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는 중국문화의 전성기였다. 특히 당대문화를 대표하는 당시康詩는 중국문학사장 최고의 수준에 달하고 있다. 청대淸代의 강회연간康熙年間에 칙편敵編된「전당시」전 900권에 수록된 시인은 모두 이천 이백여 명작품은 사만팔천 수首에 이른다. 당시는 이처럼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세계문학사애서 가장 우수한 시문학의 완성을 성취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가 이처럼 흥성했던 이유는 당대의 정치, 경제와 같은 사회적 수준의 고양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시인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던 불교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 장려한 발전을 이룬 당대 불교는 시인들로 하여금 인간의 깊고 치밀한 정신세계와 현실의 질곡 저 편에 펼쳐진 무한대사유의 세계를 응시하는 안목을 열어준 것이다. 특히 중세 동양의 봉건적 사회 구조 속에서 드물게도 개인의 존재, 개인의 자유를 중시한 중국선 특유의 압도적인 인간신뢰정신은 왕유, 백거이와 같은 대시인들의 열렬한 귀의를 받고 있다. 선불교는 단순히 선종교단의 불교만이 아니라 한시대의 진보적인 이념을 전망하고 추구하는 문화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옛 동향에서 지식인이란 전 인생의 성실한 편력을 가 월권행위와 명교名敎를 손상했다는 이유를 들고 통해 얻어진 다양한 체험을 바탕으로 신고新古의 학문, 사상, 예술, 종교를 달성하고 그 원리에 통달한 인생의 달인이었다. 그러므로 시인의 작품완성도는 그 시인의 인간적 성숙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의 달인들은 자신들의 인생과 문학적 수련을 이원적으로 분리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 전향적인 인간상을 시인 백거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저 비파행과 장한가의 시인 백거이는 지금부터 우리는 당대문학사에서 도 가장 예술적인 완성도가 뛰어난 불멸의 시인이며 선과 정토불교를 가장 원숙한 체험으로 확언하고 있는 시인 백거이의 문학과 불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문화의 전통
백거이는 서기 772년 하남성 신정현서 가난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미 오륙세 무렵부터 시작을 배웠으며 침식을 잃은 면학 끝에 800년 스물 아홉의 나이로 진사에 입산한다. 그리고 다시 803년 친구 원진(779-831)과 함께 발췌과라는 관리림용 시험에 합격하고 있다. 이후 교서랑, 집현 교리를 거쳐 814년 마흔 세살의 백거이는 황실 교사역의 태자좌찬 선대부에 이르고 있다. 815년 7월 정치적 불안이 당의 수도 장안을 휩쓴다. 재상 무원형이 자객의 손에 암살당하자 백거이는 범인 체포에 강력히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 상소가 월권행위와 명교를 손상했다는 이유를 들고 나선 정적들에 의해 시인은 그 해 8월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만다. 백거이를 탄핵하기 위해 중서사인 왕애가 쓴 상소는 좀 흥미로운 점이 있다. “거이는 언言이 부화무행하여 그 모친이 꽃을 감상하다가 우물에 빠져 죽었는데도 꽃을 감상하고 신정시新井詩를 썼으니 명교를 심히 손상 했습니다.” 이 백거이 탄핵상소는 명분을 유교 윤리에 두고 있지만 사실은 그의 시「승 펴는 노인」,「신풍의 팔 부러진 노인」등에서 보여지는 정치비판에도 탄핵의 이유가 있었다. 백거이는 섬세하고 우아한 서정시의 명인이기도 하지만 민재댔를 수탈하는 관리들을 고발하는 현실비판의 시를 쓴 민중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문학 사상을 밝힌 「여원구서與元九書라는 서신에서 “문장이란 시기에 맞아야 하며 시가는 현실을 바탕으로 삼아 야 한다(文章合寫詩而著 聽合寫事而作)”라고 쓰고 있으며 또한 t}의 시는 인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며 나의 시를 읽는 천자가 인민의 고통을 알기 원한다”라고 쓰고 있다.
당 왕조의 번영은 봉건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모순 위에서 이루어졌으며.인민의 생활은 극도로 압박 받고 있었다. 때문에 빽거이는 인민의 고통을 대변하는 시. 사회적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시를 썼다. 왕애가 쓴 상소에는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던 민중시인 백거이에 대한 사기감도 엿보인다. 그러나 대중에 복무하는 문학. 그것은 중국문학의 오랜 전통인 것이다.
