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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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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1년 11월 117호
용성 대선사(상)


용성龍城 선사에 대한 행장과 사상적인 전모는 지난 일 년에 걸쳐 해인지에 실린‘한국 근대 불교사’에서 한보광 스님의 자세하고 사려 깊은 글이 이미 연재된 바 있으므로 중복을 피한다는 뜻에서 이 글에서는 생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근대 불교사를 돌아보았을 때, 용성 선사가 남긴 크나큰 족적을 생각해 보면 다소 그 행장이 겹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연재함이 좋겠다는 의견을 받아 들여서 사족과도 같은 글을 더하게 되었음을 해량하시기 바란다.
근대 불교사에 관해서는 아직 정리가 덜 끝나 있기는 하지만 근대 불교사에 용성대선사만큼 후학들에게 오늘의 한국 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수행자의 눈으로 다양하게 제시한 분이 또 있을까? 물론 뛰어난 선사 가운데에는 경허,만공,한암 선사 같은 분들이 계시고,불교 사회 운동 측면에서 보자면 만해 선사를 먼저 꼽을 수 있겠지만 선과 교,역경과 포교와 같은 다양한 불교의 면모가 요구되는 오늘날일수록 더욱 선사의 선각자적인 삶과 행적이 좀더 깊이 연구되고 새로운 시각으로검토 실천되는 것이 마명하다고 생각된다.
스님은 1864년 5월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수원 백씨인 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싱규相圭이고 법명은 진종震鐘이며 용성龍戰은 법호이다.
스님이 열네 살 나던 해에,꿈에 부처님을 뭔 것이 언연이 되어 열여섯 나이에 해인사에 입산,불연을 맺었으며 그 뒤에 선곡 율사에게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많은 승려들이 그러하였듯이 용성 선사도 전국의 제방 선원에서 선을 중심으로 하는 안거와 운수 생활을 사십대에 이강까지 계속하였다.
따라서 스님 행장의 전반부는 철저한 선승으로서의 삶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선승으로서의 삶은 그 뒤에 포교,역경,사회 운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스님의 일상적인 삶의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대체로 모든 선사들에게서 선승적인 삶은 대미大尾와 극치의 치열한 구도 끝에 나타나는 오도의 기연과 오도 송에서 엿볼 수 있는데, 용성 선사는 스물세 살에 낙동강을 지나면서 오도송을 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오산에 천추의 달이 걸려 있고
낙동강 만리에는 파도가 치는구나
저 고기잡이 배는 어디로 가는고
옛과 다름없이 갈대밭을 의지해 쉴 뿐

이 게송은 뒷날 선사가 대각교를 세울 때에도 종지 천명의 구로 삼았으며 그밖에도 두 차례나 오도의 체험을 밝히고 있는 바,이러한 행적으로 보아서 첫 오도 뒤에도 스님은 보임倒王과 정진에 소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일찍부터 전국의 제방 선원에서 안거와 운수 납자로서 전통적인 한국 불교의 종맥을 다지던 스님은 돌연 마흔네 살이 되던 해에는 만주를 거쳐 중국의 북경으로 가서 천하의 선지식을 두루 역방하였다. 그러나 중국 불교에서 기대하였던 만큼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긴 하였지만,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풍전 등화와 같은 조국의 미래.물밀듯이 밀려오는 서양 문물,특히 기독교의 적극적인 교세 확장을 보면서 크나 큰 충격을 받고는 새로운 세계의 실상을 여실히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그 당시의 기독교계에서 불교를 까닭 없이 비방하고 조직적으로 교세를 확장해 가는 것을본 스님은 귀원정종歸源正宗이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불교 비방을 강력하게 논박하였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저숲은 이 땅에서는 최초로 기독교와 불교를 비 교종교적인 측면에서 다루었다는 데에서 자못 흥미롭다. 이때가 서기로는 1910년. 스님의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910년은 여러 가지로 의미를 가지는 해로서 민족이 망국의 비운을 맞은 치욕의 해이기도 하였지만,스님에게는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고 서세 동점西勢東漸의 문화적인 질곡으로부터 불교의 위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였다.
또한 사회 정세에 정면으로 맞부딪쳐서 스님은 이제까지의 선승적 삶을 탈피하고 헌출히 산을 벗어나서 오직 자비 구세의 정진으로 보살의 하화 중생하는 삶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스님은 그 해에 서울로 올라와서 기댈 곳도 머물 곳도 없이 오직 중생 교화의 일념으로 신도들의 집을 전전하며 법회를 열었으며,그 이듬해。14911년에는 지금의 봉익동에 대각사를 창건하게 되며, 대각사는 신도 교화의 중심 역할은 물론 독립 운동에도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대각사를 창건함에 따라서 만해 스님을 비롯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찾아와서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용성스님과 의논을 나누는 일이 많아졌어며,마침내 1919년에는 3·1독립 운동을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다. 특히 스님은 만해 스님과 더불어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그것 때문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삼 년간의 옥고를 치루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옥중 생활이야말로 스님에게는 새로운 시야를 넓히고 교화의 활로를 열어 가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출옥 뒤에 대각교 운동을 벌여 나가는 뚜렷한 시원점始源點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땅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기독교의 성경이 이미 한글로 번역되어 옥중에서 읽히는 것을 본 스님은 출욕 하자마자 불경의 한글 번역이 무엇보다 시급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삼장 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섬조만유론心造萬有등굶과 각해일륜覺海一輪을 비롯한 삼십여 권의 저술과 화엄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한글로 옮김으로써 이제까지 한자 문화권에 묻혀 있던 불교 의식을 우리 것으로 바꾸어 민중적인 불교 문화로서 좀 더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서려 노력하였다.
스님의 저술 활동과 역경 사업은 불교 의식의 한글화 가 지금까지도 정착되지 못한 현실에서 볼 때, 스님의 생각이 얼마나 선진적이고 대중적인 실천 의지에서 비롯하였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아직도 스님의 유지가 온전히 실천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후학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다음 호에서는 스님의 저술 활동과 대각교 운동을 비롯한 여러 행적을 살피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