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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빈정사 지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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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원자 1991년 11월 117호
지선스님.
우리가 스님의 이름을 소중하게 기억하는 것은 스님이 이 시대의 아픔에 오래도록 정면으로 마주서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의 민주화에 조금이라도 눈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는 스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토록 친숙한 이름임에도 불고하고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나’라는 개인에 묶여 더 큰 것에 한 발자욱도 내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큰 뜻을 위해 올곧게 사는 이에게 느끼는 위축감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한 달의 반을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워낙 바쁘게 시간을 쪼개 사는 분이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민족
자주·통일불교 운동협의회 사무실을 찾았다?、척박한 이 땅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분이기에 세상에 대한 울분과 고뇌를 눈에 담은 중후한 모습의 사십대를 연상했는데, 너무 젊다.
‘나, 나이가 많은데------”하면서 멋쩍어 하는 스님에게 수만 혹은 수십만 군중의 눈과 귀를 열리게 하는 불교 운동권의 대부다운 모습은 없다. 매우 서정적인 인상이었다. 추수를 끝낸 들녘에 서 있는 순박하고 따뜻한 농부의 모습과도 같은.

스님이 의장으로 있는 통불협 사무실에서 스님을 만났기에 인터뷰의 첫 질문은 통일에 대해 붙는 것으로 시작됐다. 마침 평양에선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고 있었고, 북한의 연 총리는“분열을 반세기나 끌지 말고 1995년이 민족 통일 원년이 되도록 하자”고 했다던가. 통일 운동의 현장에 서 있는 스님의 얘기가 궁금했다.“지금 국제 정세는 평화 공존, 긴장 완화, 동서 화해의 흐름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반도는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대입되자 않는 유일한 나라지요. 우려 전민중 세력이 당하는 고통의 모든 원인이 분단에 있는데도 우리 정권은 통일‘의지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북방? A책이나 통일 정책, UN 연설 따위가 진실이라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치가 있어야지요. 통일을 저해하는 국가보안법이나 노동악법을 비롯해 핵무기 철수, 군 감축문제 들을 조금도 수정하거나 폐지하지 않고 있는가. 통일 의지가 없다는 얘기가 되죠. 그들이 통일 의지를 갖지 않으면 통일은 힘들어요’
비로소 지난 십 년 동안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숙제에 골몰해 왔던 운동가의 고뇌가 엿보였다. 무르익은 가을 볕이 창문을 넘어 들어와 방안에 가득한 가운데 스님의 통일 얘기는 계속되었다.
“우리가 통일 운동을 하는 것은 통일의 당위성을 부르짖어 통일 운동을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하거나, 압력 단체는 될 수 있지요. 그러나 실제로 통일을 해내는 집단은 남북한 두 정권입니다. 통일이 되려면 남북한이 동시에 변해야 해요. 북한은 다당제에 따라 민주 선거를 해서 민주화를 이루어야 하고,남한은 페어플레이로 대통령을 선출하여 민주화부터 실현해야지요”
한 민족이 두 조각이 난 지난 사십 여 년 동안 통일 문제를 악용하며 정권을 연장시켰던 정부나 민주화 운동이 너무 지나치면 군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면서 민주화 운동의 앞에서 주춤대는 야당이 이땅에 뿌리박고 있는 한 통일은 결코 낙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그러나 희망적이지 못한 상황이기에 스님이, 그리고 불교가 해야 할 일은 많다.
