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오고감이 왜 이리도 빠른 지 봄인가 했더니 여름이 지나 버렸고 이첸 가을 초입을 한참 지나 완연한 가을이다. 생각이 깊어지고 마음이 고이는 가을.
가을은 한국의 하늘 아래에 머무는 이들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만큼 정말 좋은 계절이다. 책을 읽어도,여행을 해도, 놀아도 실증낼래야 낼 수 없는 계절. 어느 날 문득 구름 한 점 없이 추르고 높은 하늘을 느끼면서, 내 영혼에는 늘 방랑의 피, 훌훌 떠 나 버리고 싶은 雲水의 욕구가 고여 있음을 알았다.
출가하기 전, 중학교 삼학년 시절에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담임을 맡으셨던 무명 시인인 선생님 댁에 놀러갔다가 책 한 권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책은 내 운명의 지침을 크게 돌려놓았다.
“성 고은 에세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퇴속승이었던 고은은 자청 성인이라는 의미에서 책의 제목을 붙였으리라.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교훈을 줄 만한 책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무튼 나는 그 책 속에서 나를 유휴하는 글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세간을 여의지 않았으나 또 한 세간에 물들지 않으면 세간에 살더라도 장애 되지 않음이 허공 꽃이 노니는 것과 같다고 하는 화엄경에 나오는 게송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불교를 전혀 몰랐다. 이 게송 해석해 놓은 글귀를 보고는 그렇게 걸림 없이 허공화처럼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해졌다. 그 해 가을의 시월 어느 날, 나는 교복을 입은 채로 성 고은 에세이 한 권을 들고 속리산 법주사 수정암으로 찾아갔다. 그때 수정암의 스님께서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 오라 고 하시면서 손에 차비까지 쥐어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나는 그 스님의 모습을 꼭 한 번 만이라도 뵈었으면 좋으련만 이제는 아득히 잊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우리 동네에서 가까이 있는 절들을 아주 열심히 찾아 다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많은 스님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느새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가장 뜻밖의 곳에서 나를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출가 뒤에 까까머리 학생 시절에 알았던 스님을 우연히 만나자 그 스님은 “아용 수좌는 아주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었어. 몸에 꼭 맞는 옷이야”하며 웃음을 반 좀 섞어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의 이런 모습은 이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생에도 다음 생애도 계속되리라, 수도. 이것만이 내 생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별로 대단하지도 않았던 책 한 권을 만남으로서 사바 세계의 허물 많은 일들 가운데에서 나는 불교를 한다는 것에 생명을 걸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학교 시절의 나는 또한 춘원 이광수의 많은 글들에 홈빽 빠져 있었다. 이광수가 와세다 대학을 다닐 때에, 그 규모와 장서가 국제적이라는 와세다 대학 중앙도서관의 장서를 모두 보기로 계획하고 늘 도서관에서 지냈다는 글귀를 보고는 나도 작기는 하지만 학교 도서실의 장서를 다 보기로 하고 밤새워 책을 읽기도 하였다. 춘원은 그 당시의 나에게 정서를 살찌워 주던 소중한 선생님이었다.
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나는 도서관에서 검은색 표지에 금박 글씨로 제목을 한 「토인비의 역사연구」라는 책을 발견했다. 장엄하고 두꺼운 책표지에 마음이 끌려 전질 열 권 가운데에 제1권을 빼서 서문을 원어 보았다. 나는 그때까지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려니 했었는데. 내 생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깨닫고는 평생을 걸고 한 번 해볼 만한 것이 역사공부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사 공부를 하게 되었고. 아직까지도 역사 공부에 굉장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역사에 대하여 홈뻑 반해 버린 나는 대학 생활 내내 방학만 되면 늘 다른 모든 일은 제껴 두고 가장 먼저「토인비의 역사연구」전질을 모두 독파하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토인비의 역사연구」 열 권 가운데에 제1권의 절반도 읽지를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학과 교수님께 “교수님은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이니까 「토인비의 역사연구」를 다 보셨겠지요”하고 물었더니, 교수님은 멀쩍게 웃으시면 서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누구
나 「토인비의 역사연구」」를 모두 원으려고 마음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열 권 전질을 다 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이렇듯이 책으로 만난 고은 선생님과 춘원 선생님과 토인비, 이 세 분은 내가 어려서부터 출가하기까지 큰 스승들이었다. 이 세 분들로부터 나는 인생관과 가치관의 바탕을 마련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도 그 세분의 영향에서 비롯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역사는 만남의 역사이다. 인생은 만남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는 만남 속에서 변화하고 또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