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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 불교사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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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박용길 1989년 01월 83호
이 글을 쓰는 지금이야 올 겨울로 벌써 세 번째인가 푸짐하게 눈이 내리는 반가운 날로 아직 무진년이지만, 이 글이 다시 활자로 모양을 갖추어 돌아오는 날은 무진년 삼백육십오일을 다 살고 난 새해쯤이러니…그러니까 기사년(己巳年) 뱀해가 시작되는 때일 것이다.
하기야 금년 무진년을 맞으면서도 올해가 용해라니까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만 있었지 무슨 특별한 감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애를 낳아 놓고, 아니, 얻고 보니까, 웬걸 또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아내의 해산이 임박해 오면서부터 나는 우선 그 시(時)가 어떻게 떨어질지 조바심이 났다. 아들이든 딸이든 연(年)은 이미 용으로 결정된 거고, 월과 일도 다 달력에 나와 있는 대로일 테고, 그러니 문제는 오직 시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이윽고 아침 7시에서 다시 17분이 자나자, 지금은 (박을)‘심은’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첫딸아이가 태어났고, 그때가 용시(用時)였다는 것을 조금 뒤에 안 일이었다.
그런데 일단 사주 앞뒤로 용이 떠억 버티고 있고-있지도 않은 용을 ‘버티고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기가 좀 쑥쓰럽지만-또 아내의 진짜 꿈다운 꿈-여기에는 청과 황의 근사한 용 두 마리와 두루마리 교지문을 줄줄 읽는 초능력 거북이가 한 마리 등장한다-이야기도 있고 해서, 그때부터 나는 월과 일의 두 기둥도 혹시 용으로 쫘악 뽑는 것은 아니가 하는 걱정도 아니고 기대도 아닌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무지무지하게 팔자가 ‘쎌’지도 모른다는 것이 바로 내 걱정이었고, 또 요즘 워든지 한몫씩 하는 사람들을 보면 으레 뭔가가 세어도 단단히 ‘쎈’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아, 이 아이도 뭐 한몫 할 아이는 아닐까 하는 것이 바로 내 기대의 실상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 감정은, 걱정보다는 오히려 기대가 더 컸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얼마 뒤 영이 한 마리 부족하다는 사실으 알고 결국 나는 열적게 가만히 웃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의 대승불교
가)방등부란 무엇인가?
명실상부한 상좌부불교의 종주국 스리랑카에 한때나마 대승불교의 위세가 드높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1월호에서 이야기한 바 이는 방등부(方等部, Vaitulya)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방등부란 무엇인가?
한 역사 자료는 보하리까띠싸 Vohafika-Tissa왕 치세 하의 방등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곧, 법미파(法味波, Dhammaruci)로 알려진 무외사(無畏寺)의 승려드릉 그때에 일체의 방등부경전을 부소설(佛所說)로 인정하고 공포하였다. 하지만 이는 아쇼까 왕의 재위시에 바이뚤르야 Vaitulyas로 불리는 일단의 범승(梵僧)들에 의해 인도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었다. 거짓 경전을 유통시켜 불법을 쇠퇴시키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장로(長老)들은 곧 바로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그 무렵 스리랑카에 들어온 이들 방등부경전이 모두 범어(梵語, Samskitam)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을 본 자료가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본디의 대승경전은 모두가 범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거이다.
대승경전은 일반적으로 바이뚤르야스뜨라 Vaitulya-sutras로 일컬어지며, 그밖에 바이뿔르야 Vaipulya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아상가 Asanga(無若)의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에 의하면, 바이뚤르야와 바이뿔르야 그리고 바이달르야 Vaidalya 이 셋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며, 「보살장경(菩薩藏經, Bodhisatva-pi-taka)」을 가리킨다고 한다.