“그 동안 불교는 지식 위주로 관념화,선비화 되어 있어 분단 국가인 남북한 전국민 대중이 당하고 있는 현실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교리가 아무리 크고 넓고 깊어도 현실 사회에서 중생고의 질곡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이 따르지 않는 다면, 지적 호기심이나 만족시키는 관념의 종교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 근현대 역사를 들춰볼 때 불교가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 앞장섰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반성해야 할 일이지요. 승가 단체가 오합지졸이 모이는 곳이 아닌,깨어 있는 사부대중의 공동 단체라면 그 이름에 걸맞게 민주화,통일 문제에 동참하여 연기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부처님의 생명 사상을 실천해야지요. 역사와 사회 그리고 민족과 함께 하지 않는 종교는 각성된 민중에겐 외면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한 민족끼리 원수보다 더 증오하며 총칼을 들이대고 으르렁대는 비인간적이고 더러운 이 나라 역사에서 불교가 더 이상 지배 논리에 앞장서지 말야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스님의 통일 이야기는 오래도록 이어졌는데, 그 길이는 마치 스님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며 느끼는
절망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느껴졌다.

5공이 출범하면서 비리 폭력승정화’라는 명분으로 그‘토록 정권에 고개 숙여 온 불교마저도 군화발로 짖밟았던 10.27법난은 이십여 년 동안 평범한 승려의 길을 걸었던 스님을 민주화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했다.스님은 제주도 관음사에서 주지소염을 맡아보고 있던 80년, 10Z7법난을 맞았다. 그때 스님은 총무원 비서실장과 종회의원을 지냈다는 것과 현 주지라는 이유만으로 제주도 보안대 지하실에 갇혔다.
사방이 흰 지하실 방에 멀어넣고 스님의 비리를 캐내려 하던 그들은 일주일 뒤, ‘아무런 혐의가 없다’며 스님을 풀어 주었다. 그 무렵 관음사는 운영위원회에 위완 삼십 명을 두어 사찰을 공개적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스님은 다달이 용돈을 타 쓰고 있던 터라 비리가 있을 수 없었다. 영문을 모른 채 끌려가서 그들에게 윽박질을 당하고 돌아오는 스님의 마음에선 심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동안의 승려 생활을 점검하게 되었지요. 승려로서 수행과 학덕이 뛰어났던가 하는 반성이 들었지요. 그리고 근현대 역사에서 역사와 민족 앞에 취해 왔던 불교의 모습들은 과연 옳았는가, 호국 불교라는 미명하에 어용적이고 반민족적이지는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앞으로 승려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 아니면 숭려 생활을 계속해야 할 것인지, 그런 원초적인 질문까지 하게 되었지요.”
그러한 의문을 하고 있던 스님은 지신의 모습과 불교의 존재 가치를 점검할 요량으로 은사 스님의 문병 차 들렀던 광주 문빈정사에 머물기로 했다. 스님은 그 곳 광주에서 광주항쟁의 역사적인 아픔을 새롭게 인식하고는 민주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경상도나 충청도로 갔으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선택
한 것 같다는 농담에 섞인 스님의 웃음이 자못 의미 깊어 보였다.스님이 표현한‘이 길’은 문빈정사에 머물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광주항쟁을 치른 광주 시민이 절에 대해 갖는 인상은 좋지 않았다. 문빈정사는 무등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탓에 술을 먹고 문」짝을 차거나 방뇨하는 일이 허다했고 절에 대고 폭언하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참다 못해 문밖에 나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사람이 다 죽어 가도 나와 볼 줄도 모르는 너희 불교는 뭐냐? 다른 종교는 모두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고 있는데 너희는 어용만 일삼고 있지 않느냐γ고 눈을 부릅뜨며 비난했다.
그들에게 스님은 불교의 입장을 해명하고 변명했다. 그런 일이 한두 사람 건너 알려지자 사람들은 광주 시내에서 열리는 집회나 행사 때마다 스님을 불러내 5·18민주항쟁에 대한 불교의 입장과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일이 점차 늘어나자 스님은 아예 역사적이고 민중적인 불교의 입장을 설명하는 ‘무등지’라는 소책지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기에 이르렀다.