남종선에 회향된 인생
백거이는 강주사마로 좌천된다. 사마란 주지사(刺史)의 보좌역으로서 실무가 없는 한직이다. 그러나 백거이는 이 좌천을 원망하거나 불행으로 여기지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좌천을 통해 자신의 문학과 인간을 더욱 원숙하게 다듬게 된다. 백거이의 전기를 싣고 있는 구당서는 “거이는 유학은 물론 불교경전에 더욱 정통해 있었다. 항상 망회처순하고 있었으므로 이 죄천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백거이는 그만큼 불교경전에 정통해 있었다. 그는 평생의 친구였던 원진의 아내가 죽자 상심한 친구를 위해 “인한의 슬픔을 고철 수 있는 약은 없네. 오직 「능가경」네 권이 있을 뿐 아니 원어 보게나”라는 사구를 써 보낸다. 백거이는 인간의 슬픔은 불경이 아니면 씻을 수 없다고 말한다. 불경이 아니면 씻을 수 없다는 인간의 병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백거이의 경우 편본만 아니라 왕유, 푸보 역시 관리로서의 경력에 정신적 상처를 입고 있다. 그래서 시인들은 자신들의 실존을 번뇌와 해탈이라는 불교적 시련으로 환원시켜서 봉건세속사회의 질곡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강주 사마로 좌천된 백거이는 이 좌천을 통해서 그의 문학을 더욱 깊이 다듬는다. 강주는 아름다운 경치와 여산혜원盧山慧遠의 백련사가 있던 동림사와 가까운 곳이다. 그는 헤원과 저명한 문인들이 청정하고 간소한 생활을 꾸리던 백련사의 유풍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곳이 좋았다. 시인은 선승들과 함께 좌선을 하며 정토불교를 접촉한다. 그리고 여산의 아름다운 풍광에 짖은 백거이는 여산에 초당을 짓고 강주의 공무시간 외에는 초당에 가서 지낸다. 817년 마흔 여섯 살의 백거이는 자신의 심경을 「한음」이라는 시에 담고 있다.
나 불교의 가르침 배우기 노력하여
평생의 여러 가지 번뇌 다스릴 수 있게 되었건만
아직 시마詩魔는 항복 받지 못해
바람과 달을 따라 시를 쓰나니
시인은 불도수행에 마음을 기울고 있지만 자신의 시업詩業이 참된 불교 실천자로서의 수행에 장애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젊은 날 사회적인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풍유시를 즐겨 쓰던 백거이가 자신의 시업을 시마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중년에도 그는「비파행」과 같은 장엄하고도 요염한 비가를 남겼지만, 만년의 그는 선과 정토불교 체험이 듬뿍 담긴 시를 쓰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불교체험이 더욱 깊어진 시인의 눈길은 내면으로 향1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불교에 전념한 백거이는 자신의 시에서 이렇게 쓴다.
젊은 날의 나는
장자의 소요편을 읽으며
인생을 음미했었다.
그러나 이제 심지心地를 일구어
나의 인생을 남종선에 회향한다.
선은 내심자증內心自證을 강조한다. 내심자증이란 인간존재의 근거를 범람하는 잉크 문화나 어떠한 사상적 권위에도 의지함이 없이 오직 인간 자신이 획득하는 생生의 진실을 깨닫는 행위이다. 때문에 선은 일단 인간의 관습적인 언어감각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상의 평가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연출되는 인생을 구어나 속어로 말한다.
그 일상의 평범이 개념적인 교리구성이나 사상의 평가만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불교의 심연을 자유롭게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의 달인들은 모두 시인이다. 그들은 시인이 되기 위한 문학수업에 열중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남긴 오도송, 유게는 모두 그 독특한 향기와 함께 주옥과 같은 광채를 발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을 움직이는 사상이란 결코 논 리적 판단을 고정시켜야만 하는 물질의 공간인 속계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오랜 자기 단련과 침묵 속에서 닦여진 광대한 안목이 있어야 한는 것이다. 「전등록, 「벽암록」,「조당집」,「송고백칙」문무관등에 실린 선승들의 시는 바로 오랜 자기 단련과 침묵 속에서 완성된 내심자증의 진실을 표명하고 잇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완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완성은 그대로 산의 완성인 것이다. 백거이는 선종의 외곽에 서 있는 세속의 방관자가 아니었다. 시인은 선종의 본분에 대해서 지극히 명료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조당집祖堂集」을 보기로 한다.