한편 방등부 교리의 주요한 특징은 그들의 가현주의(假現主義, Docetism)에 입각한 불타관에서 쉽사리 파악된다. 곧, 부처는 도솔천에서 태어난 이래 그곳에서만 계속 살았을 뿐 우리 인간계로 내려온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인간들이 목격한 부처는 다만 그 환영에 지나지 않은다는 것이다. 아울러 부처 자신이 우리에게 직접 법을 설한 적도 또한 한번도 없었으며, 그 대신 환영으로서의 부처로부터 가르침을 전해 받은 아난다 Ananda가 이를 전했을 뿐이라고 한다. 계속되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부처가 취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그가 굳이 공양물을 거절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세상의 명안을 위해서였다. 결국 부처에 대한 공양으로 얻는 공덕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승가(僧伽)란 궁극적으로 ‘구족(貝足)을 의미하며, 따라서 승가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가르친다. 승가가 시주나 제물(察物)을 필요로 한다거나 또 먹고 마시기를 즐긴다거나 하는 말은 다 옳지 못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승가에 시주를 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며, 설령 시주를 한다고 해도 이로부터는 아무런 공덕도 기대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나아가 그들은 상호간에 동의만 있으면, 여자와의 성적 교섭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였다.
「대사(大史, Mahavamsa)」에 보면 3세기쯤에 베뚤라Vetula가 스리랑카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들이 실제로 위와 같은 견해의 주인공들이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한편 도사(島史, Dipavanisa)」는 베뚤바바다라는 말 대신에 비딴다바다 Vitandavada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아울러 빠알리어 주석서 가운데에서도 종종 비딴다바다라는 말이 눈에 띄는데, 이 경우에는 분명히 심장 가운데의 아비달마에 대해 비정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일단의 다른 승려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그 무렵 비딴다바다와 뜨헤라바다 Theravada 양자가 모두 자파의 권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동일한 경전을 서로 경쟁적으로 인용하였다는 사실이다.
나)방동부의 흥망
방등부가 량가 섬에 처음 출현한 것은 3세기 말 보하리까띠싸 Voharila--Tissa 왕(269-291)의 제위시였다. 하지만 그때에 대사(大좋)와 무외사(無畏寺)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던 왕은 대신(大臣) 까삘라Kapila의 간언에 따라 방동부를 외도로 규정하고 크게 탄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뜨하브하야 Gothabhaya왕(309-322)대에 들어와, 이들은 다시 무외사를 중심으로 서서히 재기의 토대를 다져나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무외사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곧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일체의 문헌을 불태워 없애는 한편, 육십여 명에 이르는 그 지도자들을 성밖으로 추방하였다. 이들이 다시 자리를 잡은 곳은 남부 인도의 졸라국 The Chola이었다.
그 무렵 인도에서는 아상가와 바수반드후 Vsubandhu 의 유가행파(澈빼行派)가 꽤 위세를 멸치는 한편, 불교 전반에 걸쳐 갖가지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막 도입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쫄라국의 방동부 승려들은 나중에 스리랑카 대승불교의 막강한 실력자가 되는, 상그하미뜨라 Samghamina라는 야심에 찬 한 젊은 승려와 가까와지게 되었다. 그를 두고 대사는 그때에 인도에 크게 유행하고 있던 ‘영매술 따위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다.
상그하미뜨라는 이들의 처지를 깊이 동정하여 기필코 스리랑카에 대승불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함께 서둘러 스리랑카로 건너가기에 이른다. 이윽고 고뜨하브하야 왕의 신임을 얻는 데에 성공한 그는 곧 두 왕자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다. 부왕의 승하에 이어 왕좌에 오른 제뜨하띠싸 왕자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서거하자, 왕위는 자연히 그의 아우인 마하세나 Mahasena 왕자에게로 계승되었다. 상그하미뜨라에게는 실로 사십여 년 동안 기다려 왔던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우선 대사의 승려들을 대승불교로 전향시키기로 결심한 그는 지신의 옛제자인 왕을 사주하여 주민으로 하여금 대사의 승려들에게는 일체 시주를 못하게 금하였다. 대사의 승려들은 결국 다른 지방으로 이주해 갈 수밖에 없었다. 대사는 그 뒤 구 년 동안 철저하게 황폐되어 갔다. 갖가지 시설이 파괴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쟁기로 갈아엎은 경내지는 콩밭으로 변했다.
온 국민은 왕의 이러한 행동에 경악과 분노를 느꼈다. 국민들의 대사에 대한 신뢰가 지대했던 만큼, 왕에 대한 반감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왕과 절친했던 대신 메그하반나아브하야 Meghavanna-Abhaya는 말라야 Malaya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이에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왕은 다시 옛친구를 만나 지난 과오를 깊이 사죄하고 아울러 대사의 재건을 굳게 약속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상그하미뜨라는 마침내 왕의 총회(體姬)로부터 사주받은 한 목수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그 뒤 대사가 다시 전과 같은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