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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찾은 신라 탑塔ㆍ상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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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정영호 2001년 06월 232호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의 사자산獅子山 흥녕선원興寧禪院 자리에 법흥사가 새로 세워져 있다. 이 곳에는 흥녕사징효대사탑비(보물 제612호)를 비롯하여 석조부도 2기와 석실, 석관, 석조불대좌 등 신라?고려시대의 석조물이 전해지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사자산 흥녕선문의 개산조사는 철감 선사로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쌍봉사에 그의 사리탑과 탑비가 보존되어 있다. 징효 대사는 사자산문의 개산인으로서 그의 사적이 영월군 사자산 기슭의 흥녕선원 자리에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징효대사사리탑비의 비문 내용을 살피고서 그의 행적을 찾던 중 1965년 겨울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樂安面 일대를 답사하게 되었다. 비문에 의하면 징효대사는 쌍봉사의 선사지탑先師之塔에 면례面禮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상주尙州와 충청남도 공주公州를 거쳐 전라남도 광주光州까지 갔으며, 승주군 낙안면 동림桐林을 마지막 주석처로 삼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순천과 벌교를 거쳐 낙안을 찾아갔는데 옛 낙안읍성의 전통적인 우리의 마을이 살아 있음을 보고 크게 감탄하였다.
낙안읍성 마을에서 하루를 지내며 유지와 노인들을 찾아 옛 절터를 물어보았다. 전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지방도를 따라 고개 하나를 넘으면 선암사仙巖寺가 있으니 그 곳에 가서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지도를 펴놓고 보니 선암사는 거리도 거리이거니와 낙안면과는 같은 행정구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낙안에서는 전혀 찾을 길이 없어 마을사람들의 말대로 일단 선암사에 가기로 하였다.
지방의 유적을 찾을 때는 항상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된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산에서 내려오는 나무꾼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면서 유적지를 물어보곤 한다. 사실은 이렇게 하여 찾아낸 유적유물, 특히 불교유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은 탑이건 불상이건 부도, 석비, 석등, 모든 불교적인 조형물이 형태가 뚜렷하여 누구든지 불교적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도 낙안을 떠나 한참을 걸어 고개마루턱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겨우 한 사람의 나무꾼을 만날 수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젊은이였는데 낙안 성읍마을의 토박이라고 하면서 이 일대의 지리는 훤히 알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이 주변에 석탑이나 불상 등이 있는 절터를 못 보았느냐’고 물으니 선뜻 ‘저 뒤쪽에 있다’고 하며 그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쉽게 나온 대답에 필자가 오히려 의아할 정도여서 두세 번 다짐을 한 기억이 난다.
가리키는 곳이 그리 멀지 않아 이 청년이 직접 안내해 주겠다고 하여 같이 길을 나섰다. 현장을 가보니 고갯길에서는 가까우나 밑의 낙안마을에서는 역시 먼 곳이었다. 파손된 석축이기는 하나 옛 솜씨가 분명하고 그 위에 석탑과 불상이 있어 옛터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석탑은 탑신부, 기단부 할 것 없이 완전히 쓰러져 있었다. 그래도 3층 옥개석까지 부재가 완전하고 상층기단면석의 8부신중상들이 유난히 돋보였다. 도굴배들에 의하여 도괴되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바로 뒤편에는 석불입상 1구가 봉안되어 있었다. 직사각형의 큼직한 판석에 양각한 것으로 연화대좌와 보개석이 완전하였다.
부처님께 절을 하고 쓰러진 탑재를 하나하나 실측 조사하였다. 그 청년은 끝까지 필자를 도와 주었다. 해질 무렵 청년과 함께 낙안마을로 되돌아와 하루를 더 묵게 되었다.
보물 제945호의 금둔사지 3층 석탑은 현재 높이 3.92m로 일반형 석탑인데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형성하였다. 상륜부는 도괴될 때 파손되었는지 남아 있는 부재가 전혀 없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구성과 탑신부의 양식 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건립으로 추정되는데 그 시기는 9세기가 아닌가 한다. 특히 전체의 짜임이 단아하고 상층기단과 초층탑신석의 조각 등은 주목되어 우수한 석탑에 속한다고 하겠다.
금둔사지 3층 석탑 바로 뒤편에 보물 제946호인 석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연화대좌와 개석을 갖추고 있어 원위치의 노천불로 생각된다.
8각대석을 바로 앞에 놓아 배례석으로 삼고 있는데 원형인지는 알 수 없다. 직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을 놓았는데 원형으로 복련伏蓮이 돌려져 있고 상면에 2단의 괴임을 조출하여 그 위의 부재를 받도록 되어 있다. 중대석은 본래부터 생략했는지 현재 없으며, 상대석을 놓았는데 하면에는 하대석 괴임과 대칭으로 2단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측면에 앙련仰蓮을 장식하였는데 하대가 복판인데 비하여 상대는 단판이다. 상면에는 별다른 조식이나 시설 없이 입상을 안치하였다.
입상은 원각불圓刻佛이 아니고 직사각형의 판석에 양각한 것이다. 이 양각은 아주 강하며 대형 비상碑像으로서 판석 표면에 가득히 조각하였다.
소발의 머리 위에 육계는 나지막하고 이마에는 큼직한 백호 원공이 있으며 상호는 원형이기보다 방형에 가깝다. 양미간과 콧등, 입술 등은 정제되었으나 큼직한 상호에 비하면 다소 작아진 편이다. 양쪽 귀는 짧고 목에 삼도가 돌려있어 근엄한 인상을 주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쪽 팔에 걸친 의문은 간략하게 처리되었으며 가슴으로부터 내려진 법의문도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하단부는 대의大衣로 처리되었고 좌?우로 발끝이 노출되었다.
이 직사각형 판석 뒷면 하부에는 양각으로 코끼리형이 조각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개석은 마치 석탑의 옥개석과도 같은 형태인데 하면에는 큼직한 받침 2단이 있고 네 귀퉁이 전각에는 반전이 표시되었다. 수인手印은 양손을 가슴에 들고 있어 전법인轉法印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은 대좌의 연화문과 당당한 가슴, 동체 등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조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상호와 간결한 의문 등의 처리는 하대인 9세기경의 작품으로 보인다. 따라서 바로 앞에 건립되어 있는 3층 석탑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사찰의 배례불로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의 총 높이는 3.13m이며 입상의 높이는 2.11m이다.
현재 이 곳에는 금둔사가 중창되어 2기의 보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