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텅 빈 산에는 눈빛 같은 맑은 빛이 충만할 뿐 고매하기 비길 데 없고 운수雲水간에 독보獨步하며 삼계 왕래에 자유자재하시던 스님이 여기 계시니…
근세의 고승을 꼽을 때면 회자되던 스님이라서인지 낯설지 않은 존함, 지월 큰스님. 간략한 비문을 읽으며 그려지는 비석의 주인공 지월 큰스님의 모습은, 고요함이다. 적어도 비문 속에 비친 지월 큰스님은 가야산의 소나무처럼, 화려한 그 어떤 이름조차 거부하고, 곧은 수행의 길만으로 오롯하게 정진하셨을 분이었으라라.
칼날 겨누듯 는 산봉우리가 없는 산이라서 지극히 평화를 누리는 수행자들이 머무는 곳이 바로 성산聖山 가야산이라지 않던가.
큰절 한 켠에 있는 극락전 숲길을 걸어 찾아 뵌 도선스님은 이 같은 가야산의 이미지를 쑥 닮은 스님이다.
조분조분 쏟아놓는 나즈막한 말씀의 매무새나 야윈 얼굴 속에 담긴 지극히 평안한 표정 하나하나가 ‘지극한 평화’를 누리는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좁다란 방 한쪽 벽면에 빛 바랜 두 장의 흑백사진이 놓여 있다. 지월 큰스님과 성철 큰스님. 왜 해인사 입구의 자그마한 비석 앞에 발길을 멈춰야 했던지 알 것 같다. 단아한 두 스승의 사진만으로도 아침 저녁으로 스승과 도선스님 사이로 흐뭇하게 이어지는 도리가 읽어진다.
경상 위에 손때 절은 공책 하나가 놓여 있다.
“아, 이거요? 삼십 년 전 공책이에요. 성철스님께서 문경 김용사에 머무시며 백일 법문을 하실 때 소참법문 들은 내용을 기록해 두었죠. 늘 수시로 펼쳐 읽고, 이 법문 내용을 바탕으로 대중법문을 하곤 합니다. 정말 감동어린 가르침이지요.”
공책의 가장자리는 삼십 년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건만, 깨알 같은 글씨는 몇 번이고 옮겨 적은 듯이 말끔하게 정돈돼 있다. 삼십 년 전 법문을 가슴에 품어 안고 자고 깨면 머리를 매만지며 출가자의 본분을 생각하듯, 경책하며 실아 가는 것이 어쩌면 스님의 뒷심이 돼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가한 첫 생각 잊지 않고 살아 간다
허약했던 젊은 시절 몸 추스르려고 찾아온 절이 해인사였다. 1957년 여름, 지월스님을 뵈었다. 막상 절에 머물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처럼 좋은 것이 없어 보였다. 삼년 세월을 지월스님 문하에서 행자로 살면서 수행자로의 삶을 열었다. 도선이란 법명과 함께 계를 받자 해인사 강원에 들어가 다섯 해 동안 스님의 말마따나 ‘일대 경학’을 익혔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절 생활이었어도 진리의 맛, 자연의 맛을 온몸으로 느끼며 생활하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부처님 슬하에 있었던 탓일까. 스물스물 아프던 몸도 어느 틈엔가 가뿐해졌으니, 도선스님은 천상 수행자가 될 인연이었나 보다.
“해인사에 한번 오려면 대구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이 걸렸죠. 비포장 도로였으니까요. 절 심부름으로 대구 한번 다녀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오솔길 따라서 홍류동 계곡을 지나면, 때묻지 않은 자연 경관에 도취돼 신심이 났어요. 지금은 많이 망가진 모습이지요. 자연을 방치하고 망가뜨리는 일은 우주의 심장부에 못을 박는 일인데도…” 가야산 지키기에 대한 스님의 열정은 사십여 년 세월, 한결같다. 세수63세 법랍47세의 생애를 마감했을 때 스승 지월 큰스님은 입던 헌 누더기 세 벌만을 남겼다. 지월 큰스님은 그 어떤 화려한 이력도 없이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며 소리 없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며 정진했던 분이시다.
