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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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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함유선 1989년 01월 83호
나는 자주 여행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달리 뚜렷한 목적이 있을 리 없는 그런 여행을 꿈꾼다. 이와 같은 여행에의 꿈은 특별히 어느 순간에 찾아 오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곤 한다. 나를 괴롭혔다기보다는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망에 빠져들게 했다. 강의를 하다가도 문득 창 밖으로 하얗던 목련꽃이 어느새 시들어 버린 것을 바라 보았을 때 늦잠에서 약속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어쩌다 밤늦게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한 움큼의 달빛을 보게 되었을 때 나는 여행을 하고 싶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 다른 세계를 향하는, 낯선 세계로의 유혹이다. 곧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서 잠시 다른 세상을 꿈꾸어 보는 것이리라. 여행은 좌절된 욕망을 일으켜 세우고 상처 입은 가슴을 쓸어주고 달래주기도 한다.
내가 끊임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망을 마치 몸살처럼 앓아 왔다고 해서 그 욕구에 떠밀려 훌쩍 일상을 떠나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것은 다만 마음뿐이었고, 언제나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일들이 나를 떠나지 못하게 단단하게 묶어 놓고 있었다. 하기는 그 일상의 끈들을 매몰차게 끊어 버리지 못하고 있던 것은 나의 성격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떠나고 싶을 때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는 것이 또 나를 괴롭혔다. 마치 풀 수 없는 매듭처럼, 그 답을 알아내지 못한 문제처럼 내 마음속 한 구석에 그 욕구는 늘 잠재워져 있었다. 여행에의 꿈은 언제나 펼쳐지지 않고 편지인 채로 내 마음의 책상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득 나는 나의 이런 욕구, 떠남에의 끊임없는 동경, 여행에의 갈망이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일종의 도피심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 현실에서 안주하지 못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고, 다른 세상에 가서야 나는 비로소 안주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그런 도피심리를 낳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꾸다 보니 여기는 내가 안주할 곳이 아니라는 이런 변증법적인 사고가 나의 여행에의 욕구를 키워 왔고 그 실현이 불가피하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은 더욱 커지고, 그만 나는 그 무게에 짓눌려 버릴 것만 같았다.
“마침내 유리장수가 나타났다. 나는 그의 모든 상품을 자세히 살펴보고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 당신은 색유리를 갖고 있지 않단 말이요? 붉은 유리, 푸른 유리, 장미빛 유리 등, 마술 같은 유리를 천국의 유리 말이오? 경솔하군. 당신은 이 가난한 동네를 감히 돌아다니다니, 인생을 아름답게 보게 하는 색유리조차 갖지 않고!’ 그러고는 그를 세차게 계단 쪽으로 밀어부쳤다. 그는 계단에서 중얼거리며 비틀거렸다.”

-보들레르의 못된 유리장수

그렇다. 보들레르가 인생을 아름답게 보게 하는 색유리를, 마술 같은 유리를, 천국의 유리를 갖고 싶어했듯이, 나는 어쩌면 여행이라는 하나의 유리를 통해서 바라다 보이는 또 다른 세상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라다 본 세상은 어렸을 적 막연히 꿈꾸었던 세상이 아니었을까.
지난해 정월 겨울바다 하조대에 갔었다. 텅빈 바다를 바라보니 온갖 자질구레한 다툼도 잊어버리고 모든 잘못들은 서로 용서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슬펐다. 터무니없이 슬펐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있었던 여행에의 욕망은 내 발밑에 깔려 있는 모래알만큼이나 작아져서 그만 덧없이 물결에 휩쓸려 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황량한 모래톱 위에서 혼자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나는 얼마나 작고 얼마나 초라했는지…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나의 어린 친구들은 ‘벌써?’라고 놀라면서 물었지만, 나는 ‘마침내 !’ 돌아섰다. 몹시도 원했던 겨울바다에로의 여행, 그 바다에 가서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등을 돌리고 그날로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그후에도 나는 마치 자학과도 같은 여행을 꿈꾸었고, 낯선 고장이 주는 두려움 속에 나를 내맡기고 싶어했다.
새해에도 나는 아마 여행을 하고 싶어 몸살을 앓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하는, 멋진 유리를 갖고 싶고 어딘가에 그 유리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하는 유리를 갖고 있다면 나는 그 유리를 찾아서 여행을 하고 싶다. 그 유리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싶고, 그 세상에서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쉬고 싶다. 그 유리를 찾을 때까지 안주하지 못하는 나의 영혼은 늘 여행을 꿈 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