“강주사마 백거이는 마을을 다해 귀종歸宗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느 날 시인이 선사를 방문했을 때 선사는 벽을 바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선사는 작업 도중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대는 군자인 선비인가? 소인인 선비인가? ‘군자인 선비가 되려고 합니다만·….선사가 흙손으로 흙판을 두드리자 시인은 흙을 떠서 흙판에 놓았다. 선시는 흙을 받고 말했다. ‘그대가 그 고명高名한 백거이인가? ‘그렇습니다. 선사는 말했다.
“겨우 흙이나 떠주는 사람”이라는 귀종선사의 코멘트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귀종호싸의 휘譯는 지상智常으로서 마조의 제자이며 남전보원과도 동문인 당대선종의 달인이다. 바로 이 귀종선사의 제자 고안대우高安大愚는 임제의현을 대오로 이끈 인물이다. 황벽 역시 고안 대우를 법안이 명철한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훗날 임제는 귀종 선사를 자신이 계승한 불법의 적적상승에 넣고 있다. 말하자면 중국선의 최고봉 임제조차도 귀종효냉. 고안대우를 자신의 정신적인 스승으로 추억하고 있을 정도로 백거이는 당대선종의 달인들에게 선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다.
휘음선생묘지명
818년 백거이는 사천성의 충주자사로 전임 했다가 822년 다시 아름다운 물의 도시 항주의 자사로 부임했다. 항주는 현대의 중국인들조차 “상요티엔탕 시아요오쑤항(上有天堂 下有觸)”이라고 자랑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그는 항주 시절 인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에서 우러나온 선정을 폈다. 백거이는 항주의 영은사를 자주 방문하기도 하며 우두종牛頭宗의 선승 조과도림(鳥棄道林, 741-824)을 통해서 탈속한 산림선의 세계를 체험한다. 「조당집」은 시인 백거이와 조과도립의 교류를 이렇게 전한다.
백거이는 조과도림에게서 섬계를 받았다. 그들은 가끔 자리를 함께 했으나 시인과 선숭승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 마주 앉았다가 헤어지는 정도였다. 이 광경을 눈여겨 본 시인의 아우 백행간白行簡은 시를 썼다.
백발의 시인과 선사가 마주 앉아서
능엄삼매에 들고 있다 낙천 낙첨이여!
모든 것 다 갖추어져 있음을
이 넓은 세게에서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는지
선의 달인과 시인의 만남. 그들은 이미 소세계에서의 해방을 성취한 자유인이었다. 따라서 이러쿵저러쿵하는 대화는 필요 없었다. 임제가 말했던가? “상봉 내 어찌 떠나지 않을 수 있으랴?” “상봉 불상식 공어부지명”의 고사도의 시기의 이야기이다.
84A년 백거이는 항주에서 낙양으로 전임했다가 825년 소주자사에 임명된다. 그리고 일년만에 장안으로 돌아와 비서함續藍에 임명되고 829년 황태자의 상담역인 태자빈객분사太子寶客分司로 낙양에 은둔한다.
그 이후의 관직은 명칭뿐이었다. 노년의 백거이는 자신의 문집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을 정리하는 일과 정토불교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리고 사재를 털어 낙양 근교의 향산사를 재건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문집을 여산 동립사, 낙양 성선사, 소주 남선원에 기증, 소장케 한다. 이 세 곳은 백거이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집을 기증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금생今生에 쓴 나의 세속적인 저작들은 광언기어狂言總語일 뿐이다. 그러나 원컨대 이 인연으로 내생에도 불법을 찬탄하고 법륜이 영원히 움직이는 연을 삼고자 할 뿐이다. 삼보께서는 실로 나의 부탁을 들어 주시리라고 믿는다. (且有本願 願以今生世뻐벚字狂 言鎬語之因 轉寫來世讓佛轉離輪豪也 三寶在上賣言)
846년 칠십오 세의 백거이는 낙양에서 눈을 감는다. 마치 장엄한 석양과 같은 입적入寂이었다. 시인의 생애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남건 시가들은 당의 시문학을 애호하는 사람들에게 남겨져 불멸의 예술적 명예를 누리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직접 쓴 「취음선생묘지명顧今先生養地名」에서 이렇게 적었다.
낙천 낙천이여!
천지간의 칠십오 년
그 생은 든구름과 같고 그 죽음은
허물을 벗는 것과 같도다
어떤 인因으로 와서
어떤 연練으로 가는가?
나의 심성心性은 부동이건만
형체는 자주 바뀌네
이미 끝났도다
이미 끝났도다
내 어찌 떠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좋고 싫음에 집착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