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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불교가 만난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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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현담 1991년 11월 117호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상황
몇 년 전만 해도 그다니스크 레닌 조선소의 일개 전기공이었던 레흐 바웬사는 지금 폴란드의 대통령이다. 동구라파의 모범 사회주의 국가라던 동독은 이미 혼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난 해까지만 하더라도 미국과 힘을 겨루며 그 세를 과시하던 소련 역시 형편없이 몰락한 지경이다. 이들이 비록 소련과 동구라피를 중심으로 한 현상이지만, 이제 기존의 사회주의 블럭은 존재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따라서 소련과 미국의 관계.혹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블럭과 그에 대항 경쟁하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블럭의 관계도 이제 그 의미를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대립과 협력 관계가 전혀 이해를 달리하는 관계로 변화하게 되었다. 미국과 일본·독일 EC의 관계, 일본과 EC의 관계.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제3쩨계와 자본주의 제국·새로 구성될 소련연방의 관계 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빠르기는 누구도 결과를 예측하지 못할 만큼 빨라서 가히 첨단 산업 사회 매카니즘의 변화에 버금간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이 이러하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우리 지구의 운명,금세기 혹은 앞으로의 인류사도 또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지구의 운명을 내다보자면 논의의 본래 의도야 어떠하든 핵 문제 하나만 가지고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언제 어떻게 될런지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인류사의 앞날이라는 것 역시 지구의 운명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의 자기 파멸적인 속성 때문에 미래를 보장 받기가 어렵다고 해야 하겠다.

대원군의 시간
그야말로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데 한국사의 시간은 저 이조 말의 대원군 시대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고나 해야 할까, 도무지 할짝 열고 나아감이 없다.
우리 시대의 가장 커다란 모순인 분단의 질곡을 깨뜨리는 데에도 외세와의 관계를 떼어놓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분단의 주요 원인이자 목적인 미 ·일 ·중·소의 세력 관계와 이해 관계는 이미 와해되었다. 달라진 대외 환경은 민족 주체들의 좀더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대단결을 바탕으로 한 통일된 정치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남북 쌍방은 달라진 국제 환경을 자신의 통일 의지로 실현시킬 기회로써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전혀 움직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벌써 세 차례에 걸친 고위 당국자간의 회담이 있었고 이번에 다시 열린 명양 회담은 현재 진행중에 있다. 그뿐만 아니라 재야에서는 「범민련 대회」를 조직하여 두 번째 행사를 가진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 이러한 만남. 이러한 움직임들이 과연 안팎으로 급변하는 환경에 발맞추어 제 속도를 내며 제 노릇을 다 하고 있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로 만나자고 하면서도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장치는 그대로 두고 있고, 자유 왕래를 주장하면서도 북한에 갔던 인사들을 범법자로 몰아 구속시켜 두고 있다. 또한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풀어가려 하지 않고, 역시 외세에 기대어 해결하려고 하는 작태가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불교는 어디에
사실 불교는 시간의 운동에 급급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결코 앞뒤가 분절된 것이 아니라 바로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운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사와 열반이 하나인 세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솔직히 우리 사회 속에서의 불교는 그 위상이 분명하지가 않다. 그 위상이 잡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전혀 아닌 것이 오늘 한국 사회의 불교가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있기는 있되 그 움직임 이나 사회적인 영향력이 지극히 미미했다는 말로 집약할 수가 있겠다. ~
다른 종교나 사회 운동 세력들은 나름대로‘민족사의 가참 큰 과제는 바로 통일이라는 인식하에 많은 모색과 실천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불교만이 자기 과제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서 뚜렷한 자기 모습을 찾아내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결코 적지 않은 사찰과 신도와 스님네가 있으면서도 자기 시대의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과제 하나조차 부여잡지 못했다는 사실은 오늘의 불교가 과연 존재하는 실체인가, 그렇지 않은 허상인가의 여부를 묻게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 동안의 침묵을 방관이나 무책임의 정표로 규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비록 작은 목소리였지만 통일을 바라는 간절한 기원이 없지 않았으며 또한 「통불협」을 중심으로 한 열렬한 실천 의지을 과소 평가하지 않는다. 이러한 실천과 통일 염원이 그나마 오늘의 불교 위상을 가능케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연석회의 보다 대중 공사를
오는 29일과 30일,양일간에 걸쳐서 미국의 LA에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의 불교 대표자가 만난다. 만남의 명칭이 「한민족 불교지도자 연석회의」또는 「남북 불교지도자 연석회의」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실로 분단 마흔 일곱 해 만에 남북 불교 최고 책임자들이 공죄적인 만남을 갖는다고 하니 먼저 축하할 일이다. 비록 너무 늦은 만남이지만 이를 계기로 좀더 활발한 교류와 협력, 그리고 긍극적으로는 하나된 조국의 통일 불교를 앞당긴다는 큰 책임과 역할을 가지고 회의에 임할 것을 참석자들에게 기대해 본다.
이번 연석 회의에서는 남북 불교의 협력과 교류, 민족통일 기반 조성, 해외 불교 지도자 협의 기구 창립 문제들이 토의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남측은 불교 문화재 조사와 교류·성지 순례 ·승려와 신도의 왕래,남북 해외 불교인의 정기 회합, 초파일을 전후한 조국 통일 기원 합동 연등 법회, 북한 불교 성지 복원과 지원 방안 들이 제시된다 그리고 북측 조선 불교도 연맹에서는 남북 불교 교류의 장기적인 통로 개설, 조국통일을 위한 남북 불교인의 공동 노력 방안, 한반도의 군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방언을 모색하는 공동 선언문의 채택, 그리고 조국 통일 기원 남북 해외 불교인 합동 법회들을 제안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제안과 요구등 보면서 오랜 단절 끝에 양측의 대표자들이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의 요구와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많으리라고 이해하면서, 한편으로는 서로가 최선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아울러 우리는 뜨거운 성원을 보내면서도 몇 가지 아쉬움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먼저 지금까지 남과 북의 대표성을 띈 자리가 어떤 합의나 이해보다는 서로간의 선전과 비방 때문에 늘 일시적인 만남으로 그쳤다는 데에서 기대보다는 먼저 우려가 앞섬을 감출 수가 없다. 또한 이번 행사를 조직하는 데에도 국내 종단의 자발적인 발기와 계획으로 이루어 졌다기보다는 하와이 대원사의 기대원 스님과 「한민족불교 교류추진 미주 불교 협의회」의 김도안 스님과 신법타 스님과 같이 미국에 거주하는 스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무척 감사한 한편으로 스스로는 역시 아쉬움이 남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회의가 남북 불교 단체 대표자들의 모임이면서 조국의 통일에 한 가닥 이바지하는 뜻이 담겨 있다면 당연히 그 동안의 역할을 도맡아 해온 「통불협」 대표자도 참석함이 마땅함에도 소식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러한 까닭에 이번 행사의 한계가 걱정스럽고 또한 아쉬움도 크다.
크게는 조국의 통일이요 작게는 종단의 일치를 이루는 일이므로 누구를 탓하고 지적하고 비판만 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이 시대, 우리 조국의 통일과 불교의 모든 현상이 어디 남의 일이며 님에게만 맡길 수 있는 일이겠는가? 더 늦기 전에 여기 대중의 마당에서 대중과 더 불어 다시 신심을 불러일으켜 세워야 하겠다. 저기 후기 산업 사회의 징후가 더욱 깊어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우리는 우리의 바른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