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고무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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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홍성복
1989년 01월 83호
코를 줄줄 흘리며 등교하던 1954년은 유달리 ꡐ춥고 배고프던ꡑ 시절이었다. 육이오가 끝난 뒤의 우리네 생활이 다 그러했지만 삼팔선이 지척에 있는 우리 고향의 형편은 겨우 ꡐ죽지 못해 사는ꡑ지경이었다. 철저히 쑥밭이 된 마을을 복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겨우 눈비를 피해 잔명을 보존하는 처지였다. 전쟁 통에 학교를 채대로 못 다닌, 아이를 둔 아버지까지도 다니는 국민학교에 갓 입학한 꼬마인 나에겐 ꡐ그저 배불리 먹는 것ꡑ밖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문제가 생겼다. 할머니께서 토끼를 필아 사주신 검정 고무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수업이 끝나 집에 오려 하는데, 그만 누군가 내 신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아찔하였다. 집에 가서 야단 맞을 생각을 하니 ꡐ어떻게 하나!ꡑ 걱정만 태산 같을 뿐, 해결책이 없었다.
그러나 별도리가 있나? 맨발로 고개를 숙이고 집에 가니 아니나 다를까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 신발 어떻게 했니?”
“......”
“잃어버렸구나!”
“......”
혀를 끌끌 차시던 할머니께선 일단 밥부터 먹으라고 하시곤 “내일 가면 꼭 찾아와야 돼!”하고 다짐하셨다.
다음날 눈을 밝히고 찾아보았지만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몇 아이에게 “그것 내 신발 아니냐?”고 물었다가 알밤만 얻어 맞았다.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전전긍긍하였으나 어느새 하교 시간이 되었다. 그냥 집에 갈 수도 없어 운동장에서 늦도록 놀다 갔고 또 한바탕 혼쭐이 났다.
“이런 맹충이 같으니…”
할머니는 화를 차며 꾸중을 하셨지만, 그때의 사정이 당장 고무신을 사줄 형평이 못 되었다. 어른의 헌 고무신을 하나 주시기에 새끼줄로 발등에 엮어 학교에 갔다. 그런데, 웬걸, 그것마저 누군가 신고 가버렸다.
“저 놈에겐 신발을 아예 사주지 말아야해!”
호된 야단에 눈물을 찔끔거리다, 하는 수 없이 맨발로 학교에 갔다. 그런데 우리 반에도 나와 같은 아이가 몇 명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는 공부가 끝나면 같이 놀다 헤어졌다. 신발 찾을 걱정도 같이 하고, 집에서 혼난 이야기도 나누고…
아마도 그런 현상이 학교 전체의 문제였던 것 같았다. 한번은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신발 문제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각 반 담임 선생님들게 책임을 맡긴 모양이었다.
종례 시간이 되자 선생님께서 신발 없는 사람은 남으라고 하셨는데, 나를 포함해서 예닐곱 명 되었다. 신발에 표시를 똑똑하게 해놓지 않아 잃어버린 사람도 잘못이라며, 그 벌로 청소를 하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매일 선생님께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으나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집에서는 “이런 맹충이! 너도 남처럼 못하니? 남의 것이라도 먼저 신고 냅다 집에 오면 되잖아!” 했지만, 마음이 약한 나는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저런 주변머리 없는 놈!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저래 갖고 어떻게 살아?”라는 꾸중을 들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토요일이었다. 수업이 일찍 끝났는데도 소위 주변머리가 없는 단골 문제(?) 학생들은 집에 못 가고 교실에 웅크리고 있었다. 왠지 교무실로 오라는 말씀 대신 그냥 “너희들 좀 남아 있어라!”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은 젊은 데다 키가 컸다. 꼬마였던 나에게는 거의 전봇대만큼이나 올려다보였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첫부임하신 분이라고 하였다.
교실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우리들은 장나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또 무슨 꾸중을 내리실까?’ 그러나 “다들 따라오너라!”는 말씀뿐 저만치 앞서 휘적휘적 걸어가셨다.
‘어디를 가시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최소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들녘의 민들레도 바라보며, 우리는 손을 잡고 종알거리며, 자갈길을 걸었다.
그날은 장날이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마을이 온통 시끌벅적했다. 장사꾼들이 풀어놓은 보따리에선 온갖 물건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의 눈기를 끌었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님을 따라가는 처지여서, 눈깔사탕이나 엿판도 그냥 지나갈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께서 서서 기다리는 곳으로 부지런히 다다라 보니 신발가게였다. ‘왜 저기 계시지?’하고 의아해 할 틈도 없이, “자, 하나씩 골라 신어봐라!”하시곤 손을 잡아 끌고는 발 문수에 맞추어 신겨 주시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의도를 알아챈 우리들은 마치 죄를 짓는 듯한 심정이었다. 가뜩이나 수줍음이 많은 시골아이인 터에, 죄송스런 짓을 선뜻 할 수가 없었다.
장터를 좀 벗어난 자리에서 고개를 더욱 깊이 떨구고 있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입을 여셨다.
“너희들 마음을 선생님이 잘 안다”하시곤 담배 연기를 한번 뿜으시더니 말씀을 이으셨다.
“너희들이야말로 착한 학생들이다. 앞으로도 자기 신발이 없다고 해서 남의 신발을 신지는 말거라.”
비록 ‘불교’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전쟁에 찢긴 살벌한 환경에서 자라던 어린 소년들에게 ‘바른 길’을 깊이 심어주신 그 선생님. 그분은 보살이셨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새해에는 수소문하여 ‘구두표’라도 한 장 보내 드리면 보은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