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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산 각화사 정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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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1년 06월 232호
어느새 산이 깊어졌다.
산 아래에서 시작된 연초록 빛 새순의 물결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타고 정상으로 진군해 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고지를 점령하고서는 생명의 함성소리 요란하다.
오랜 동면을 깨고 꿈틀대고 있는 산룡의 자태가 어찌나 웅장한지 경외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 앞에서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오랜만에 자동차 여행을 택했다.
원거리 여행은 기차만한 게 없다고 여기는 터이지만, 서울에서 각화사까지는 죽령만 잘 넘으면 그다지 먼 거리라 할 수 없고, 산천이 요즘만큼 아름다운 때도 드문지라 피어오르는 정기를 마음껏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 산천은 어디 하나 성한 데 없이 몸살을 앓고 있다.
깎이고 파이고 뚫리고.
죽령을 넘기 전에 반드시 거치게 되는 단양은 차라리 눈을 감고 지나치기를 권한다.
8경으로 유명한 가경은 어디 가고 석회석 채취로 산 전체가 깎이고 멍들어 도저히 두 눈 뜨고는 볼 수 없다.
죽령은 지금 중앙고속도로 연결공사와 터널 뚫는 작업이 한창이다.
터널 길이가 8km에 이른단다.
죽령을 넘느라 죽을 고생 하지 말고 쉽게 가라고 산을 그대로 관통하게 만든다나.
낑낑거리며 기어오르지 않는 것은 좋지만, 몸통에 구멍이 뚫릴 산이 걱정이다.
이런저런 공사로 곳곳이 벌건 속살을 흉측하게 드러내고 있는 와중에서도 왕성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 소백산이 고맙기만 하다.
각화사覺華寺는 태백산의 남쪽 지맥인 각화산 아래 위치하고 있다.
춘양삼거리에서 북쪽으로 운곡천을 따라 가다보면 석현리라는 마을 입구에 각화사라는 돌간판이 서 있다.
그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각화사 입구에 이르러 길은 마무리된다. 길이 워낙 잘 나 있어 이 곳 역시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것 아닌가 걱정이었는데, 경내에 들어서니 고요하면서도 엄한 기운이 수행도량임을 알려 준다.
각화사는 신라 문무왕 때(676년) 원효 대사가 말년에 터 잡아 주석한 절로 스님은 이 터를 발견하고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조선조 한 때는 3대 사찰의 하나로 8백여 승려가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절이 소실되었다가 현재의 건물이 들어선 것은 ’90년 전 주지 동춘 스님이 오시면서부터 불사를 시작해 지금의 주지인 정진 스님이 불사를 마무리지은 것이다.
각화사는 풍수적으로 상당한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에서 병풍처럼 둘러쳐진 각화산을 보면 정상에서 왕두산에 이르는 자잘한 능선들이 절 뒤에서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절이라는 여의주를 두고 다섯 용이 다툰다 하여 오룡쟁주형五龍爭珠型의 형국이라고도 하고, 절 앞으로는 좌청룡,우백호의 능선이 절을 싸안 듯 마무리되고 있어 가재형국이라고도 한단다.
모두 천하의 길지임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각화사에서 왼쪽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조선시대 사고史庫 터가 있다.
사고는 고려와 조선시대 나라의 역사기록과 중요한 서적?문서를 보관한 국가의 서적고書籍庫로, 전란 등에 대비해 귀중한 사서를 중앙에 집중 보관하기보다 지방에 분산하여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각화산 사고는 묘향산,오대산,적성산과 함께 선조 때 세워진 것으로, 여기에 사고를 만든 것은 각화산에 이른 태백지맥이 좌우로 팔을 벌려 춘양땅을 껴안 듯 한 전형적인 장군대좌형의 길지였기 때문이라 하는데, 워낙 고산준령에 막혀 있어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는 요소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각화산과 각화사가 유명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사고지인데, 그 때문에 주지 정진 스님은 봉화군과 1년 넘게 싸우고 있다.
군에서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사고지 복원계획을 세우자 스님이 이를 막고 나섰다.
지방자치단체에서야 유적을 복원해 관광객을 유치해 보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봉화군이 요즘 선비촌을 세우고 향교를 수리하는 등 집단장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이는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이나 죽령터널의 개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정진 스님은 추측한다.
어떤 이는 묻는다.
사고지가 멋지게 복원되면 찾는 이들도 많을 것이고 반드시 절을 거쳐가야 하는 만큼 절도 번성할 터인데 왜 못하게 하느냐고.
그러면 스님은 말한다.
제발 이 곳만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정진 스님은 각화사만큼은 절대 수행도량으로 사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각화사를 유원지화시킬 수는 없어요.
그리고 오대산 사고 복원의 경우를 봐도 누가 관리하지 않으면 풀만 무성하니 애물단지가 되어버립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만들어만 놓고 분명 관리는 나 몰라라 할텐데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에요.” 그래서 스님은 사고지까지는 1시간 정도 올라가야 해 오르기도 힘들어 사람들이 가기 쉽지 않으니 마을 입구에 기념관을 세우라고 권했고, 봉화군에서는 그 안을 긍적적으로 검토중에 있다.
그러나 스님의 도량사수 노력이 성공할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일이다.
봉화군 주변에는 수행정진하는 스님들이 유난히 많다.