1985년엔 ‘민족과 함께, 사회와 함께, 역사와 함께’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무등민족문화회를 만들어 82년대의 그 암울했던 죽임의 시대 앞에서 침묵하며 관망만 하던 불교의 역사를 새롭게 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민불련이 결성되자 지도위원이 되었고, 전민련 ·국민연합을 비롯한 모든 민족 민주 단체와 교류를 가지고 연대 활동을 벌였다. 6·10대회 때는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서울상임공동의장을 맡아 시청 앞 성공회에 들어가 대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불교의 수행 정진은 들어앉아서 언제까지고 생각만 등F는 정체적인 모습이 아니지요. 실천을 통해서 터득한 지혜를 바탕으로 하는 본질 적인 삶이어야 합니다. 불교가 산역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죽은 역사나 위인들의 뒤치다꺼리에만 관심이 있거나, 사람들과 만날 때 진리가 아니라 이해 관계로 만난다면 죽은 불교가 될 수밖에 없어요. 민중불교 사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민중불교란 불교 경전 속에 있는 사회성,역사성,민중성을 지금 시대에 맞춰 실천하여 보살사상을 사회에 구현하는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자신이 벌이는 일련의 운동을 민중불교라고 못박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렇듯 민중 불교란 편의상 이름을 그렇게 붙인 한시적인 용어일 뿐 불교와 민중불교가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님을 두고 어떤 이들은 정치적이라 하고, 저러다가 딴 사상에 물들어 무슨 일 내는 것이 아니냐, 심지어는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것 아니냐 하며 색안경을 쓰고 보기도 한다. 같은 스님네들까지도 고무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때면 스님 마음은 착잡해진다. 그러나 훗날 누군가 80년대 암울했던 상황에서 불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물었을 때, 떳떳하게 고개 들고 답해 줄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기에 그러한 착잡함은 오래 가지 않는다.
“운동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이 나라 양심 세력이 뜻밖에도 불교적인 정서를 꽤 많이 가지고 있더군요. 그것은 곧 불교가 전통적으로 민족성. 민중성을 가장 많이 담보하고 있음을 뜻하지요. 그래서 나는 우리 불교가 깨어나야 민주화는 물론이고 통일도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가 할 일은 많아요”

스님의 일복은 아무래도 타고난 듯이 보인다. 일년 내내 공부보다 벼농사에 매달렸던 어린 시절이 그렇고, 열여섯 살에 출가해 하룻밤 육백여 명씩 몰려드는 수학여행 학생과 관광객을 뒤치다꺼리 하느라 녹초가 되곤 했던 시절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어디 그뿐이랴.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영광 불갑사를 일으켜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던 일이나, 분규가 한광이던 관음사로 내려가서는 염불과 법문으로 분쟁을 잠재우고 불교 회관과 요사채를 짓고 도로 공사까지 했으니, 스님의 일복이 타고난 것임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스님은 석림회, 서울불교청년회, 대불련 등 열한 개 단체가 소속되어 있는 통불협 의장과 정토승가회의장, 전민련 ?공동의 장 같은 직함을 여렷 가지고 있다. 이렇게 직함이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숨쉬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을 눈여겨 바라볼 때 스님이 져야 할 짐은 너무나 많은 듯이 보인다. 환경공해방지운동, 반전반핵운동, 인권운 동 같은 이 시대의 모순을 풀어 나가는 운동 모두가 스님이 거둬들여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내일이라도 민주화되어 이 나라에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 내가 할 일은 목탁 칠 일밖에 없지요. 그렇지 않으면 이 상태, 이 걸음으로 계속 나아갈 겁니다.”
스님이 밤낮으로 꿈꾸고 있는 정토, ‘통일된 자주독립국가가 실현되는 그 날은 언제쯤일까.
“얼렁 가랑께 미쳤가니 울어. 아, 얼렁 안 가?
교도소에서 면회온 피붙이 누님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나서 쇠창살 등지고 돌아 앉아 종일 눈물 뿌렸다던 지선스님을 우리 역사는 언제쯤 한가로운 산사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교도소가 아닌 산사에서 사를 쓰고 있는 스님을 보고 싶다.

글/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