘땅에서 솟아남’이 된다. 그리고 땅에서 솟아나왔으므로 그런 사람이 있는 곳은 다시 허공이 되지만, 같은 허공이면서도 지하의 그것은 무명 속에 내재해 있던 허공인데 대하여 이것은 무명을 벗어난 허공이요, 다시 공(허공)을 부정하여 불공不空에 이른 끝에 드디어는 공도 불공도 아울러 초월하는 절대적인 공, 곧 중도中道라고 해야 할 것이니, 허공에서 부처님들과 만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보면 땅에서 솟아난 보살들은 우리 범부가 나아갈 길을 말씀하고 있는 것 뿐이어서, 조금도 신기할 것은 없다. 무명의 견고한 대지를 깨고 솟아나지 않는 성자는 없는 까닭이니,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 의지 하시는지라 마음이 결합 없고. 마음에 걸리는 바 없는 지라 마음의 공포도 없어, 뒤섞인 생각 멀리 떠나 열반에 이르시며’라는 섬경(반야바라밀다 섬경의 준말)의 말씀도, 지하로부터 솟아나 허공 가운데에서 부처님들과 만나는 과정. 바로 그것일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법화경의 유통이 땅에서 솟아나온 보살들에게 맡겨져야 했던 이유도 자명해진다. 법화경의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도 마음의 본원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면, 무명을 첸 끝에 본래 면목을 되찾는 곳 말고는 볍화경을 받드는 길은 다시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범부인 우리에게 법화경의 유통을 기대하셨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그 동안에 오십 소겁이 지났건만 대중들은 반나절쯤으로 여겼다는 것도 그렇다. 시간약란 요컨대 혹(번뇌) ·업(행위) ·고(생존)의 흐름이요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부처님과 진리는 그 절대성으로서 처음부터 시간의 범주를 벗어난 까닭에 영원 속에 있다 해야 할 것이니, 오십 소겁과 반나절은 필경 깨달음 속에 있느냐,·무명 촉에 있느냐 하는 차이일 따름이다.


ㄷ. 젊은 아버지와 늙은 아들
부처님께서는 미록보살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내 이제 대중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일다 (미륵)야, 이 모든 대보살마하잘의 무량 무수·아승 지수가 땅에서 솟아남은 너희가 예전에 보지 못한 바이거니와, 내 이 사바 세계에서 아욕다리참약삼보리를 얻은 다음 이 온갖 보살들을 교화하고 인도하여. 그 마음 조 복調代하여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였니라.”이 모든 보살들은 석가여래께서 성도하신 뒤에 발심하게 한 제자들 이라는 것이다. 이렇다면 땅에서 솟아나온 무수한 보살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래진 대중들은 다시 더 큰 의혹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대중의 의사를 대변하는 미록보살의 질문이 이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태자 시절 궁전에서 나오사가야성이 멀잖은 도량에 앉아 아욕다라삼약삼보리 이루셨으니, 이로부터 사십여 년 지났을 뿐이니라. 세존이 시여. 어찌 이런 짧은 동안에 크게 불사를 지E}. 여래의 힘과 여래의 공덕으로 이같이 한량없는 대보살들을 교화하사 장차 아녹다라삼약삼보리 얻게 함이오이까.
세존이시여. 이 큰 보살의 무리들을, 설사 사람이 있어 천만 억 겁을 헤인다 해도 능히 다하지는 못하여 그가에조차 못 가오리다. 이들은 필시 아득한 에로부터 무량한 부처님께 온갖 선근 심어 보살도 성취하여 늘 범행控行 닦았음이 틀림없사오리니, 세존이시여. 이 같은 일 세상에서 믿기 어렵삽나이다.”
이 보살들은 그 신통력과 지혜로 미루어 무수 겁 동안 불도를 닦아온 대보살들이라 해야 옳다. 그리고 부처님은 성도하신 지가 사십여 년에 지나지 않으시고, 그 동안 늘 제자들과 기거를 같이 하셨을 뿐, 흘로 어디로 가신 적은 한번도 없으셨다. 그런 터에 그들 모두가 어떻게 성도 뒤에 발심체 한 부처님의 제자라는 것인가.
“마치 사람이 있어서 색이 곱고 머리 검어 나이 스물다섯밖에 아니 된 자가 백세 노인 가리켜서 이는 내 아들이라 하며, 그 백체 노인도 이 청년 가리키어 이는 나의 아버지니, 우리를 낳아 길렀다 함과 같이, 이 일 좀체 믿기지 않나이다.” 미록보살의 이 같은 항변이 이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를 것도 없이 젊은 아들이 있기 위하여는 아버지의 늙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는 젊고 아들은 늙은 꼴이 되었으니. 이 엄청난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깨달음의 절대계가 범부와 합리주의적 척도로 헤아릴 수 없는 차원일 것은 쉽게 예상되기는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너무나 큰 모순이 아닐 수 없으니, 이런 의혹이 풀리기 위하여는 동산洞山 스님이 일로일불로-老一不老라 했듯이 부처님의 수명에 늙으신 면과 늙지 않으신 면, 바꾸어 말하맨 젊으신 듯하면서도 기실은 아주 나이가 많으신 면이 있으심이 드러니야만 하는 것이겠다. 그리고 바로 이런 문제가 다음의 「여래수량품」에서 다루어지게 되는 바, 우리는 어느덧 적문述、門이 아닌 본문本門의 법을 대하고 있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