특히 비구니들이 많아 120여 명이 있고 비구는 30여 명 정도 된다.
그 가운데서도 각화사 태백선원은 엄격하기로 유명한 가행정진도량이다.
본사를 비롯한 주변 동암, 서암,북암에서 일제히 안거에 들어간 30여 명의 스님들은 하루 17~18시간 정진을 하면서 일체 산문출입이 금해진다.
11시에 방선해서 1시 30분이면 일어나야 하니 눈 붙이는 시간은 2시간 정도. 1시간만 자리를 비워도 퇴출당하기 때문에 안거 기간 중에는 아플 수도 없다.
그러면 퇴출당하는 스님들이 많겠다 싶었는데, 지난 동안거의 경우 한 사람도 자리를 비운 바 없고, 아픈 사람도 없어 전원이 해제를 맞이했다고 한다.
동안거 후 계속 태백선원에 머물며 수행하고 있다는 한 스님은 “있다보니 참으로 편안하다.
여러 군데를 가보았지만 각화사만한 수행도량을 아직 보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각화사 선방의 연륜은 그리 길지 않다. 100년 전 도량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진 것이 지난 ’90년 초였다.
전 주지이신 동춘 스님이 수행도량을 만들 참으로 불사를 시작하였고, 불사가 완성되기도 전에 사정이 생겨 다른 데로 가면서 ’94년부터 정진 스님이 와 불사를 마무리짓고 선방을 연 것이다. 정진 스님은 주지 스님이라는 말보다 선원의 원주라고 불러주기를 원한다.
결제 때면 스님은 수좌들과 함께 참선하면서 참선도 시키고, 수좌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1인 3역을 담당한다.
스님의 수좌를 대하는 태도는 여느 주지 스님들과 다른 데가 있다.
내가 할 일은 수좌들을 받들어 모시는 일이라고 스님은 말한다.
각화사를 진정한 수행도량으로 지켜내기 위한 스님의 노력은 참으로 지극하다. 사고지 복원을 반대하는가 하면, 고요함을 깨지 않기 위해 예불도 목탁 대신 죽비로 모신다.
수행도량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법당에는 인등도 켜지 않으며, 천도재도 지내지 않는다.
부처님오신날이 바로 엊그제인데 법당 천정에는 연등 하나 걸려 있지 않고 깨끗하다.
당일등만 단 것이다. 스님의 생각은 단 한 가지. 수행도량의 품격에 맞게 운영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걱정이 되는 것이 그러면 사찰 운영을 어떻게 해나가느냐 하는 것.
절의 규모가 있어 기본적인 운영경비가 있고, 선원의 스님들 뒷바라지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정진 스님도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란다. 전혀 대책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무리없이 절운영을 해나가고 있으니. 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 없이 버스를 타고 가서 장을 봐오곤 했다.
“하나에서 열까지 내가 다 해야 하니까 어떤 때는 벅차긴 하지.” 옆에서 도와 주는 스님이라도 한 사람 있었으면 좋지만 스님을 머물게 하려 해도 비용이 들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공부중인 상좌가 어서 와서 도와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스님이 절에 들어온 것은 5살 때였다. 위로 딸만 넷에 겨우 얻은 귀한 아들이었지만 일찍이 부모를 잃고 누님 손에서 자라다 결국은 여승이 된 할머니에게 맡겨지면서 절생활이 시작됐다.
어려서부터 나무하는 데는 이골이 났고 탁발도 어지간히 많이 다녔다고.
공부를 시작한 것이 26살 때였는데 몸에 병이 깊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오로지 부처님께 매달렸고 결국 소생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가 깊어진 것은 도봉산에서 한 번 크게 운 이후였다.
공부하다 참회의 눈물이 흐르는데 마치 폭포수 같더란다.
“그 때 생각에는 어떤 중생이 나를 물구뎅이에 처넣어도 원망하지 않을 것 같았어.
그저 중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오는거야.” 그 때 스님은 지나다가 누가 추워 떨고 있으면 옷을 벗어 주고 미친 여자를 만나면 경찰서로 안내해 주는 등 모든 중생들이 그렇게 불쌍하고 안타깝더란다.
그러다 하루는 은사 스님께 “일체중생이 불쌍하고 가엾다.”고 했더니 은사 스님 하시는 말씀이 “너 하나 구제하면 끝나.”하는 소리에 번갯불 같은 빛이 번쩍하는 경험을 하고는 공부가 더욱 깊어졌다.
젊어서는 학교 못 간 것이 아쉽고 부러웠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순간순간 ‘어쩌다 이 불법을 만났는가?’하는 감회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저 감사하는 마음 뿐이라고.
현재 스님의 세수 62세.
바라는 것이 있다면 태백선원에서 확철대오하는 이들이 탁탁 튀어나오는 일이란다.
“각화사는 과거 아홉 분의 조사가 났다 하여 조사도량이라 합니다.
그런데 18분의 조사가 나온다는 예언도 있습니다. 앞으로 아홉 분의 조사가 분명 태백선원에서 나올 것을 확신해요.” 이름은 무시할 수 없는가 보다.
각화覺華, 그 이름에 어울리게 많은 조사를 배출하였고, 지금은 깨달음을 향한 눈푸른 납자들의 가행정진도량이 되고 있으니.
그러나저러나 다시 지나쳐야 할 단양을 생각하니 또다시 마음이 산란해진다.□