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법은 높고 높아
하늘과 땅 사이에 가히 짝할 이가 없도다.
만약 정각산에서 종자기를 만났던들
어찌 황엽을 가지고 산을 내려 왔겠는가!’
종자기는 중국 춘추 전국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 당시에 또한 종자기와 더불어 백아라고 하는 거문고의 명인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역사에서 백아만 큼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은 없다고 할 만치 그의 음악 세계는 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는데, 불행히도 중국 땅에는 그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백아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거문고를 타고 있는데, 마침 산길을 지나던 어떤 사람이 자기의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범l 되었습니다. 그날은 종자기가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여 마지막으로 산과 들과 나무에게 거문고 소리를 들려주고 다시 는 거문고를 가까이하지 않을 생각으로 거문고 줄을 끊으려 했는데,바로 이 순간에 춤추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백아가 기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물으니 그는 지신이 바로 종자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아의 거문고 소리가 너무 좋아서 그냥 자신도 모르게 춤을 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아가 높은 산을 생각하고 거문고를 링기면 높은 산의 운치를 말하고, 맑고 깊은 계곡을 머리에 두고 타면 계곡의 정취를 바로 알아주는 이가 종자기였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그들의 사이를 일컬어 지음이라 하였고, 이러한 사이를 다른 말로는 지우지기라고 합니다. 이렇듯이 부처님이 정각산에서 얻은 깨달음의 경지를 바로 이해하는 이가 있었다면 부처님은 인도 땅에서 마흔 아홉 해에 걸친 행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된 일이 우리 중생에게는 참으로 다행 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마흔아홉해에 걸친 설법은 자신의 깨달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을 찾는 일에 바쳐진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먼 옛날의 삼천 제불은 깨닫고 난 바로 그 자리에서 곧장 열반에 드신 분이 매우 많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마흔아홉 해 동안 사람을 찾아 다니시던 부처님은 어느 날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상수 제자인 가섭에게 자신의 법을 위촉한 다음,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을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불성이 있어서 투철하게 수행하면 성불한다는 것에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불교의 핵심에서 벗어난 곁가지만 훌 붙들고 불교를 믿는 까닭에 성불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육조 혜능 스님도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으면서 불교의 참된 뜻이 담긴 법을 피하려 하지 않고 복을 구하려 한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우리 범부에게는 복이 좋기는 하지만, 복을 구한 ‘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탐심에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즉, 복을 구하려면 이것저것 많이 취해서 자꾸l아 두어야 하는데, ” 이것은 물건이나 명예나 지위에 탐심을 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이므로 복을 짓는 것은 탐욕의 다를 드러냄인 것입니다. 그렇게 복이 중 하다면 그것이 죽음의 자리에서 무슨 영험이 있는가를 따져 보아야 하는데 영험은 고사하고 떠나가는 영혼들의 짐만 무겁게 만드니 결국 복을 지었다 함이 생사 해탈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결국 중생이 어리석어서 생사의 윤 ‘Y회를 덜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짐을 더 지려 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잠이 오지 않는 사람에게는 밤이 길고, 기운 빠진 사람에게는 가는 길이 한없이 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처가 되면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부처가 된다는 것은 해탈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중생 세간은 모두가 생사의 그물에 걸려 있어서 자유스럽지가 못합니다. 거지는 밥을 얻어서 배고픔을 면 해야 하는 고통이 있고. 천석꾼 만석꾼에게도 천 가지 만 가지의 근심 걱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까닭은 모두가 인연이라고 하는 것에 얽히어서 자유(해탈)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묶는 인연 가운데에 가장 큰 인연은 탐욕의 인연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업은 이 탐욕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물건을 손쉽게 잘라내듯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이라는 것이 눈에 보인다면 가능하겠지만, 인연인 줄은 뻔히 알면서도 눈에 보이지도 않고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닌 까닭에 실제로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나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인연이란 세계에 일키고 설키어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연결 고리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한 시점을 두고 자세히 보면 셀 수 없이 생겨나고 한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지취가 없다는 것은 처음 이전의 상태 또한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생無生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연은 현상에서는 뒤섞여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끝에서 처음으로 유추해 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단지 어떤 인연으로 얼키고 설키어 있을 뿐이지 본래의 자리에서는 무無l 상태인 것입니다. 여기서 무라는 것은 텅비어서 없다는 고정 불변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만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생겨나는 변화의 한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있다고 보여지는 것도 본래는 없다고 투철하게 관찰하면 좋은 인댄이건 나쁜 인연이건 그것 때문에 고통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스스로가 분별하고 집착하는 까닭에 속박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박이란, 무엇인가 바같의 큰 힘이 있어서 자신을 묶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묶는 것이기에 이것을 자작 자수自作自受 자업 자득自業自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해탈을 못하고 고통을 받는 갯도 스스로에게 묶이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해고치가 스스로 실을 풀어서 자기 몸을 감싸듯이 중생의 업도 마찬가지 이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물주가 어떻고 하느님이 어떻고 하는 것도 정신 없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요, 천당간다 극락간다하는 말들도 정신 없는 자들의 잠꼬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정신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헛된 일에 매
달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극락을 찾는 것도 지금 현실이 고통스럽고 괴롭기 때문이지, 당장 편하고 행복
하다면 무슨 용천할 일이 있다고 극락을 찾고 야단이겠습니까? 다만 한가지 방편으로 사바에서 짓는
자그마한 복이 우리를 편하게 하기는 하지만 극락가고 견성(깨달음)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합니다. 모름지기 극락을 가려면 견성을 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아미타경에는 여러 가지 극락가는 칼을 열어 두었는데 최하근기에 아미타불을 열 번 만 외우면 극락에
갈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실컷 자빠져 놀다가 문득 아미타불을 열 번 외운다고 해서 극락에 갈 수 있겠습니까? 천만의 일폼이지요. 목 한번 불러도 극락에 갈 수 있는 일은 아미타불을 직접 법는 일입니다. 아미타불을 본 사람은 극락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생깁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에 사리불 존자가 있습니다. 하루는 한 외도外道가 와서 낳신들은 입만 벙끗하면 견성 성불이다 해탈 열반이다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슨 말이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리불은 간단 명료하게“모든 것이 소멸된 상태, 즉 얼키고 설킨 인연을 모두 끊어 버리는 것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인연은 곧 탐욕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탐욕을 끊어 버리면 탕탕무애落擾無碼한 열반의 경지가 나옵니다.
깨달음은 밝음이라고도 말합니다. 인간사에서 밝다는 것은 모든 일에 분명하고 확실한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천당도 지옥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이 소멸된 상태가 곧열반이요, 그곳으로 가는 길을 팔정도를 닦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 팔정도를 그대로 수행하면, 곧 부처의 길에 이릅니다. 다르게 무슨 길이 있는게 아니지요.
무착 선사와 문수보살의 만남은 중국의 불교 전개에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대화를 여기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무착 선사의 물음에 문수보살은“도를 닦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마음에 한치의 의심도 없다면 바로 그것이 살아 있는 문수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탐·진 ·치 삼독에 깊이 오
염 되어 있기에 진리의 바른 법을 보지 못합니다. 매화 가지에 꽃이 피면 봄이 온 줄 알고 오동나무 잎이 지면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알 듯이 이 우주 삼라만상도 바론 안목으로 보면 그 자체가 온통 진리의 자리입니다. 바다가 물이라면 파도도 물이요 거품도 물이듯이, 마음이 평등해서 의심이 없는 자리가 곧 절대의 자리요 살아 있는 문수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