‘만나기도 어렵다는 부처님 법을 믿고 부처님 제가가 됐으면 그 가르침대로 살아 갈 생각 놓치지 말아라. 구도 생활에 뜻을 두고 소임 볼 때 각별하라, 욕심 저버리고 먹물 옷 입고 출가한 자세에 어긋남 없이 소임 보라 지월 큰스님께서 늘 강조하신 말씀의 의미가 이즈음 더 각별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쌀 한 톨 허투루게 버려지는 걸 용납하지 않던 큰스님, 해우소 청소까지 손수 도맡아 하던 큰스님의 시봉을 들면서 ‘살아 있는 보살행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누구에게도 가시 돋친 말 한 마디 꺼낸 일 없었고, 너그럽고 자상하기가 하해 같던 분이시다. 자비와 인욕으로 그리고 무소유로 열반을 향한 정진이 끝없던 분, 만인의 수고로움을 덜어 주는 분인지라 ‘말만 시봉이지 방 청소밖에 해드린 게 없어 아쉽다’는 도선스님이다.
“스님께선 내내 출가한 첫 생각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그 소중한 인연 생각해서 실천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울리지요.”
그러나 단지 스승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큰스님과 더불어 살아온 세월이 마치 가랑비에 옷 젖는 양 언행이 하나돼 수행하는 스승을 고스란히 닮아버린 시간이었던 듯하다.
한 집안에서 네 형제가 도반이 되다
경전에 보면 일곱 왕자가 출가하는 사연이 나온다. 아니 굳이 삼국유사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출가한 동생을 데리러 절을 찾아왔던 속가의 형님이 그 자리에서 감응해 출가를 단행한 ‘소설 같은’ 경우가 주위에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운명이란 때로 예기치 않게 펼쳐진다지만, 한집안의 팔 남매 가운데 세 형제, 아니 사촌 형까지 네 형체가 부처님 제자가 되어,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 가운데 맏이가 도선 스님이다. 반야 스님, 현조 스님이 속가의 형제들이다.
“마을은, 잠시 쉬었다 가는 곳이죠. 영원한 안식처를 얻기 위한 진리를 만나자고 이야기한 것 밖엔 없어요.”
이 좋은 법, 가장 가까운 이에게 알리자는 도선스님의 뜻은 사촌 형에게도 전달이 됐다. 도완 스님까지 모두 해인사에서 출가해 이제 서로 거울 비추듯 서로를 비추며 사는 든든한 도반이 되어 살아 간다.
해인사 선방에서 30안거 마쳐
스님은 생활하는 작은 방을 가리켜 ‘기도방’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스님의 모든 정진이 이 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벽 두시부터 두시간 정진과 백팔참회를 하고 능엄주 다섯 편을 외는 것으로 하루를 열고, 유명을 달리하신 모든 영혼을 위해 전경하는 일도 빠짐없는 일과다. 그러나 온종일의 정진은 ‘선방’에서 이루어진다.
해인사 선방을 거쳐 간 수좌들 사이에서 ‘도션’ 스님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강렬하다. 한결같이 입을 모아 도선스님을 두고 말없이 묵묵히 자기 구도에 치열한 스님,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선방에서 정진하는 분’이라고 귀띔해 준다.
갑자기, 선방의 젊은 수좌들에게 법랍 사십 년의 스님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부담 주는 일은 아닐까, 궁금해졌다.
“선방에는 고참이 따로 없어요. 노소가 동락하는 곳인데요. 저도 젊은 날, 구참을 모시면 힘 얻고 공부하곤 했거든요. 제가 후배들의 치열한 모습을 보면서 힘을 얻듯이 제 정진이 후배 스님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해요. 사실 독살이를 못하는 까닭은 제 근기 부족일지도 모르겠어요. 하루 천 배씩 하던 참회도 이젠 백팔 번으로 줄 만큼 체력도 예전 같지 않지요. 그래서 대중과 더불어 용맹정진하는 것이 도움이 돼요. 앞으로도 여력이 닿는 한 대중 처소에서 정진하고 싶어요.”
정화 직전 해인사 선원에는 청담스님, 서옹스님, 영암스님을 비롯한 큰스님들 50여 분이 참선정진을 하셨다. 선원에 방부를 들이려고 객실에서 어렵사리 능엄주와 백팔참회문을 외웠던 기억은 늘 도선스님을 새롭게 일깨우곤 한다. 사시공양 뒤에 법랍대로 안행을 하고, 하루 두 시간씩 풀뽑기 울력을 했다.
울력을 위해 가야마을까지 가서 지게를 사 들고 오기도 했다. 세 시간 이상 자지 않고 정진하는 가행정진을 하던 시절, 궁벽한 시절이라 배를 곯긴 했어도, 고달픔을 모르는 채 ‘무엇을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신심 나던 때’ 였다. 하나,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도선 스님에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스님에게 있어 해인사는 육친과도 같은 곳이다. 해인사 선방에서만 30안거를 했다. 가장 힘든 데서 정진하고 싶었던 것이 까닭이다.
가야산의 호랑이 성철 큰스님께서 30분만 빠져도 쫓아냈던 그 유명 한 가행정진이 자신을 다지기엔 그만이었다.
지금도 서원 세워 정진하고, 참으로 부처님 은덕으로 세 끼 먹는 걸 감사히 여겨 정진을 늦출 수 없다는 단단한 목소리를 접하면서 현란한 속도로 질주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 바꾸며 사는 우리네 삶의 태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진주 연화사에 선원을 만들어 사부대중과 더불어 참구하기
해인사에서 줄곧 회계며 교무, 총무, 그리고 주지 스님이 편찮나 주지 대행까지 겸임하다가 1979년 진주 연화사와 인연이 돼 그 곳으로 옮겨 갔다. 근세 고승들이 머무셨던 법향기 깊은 고찰이었다. 큰스님의 가르침을 벗삼아 어떤 자세로 주지 소임을 볼 것인가를 번민하며 ‘전임자의 역할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불자들의 시주를 어떻게 하면 뜻 있게 쓸 것인지를 고뇌하면서 건축불사를 시작했고, 선원 짓는 일에 가장 주력하였다. 하루 여섯 시간씩 사부대중이 명실상부하게 참선 수행에 들 수 있는 공간은 그렇게 완성이 된 것이다. 성도재일이면 육십여 명의 불자들이 흐트러짐 없이 일 주일씩 정진에 들었고, 마음의 여유 없이, 자기 사색 없이 메마르게 살던 도심 속 현대인들의 용맹정진은 1980년대 초 우리 불가에 또 하나의 화제였다. 지금도 이십 년 전통의 용맹정진은 힘 있게 이어지고 있다.
진주 시내에 자리한 절이라 가족 동반으로 절을 찾아 금쪽 같은 가르침에 귀기울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큰스님 초청 대법회’를 열어 부부 동반을 권했고, 거사회와 마야회를 탄생시켰다. 경남 대불련 지구가 활성화되게끔 지원을 해 청년 불자들이 구름 모이듯 모이기도 했다.
“요즘은 동진 출가하는 경우가 드물죠? 그게 아쉬워요. 마을 생활이 긴 세월 습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더 어릴 때 와서 불가의 삶을 체득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단 하루도 가부좌를 풀지 않고 한도 끝도 없는 길, 무궁 무진한 진리의 세계를 참구하며 사는 도선스님에게는 앞으로도 율원 선원 다니면서 배운 것만큼 깨치면서 고집스레 정진하는 일 외에 달리 원이 없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스님은 군더더기 없는 ‘평상심’ 그 한 가지에 충실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